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맨위로

그냥 올려본다

상처 받은 여성들의 마음에 봄이 깃들길...
모든고양이는평등하다 2018-02-11 14:49:33 조회 : 753

  뒷북 치는 것 같지만 며칠 전에야 문단 성폭력 문제를 검색해 봤다. 구글에서 두 단어만 타이핑 해도 사건 기록이 수백 개나 뜨는데도 그동안 무심하기만 했다. 시간을 일부로 내서 문학3과 문단 성폭력에 관련된 팟캐스트도 들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마 한국 여성이라면 나와 똑같은 상념에 잠길 것이다.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약자인 것은 분명한데, 평생을 그 시스템에서 살다 보면 그것을 잊게 된다. 약자가 약자로 살면 자신이 약자란 것이 잊게 되고 약자의 삶이 일상이 되어 그것이 세계로 굳어진다. 어쩌면 나는 남성 사회가 제시한 가드라인에 갇혀서 그 안에서만 사유 하는 못난 물고기 한 마리였는지도 모르겠다. 투명한 어항에 갇혀 헤엄치는 공간만이 전체라고 믿는 못난 물고기 말이다.

지금 나를 여성의 입장에서 놓고 생각해 보겠다.

나는 단점이 많은 인간이다.

어릴 때 나의 아버지는 나를 딸이라고 해서 얕잡아 보는 사람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경제적으로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했지만 정신적으로 딸을 낮은 위치에 놓거나 학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평생 부모에게 단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가장인 집안에서 성장하다 보니, 강자는 어머니와 언니였지 키도 작고 말수가 적은 남동생이 아니었다. 나에게 남자란 돌봐줘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에 나가서 내가 몰랐던 남성들의 폭력적 태도를 접하고 많이 놀랐다. 또 남자와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남자들의 이해 못할 강압적 태도에 당황했다. 왜 남자가 이유도 없이 여자와 사귄다는 이유로 사생활을 간섭하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나는 남자 상사에게 대들다가 맞아보기도 했고 숱한 남성과 말로 싸웠지만 어쩐 일인지 가슴에 남는 상처가 없다. 내 눈엔 여전히 남성은 악한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여자처럼 남자도 약자와 강자로 나뉘어 그 중 일부는 보호해줘야 하는 존재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나란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나는 남성에게 폭력을 썼던 경험도 있다.

삼십 대 중반에, 회사를 다닐 때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책상 빼겠다는 남자 상사가 다른 부하 직원을 데리고 왔다. 상사는 폭언하며 나를 겁먹게 하려고 내 책상을 건드렸다. 열 받아서 상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너 죽을래? 너도 맞아볼래?"

나는 소리 지르며 달려들어 남자 상사의 멱살을 잡고 엉덩이를 서너 번 세게 걷어찼다. 그때 고작 사십칠 킬로의 몸이었는데 무슨 힘이 나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상사는 나보다 훨씬 힘이 세니 몸싸움을 하면 내가 나가 떨어졌을텐데 오히려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났다.

여자가 죽기 살기로 덤비면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겁을 집어먹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란 동물을 겁먹게 하는 법을 배웠다. 남자는 조직적인 동물이어서 자기 조직에서 망신 당하는 걸 제일 무서워한다. 여자 직원에게 맞는 상사라는 건 남자들 사이에서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니다. 성추행하다가 망신 당하는 건 오히려 덜 창피해도, 여자한테 맞는 건 견디기 힘든 굴욕일 것이다.

그때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남자 개인을 찍어 누르는 건 효과가 없어도 조직을 건드리려고 하면 남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조직을 방어하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남자를 공격하고 싶으면 일단 그가 속한 조직을 찍어 누르는 것이 효과가 있다. 그들은 처음엔 은폐를 시도하다가, 은폐가 안 될 것 같으면 조직적으로 나서서 개선하려고 할 것이다. 때문에 최영미 시인의 방법이 그리 나쁘다고 보진 않는다. 문단 성폭력을 건드리려면 남자 중에서도 제일 힘센 수장을 건드리는 것이 맞고, 그것이 안 되면 그 수장이 속한 조직을 초토화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쨌든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폭력을 쓰고도 사과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창피한 일이다. 그때만 해도 어려서 내가 폭력을 썼다는 것보다 당했다는 것이 더 억울했다. 겁먹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가 좀 더 성숙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그때를 되돌아보니 많은 후회가 된다. 나는 적어도 폭력을 쓴 부분에서 그때 직장 상사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남자 직장 상사를 걷어차는 여자를 건드릴 남자는 회사 내에 없다. 그래서 그랬나. 난 솔직히 십 대와 이십 대 이후로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거의 없다. 아마 남자들에게 나는 속된 말로, '개 또라이 쌍년.'이었을 것이므로 굳이 건드려서 물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한 번은, 내가 키우는 새끼 고양이를 괴롭히는 남자 조카가 울 때까지 때린 적도 있다. 물론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조카에게 폭력을 쓴 것을 백 배 사죄하고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그리고 네가 맞은 건 너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모가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란 걸 이야기해 주었다. 다행히 조카는 상처가 남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약한 고양이를 때려서 미안해." 하고 사과해서 나를 더 부끄럽게 했다.

두 폭력은 모두 순간적 분노에 휩싸여 터지듯 나온 행동이었다. 물론 지금 성질이 다 죽어서 그렇게 화를 내는 일은 없다. 내 인생에서 딱 두 번 저지른 폭력이지만, 두 번 다 남성이라는 수컷에게 행해진 폭력이었다.

아마 그 일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여성을 약자 위치에 놓고 감싸주어야 할 때 냉정하게 저울질하며 사태를 파악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만약 내가 최영미 시인이어서 술자리에 앉아있고 고은 시인이 내 앞에 앉아 유부녀 편집자를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교활한 늙은이'라고 외칠 수 있었을까. 방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유부녀 편집자가 시인과 스킨쉽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공적인 자리에서 서로 허벅지를 주무른다고 반드시 성폭력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유부녀 편집자의 표정을 살필 것이고 그녀가 불편해 한다면 '시인님. 그러지 마세요.'하며 일침을 놓겠지만, 편집자가 웃고 있다면(참 이 부분에서 애매하다. 나도 여성이지만 여성이 웃는다고 다 웃는 것이 아니란 걸 많이 경험해 봤으니까.) 선뜻 끼어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성이 습관적으로 일을 무마하고 회피하기 위해 웃는 방법을 택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남성들이 그 부분에서 오해를 할 수 있다. 웃는 행동은 어릴 때 부모에게 배운 습관이거나 평생 약자로 살아온 사회적 위치 때문에 생긴 못된 버릇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유부녀 편집자의 본래 성격을 알지 못하는 한 중간에서 가로막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반대적 입장에서 무조건 유부녀 편집자를 편들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공평하다는 명목하게 이성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그 유부녀 편집자는 정말 억울할 것 같기 때문이다.

유부녀 편집자가 고은 시인의 옆자리에 앉은 것은 과연 본인이 원해서였을까.

아마도 고은 시인의 평소 태도를 알고 있었으므로 일부로 앉은 것은 맞을 것이다. 어차피 고은 시인과 술자리를 해야 한다면 젊고 어린 편집자 아이 대신에 나이 들고 경험 많은 상사였던 유부녀 편집자가 그 자리에 대신 나갔을 수도 있다. 고은 시인이 허벅지를 주무를 때, 속으론 싫어도 어차피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다, 하고 생각하며 적당한 선에서 추행을 눈감아 주었을 수도 있다. 회사를 다녀보면 그 정도의 접대는 여성만 아니라 남성도 흔히 하는 일이다. 물론 남성들이야 성적 대상이 되어 접대 하는 일은 없지만 거래처 사장을 룸사롱으로 모시고 가서 술 마시는 일이 마냥 좋기만 할 리도 없다. 여기서 누가 약자고 누가 강자인지는 명확하지만,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못이 없는지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약자와 강자의 관계가 가학적이고 병리적이지만 이익을 위해 상호 교환된 관계이니 누구 잘못이라 보기도 어렵다.(아마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확장해서 조직적 문제로 풀어보자. 여기에서 가장 나쁜 건 결국 출판사의 업무 방식이다. 당장 이익이 안 되더라도 여직원을 술자리로 가라고 하지 않는다면 유부녀 편집자가 굳이 늙은 문인 옆에서 허벅지를 내주었을까. 정 그렇게 늙고 힘센 문인 접대하고 싶었으면 노동 수당을 받는 술집에 데려가 접대를 직업으로 하는 여성에게 충분히 수당을 지급하고 접대를 받게 하는 것이 옳다. 결국 출판사가 돈 아끼려고 자기 직원에게 술 시중 들게 하는 것밖에 안 된다. 때문에 그 사건에서 유죄는 출판사 사장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확장해서 조직적으로 풀어보면 이게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뜻이다.

어쨌건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말고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많은 상처 받은 여성들에게 도움을 못 줄 망정 그동안 방관자로 살아온 나를 반성하고 또 반성해 본다. 문인들의 술 자리에 불려나가 착취를 당했던 여성 편집자들에게도 위로를 마음을 전한다. 부디 따뜻한 봄이 와서 그녀들이 마음이 치유되기를.

87
댓글
패스워드 패스워드를 입력하세요.
자동등록방지키
 67924311   자동등록방지키를 입력하세요.
Reders 2018-07-20 10:47:46
공감합니다
내무실의 소문 여자의 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