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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딸깍 下 (문학3 2호 소설 투고작)
루룰루 2017-04-14 19:11:13 조회 : 997

계속 남을 마음이 있을까.

휴대폰으로 아내의 전화번호를 누르고잠시 머뭇거리다 통화를 눌렀다연결음은 기다림 없이 곧장 사라졌다.

"여보세요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그것도 일할 시간에."

나와 다른 시간을 사는 내 가족들은 이미 하루를 끝마치고 있었다수화기 너머딸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아빠 바꿔줄게."

딸은 아내 옆에 찰싹 붙었었는지 곧장 전화를 받았다.

"Hi, daddy!"

"하이우리 딸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학교는 잘 다니고?"

"Of course! 어제 Daniel이 Birthday party에도 초대해줬었어. Daddy는 잘 지내? Mommy랑 내가 없어서 심심하지는 않아?"

"그럼잘 지내지아빠도 그제 회사 사람들이랑 재밌게 파티했었어우리 딸씩씩하게 잘 지내니 아빠 마음이 놓인다다시 엄마 좀 바꿔줄래?"

"벌써파티 이야기해주려 했는데기다려봐."

짧은 통화였지만 긴 행복을 느낀 것만 같았다오늘 내 입가를 올린 일이 뭐가 있었나갑작스러운 씁쓸함이 살며시 다가올 때쯤 아내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다름 아니라 여보랑 할 이야기가 있어."

"잠깐만거실로 내려가서 통화할게."

아내는 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였고딸은 우리에게도 굿나잇이라고 크게 외쳤다.

"내려왔어무슨 내용이야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다름 아니라 내가."

"계속 말해봐."

나는 수화기를 막고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내가다른 일을 하면 어떨까 해서."

아내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들리는 것은 서로의 숨소리와 공간 소리미세한 수화기 잡음뿐이었다그 침묵은 일시적이었으나 밀폐 용기 같은 내 가슴에 수많은 감정을 억지로 꾸겨 넣는 것만 같았다이 동요를 들키고 싶지 않아 더더욱 나는 입을 떼지 않고아내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했다.

"1년 정도만 더 버텨줄 수 없어?"

"?"

"1년만 더 버텨줄 수 없어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아."

아내의 이런 답변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왠지 모르게 내 뒷목을 서늘케 했다.

"이런 말 원치 않은 거 알아하지만 우리 딸 중학교까지 1년 남았어거기는 기숙사 학교라서 더는 내가 옆에 있지 않아도 돼그럼 나도 한국으로 돌아갈 거고."

"."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일을 할 거야우리 딸 여기서 대학교육까지 마치게 하고 싶어그때 여보가 다른 유익한 일을 하든 뭘 하든 괘념치 않을게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줘부탁이야."

부탁이라는 말은 내 가슴에 커다란 진동을 일으켰다내 상황을 말할 엄두보다 아내가 내게 부탁이라는 말을 썼었던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봤다꾸겨 넣은 감정들은 진동으로 인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팝콘처럼 터져 나와 뿔뿔이 흩어졌다터진 자리에 남은 것은 없었다그저 느낌 없는 음성만이, 5글자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알았어."

"고마워여보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나도 당신이 날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어여보.

"우리 조금만 힘내자전화해줘서 고마워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다얼른 보고 싶어."

난 지금 당신이 필요해여보.

"나도 슬슬 자러 갈게미리 인사할게요굿나잇 앤 굿모닝사랑해."

"사랑해여보."

통화 종료를 누르자 세상이 다시 내 눈앞에 펼쳐졌다.


사무실에 화창하고도 불쾌한 하얀 불청객이 내 창문을 뚫고 나타났다하얀 불청객은 내 의자를 향해 삿대질하며냉큼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그 손끝은 너무나 날카롭고도 따가워 보였다곧장 블라인드로 불청객의 손가락을 자르고푸르디 하얀빛을 뿜어대는 형광등을 켰다사무실 책상 위에는 플라스틱 소재로 된 검은 상자 윗면에 불뚝 튀어나온 파란 별 모양 버튼 하나가 있었다키보드를 몇 번 두들긴 후 윈도우 사용자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아침에 본 메모장 편지가 덩그러니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안녕하세요희찬 씨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제가 만든 버튼이 무사히 희찬 씨 사무실로 갔겠군요. 118가지 단자 중 USB 단자는 처음이라 생소하셨겠지만 희찬 씨는 이 일에 전문이니 곧장 연결했으리라 생각합니다본론으로 말하자면 당신은 정리해고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이거 축하할 일도 아닌데 느낌표를 붙이자니 기분이 이상하네요아무튼저는 당신을 지켜보면서 당신이 이 회사에서 해고조치를 받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규칙에 따라 버튼을 60(±5)초 간격으로 총 100번 누르며 검증일을 열심히 한 당신이! 99번도 101번도 아닌 딱 100번을 누르는 당신이정직원인 당신이왜 짤리냐 이 말이죠.

그래서 전 당신을 도와주고 싶습니다방법은 간단합니다회사 인터넷망이 연결된 컴퓨터(당신 사무실 컴퓨터)에 이 버튼 규격 단자인 USB를 연결하고 버튼을 누르면 인사고과에 담긴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 파일과(백업도 포함!) 전산망 기록까지 통으로 날리게 할 수 있습니다당신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회사를 나갈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영웅이 될 기회라는 뜻이죠물론 지금 곧장 누르면 안 됩니다오후 5시가 퇴근 시간이니 거기서 10분 전그러니 4시 50~55분까지 이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그 이전에 누르면 효용이 없고이후에 누르면 저는 퇴근할 터이니 도울 수가 없어요그리고 사용한 버튼을 꼭반납수거함에 넣으셔야 합니다성공수거함에 넣어 이 버튼을 바깥으로 출품하기는 싫거든요.

물론 이것은 범죄입니다하지만 당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의 밥줄이 끊길 위험에 놓였는데 어떡합니까물론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 대신 퇴사 조치를 당할 수는 있겠지요. (제 생각에 회사 인터넷망을 지키지 못한 보안T이 1순위가 되지 않을까요?) 제 소개를 안 했군요편지를 뭐 써봤어야 말이죠하하저는 제조T에서 일하는 직원 정도로 알면 될 것 같습니다희찬 씨의 선택을 응원합니다그럼 이만. (Make And Push 이름 모를 제조직원이 만들고 씀)'

그제 회식에서 팀장이 내게 살며시 다가와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던 이유를 알았다그때는 그냥 술기운이 올라 곧이곧대로 들었는데이젠 그 말이 곧이곧대로 사과의 뜻이 아니었다오늘 내게 점심을 사준 것도 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USB 단자를 빼고 오후에 시험해야 할 버튼을 규격 단자에 맞춰 연결했다자동으로 모니터에 테스팅 화면이 떴고나는 딸각하며 일정한 간격에 맞춰 버튼을 눌렀다사무실 바깥으로 불규칙하게 딸깍딸깍 소리가 울렸다그 불규칙이 늘 규칙적으로 들리는 시간서로 헛도는 톱니바퀴가 강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시험 버튼을 100번 누른 후 테스팅 종료 버튼을 마우스로 눌렀다그리고 '종료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에 '(Y)'를 눌렀다.

책상 위에 시험할 버튼은 파란 버튼 하나밖에 없었다.

선택을 응원한다니무슨 샤르트르라도 되는 사람인가.

나는 이 버튼을 눌러야 할까.

누른다고 내가 여기에 계속 남아있을까.

계속 남을 마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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