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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내 말 알겠어요?
sin 2018-10-02 06:22:16 조회 : 208


- 내 말 알겠어요? -



*



아내에게 줄 꽃바구니를 샀다. 어제 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이 있었던 터라 역 근처에 다다르니 문득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 주변에 꽃가게라 해봐야 하나뿐이었고 고민은 없었다. 가게 주인은 키가 작은 노파였다. 노파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였는데 곧게 설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추천해주는 데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는 날 보자마자 꽃에 관한 건 모르는 사람이라 짐작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바구니에 꽃을 채우는 내내 꽃말들을 설명했다. 난 그런 것들 보단 바쁘게 움직이는 노파의 손에 관심이 갔다. 주름진 손이 바쁘게 가위질을 했다. 가위를 들지 않은 손은 섬세하게 움직였다. “조금 아까도 당신 나이 또래의 남자가 꽃을 사갔다우. 그 남자는 한 송이 밖에 안 샀지만.” 내가 손놀림에 빠져있던 차에 그녀가 말을 건넸다. “이상한 일도 아니지 이젠, 여기 사는 남자들은 꼭 열차를 타기 전에 이곳에 들린다우. 왜들 그러는 지야 나는 모르지만은 덕분에 여기서 십년 째 장사를 한다니깐.” 노파가 꽃바구니를 내밀었다. 나는 점잖게 웃어보였고 꽃값에 오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더 얹어 주었다. “꼭 얼마씩 더 주기도 하고 말이야.” 노파는 예상했다는 듯, 교활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시계를 한 번 보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채호란 남자를 만난 곳은 의정부로 향하는 열차 안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몰골이었고 눈동자엔 핏대가 서 있었다. 염색하는 것을 잊었는지 흰 뿌리가 자라나있었다. 면도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누구든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는지 불쑥 내게 말을 걸어왔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그의 이야기가 이토록 길어질 줄은 몰랐다. 그는 아버지를 보러 가는 길이라 했다.


“그 고집불통이 드디어 쓰러진 모양입디다. 소식을 들었을 때 난 웃었어요. 진심으로 말이죠. 내가 울산에 처박힌 대에는 그 사람의 덕이 컸으니까요.”


내가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조금 흥분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이마의 주름이 선명해졌는데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울산은 사람 살 곳이 못 되요. 어딜 가든 같은 풍경뿐인데다 공기도 나빠서 숨 쉬기도 힘들죠. 그래서 내가 담배를 끊지 않는 거예요. 피든 안 피든 달라질 것도 없을 테니.” 열차가 출발하며 조금 덜컹거렸다. 나는 바구니가 떨어지지 않을까 몸을 일으켜 짐칸의 가방 뒤쪽으로 바구니를 조금 밀어 넣었다. 채호란 이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도 눈에 들어왔는데, 신문지에 감긴 붉은 꽃 한 송이가 가방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창밖을 보고 있던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열차란 것도 말이에요. 공기를 나쁘게 만드는 주범이죠. 이동하기에 편하기는 하지만은….”


난 가방에 있던 꽃에 더 관심이 갔고 그에게 물었다. “꽃을 사셨던데, 아내 분께 드릴 건가요? 저도 요 앞에서 꽃을 샀거든요. 아내에게 주려고 말입니다.” 그는 다시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아내야 있지만 아내에게 주려고 산 건 아닙니다. 사긴 했지만 누구에게 주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말하자면 아직 정하질 못 한 거죠. 혹시 모르죠, 이상한 바람이 불어서 병상에 누워있는 늙은이에게 줄지도. 내가 꽃을 들이밀면 그 표정이 아마 볼만 할 겁니다.” 그는 큭큭 웃었다.


난 어깨를 으쓱 해보이고 다시 시계를 보았다. 의정부까진 서너 시간이 걸릴 터이니 잠이 오면 눈이라도 붙여야겠다 싶었다. 그를 슬쩍 바라보자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잠자긴 글렀군.’ 나는 더 이야기해보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엔 질문이었다.


“아직도 아내를 사랑하나 보죠?” 그는 자신에게도 질문하기를 원하는 듯 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랑하죠. 아이도 둘이나 있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죠.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보죠?” 내가 물었다. “사랑하지 않죠. 사랑한다고 말하면 거짓일 겁니다. 지금껏 제 아버지 병수발을 드는데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들질 않아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기는 합니다만은,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은 못하겠단 말이죠.”


“아내 분께서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보죠?” 내가 물었다. 채호란 이는 꽤나 옹졸해 보이는 모양새로 입술을 뜯기 시작했다. “아뇨, 잘못은 내가 했지요. 누구에게 물어도 내 잘못일 테고, 무엇보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름 변명을 하자면 그래도 나는 깨끗한 편에 속한다는 겁니다. 주변에 동료라 부를만한 놈들은 죄다…. 뭐랄까, 고향의 가족들은 모르는 사랑 다툼에 골머리를 앓았단 말입니다.”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을 대강 눈치 챘다. 그러나 채호란 이가 처음 본 나에게 그런 일들까지 털어놓는 연유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울산에 온 지 벌써 10년이 지났어요. 외로움이란 게, 사내들끼리의 이야기라 말하지만은 그 욕구라는 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더군요. 기력도 줄었고 머리털도 빠졌지만 이상하리만큼 욕구는 사라지질 않더군요. 그래도 난 10년 동안이나 견뎠어요. 무려 10년 동안! 그런데 어제 사단이 터지고 만 겁니다. 세상에 그것도 한꺼번에!”



*



“하늘은 온통 우중충한 빛깔에 휩싸여있었죠. 원래 울산 공기가 그렇지만은 평소보다 더 어두웠다니까요. 덕분에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진즉에 예감했던 지도 몰라요.” 그는 입술에 맺힌 피를 혀로 핥아대며 말했다. 나는 애써 그것을 보지 않으려 눈을 돌렸다.


“막 회사에서 퇴근한 참이었어요. 하루 종일 용접 기계와 씨름하느라 진이 다 빠져 있었죠. 야마다란 일본 친구랑 함께였는데, 간만에 그놈하고 술 한 잔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망할 전화가 걸려왔죠. 어머니한테 온 전화였는데, 잔뜩 이나 질려버린 목소리였어요.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하더군요. 순간 화가 치밀었죠. 하필 오늘이여야 하나 싶더군요.” 그는 실제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제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것 참 유감입니다.” 내가 말했다. “아니요, 유감이고 할 것도 없어요. 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죽음에 다가서고 있다는 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별 느낌이 없더군요.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니까. 괜찮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정말로요.”


예의상 건넨 말에 오히려 그가 더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습관처럼 시계를 쳐다봤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그제야 내게 물었다. 나는 또 한 번, 점잖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계속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그는 씩 웃어 보이더니 멀쩡한 반대쪽 입술을 뜯기 시작했다. 이마엔 다시 주름이 잡혔다. 나는 주름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심장 수술을 두 번이나 겪고도 술을 끊질 않았어요. 물론 ‘않았다.’ 라는 것은 저의 판단입니다만 분명히 그럴 겁니다. 첫 심장 수술이 끝나고 아버지는 단번에 담배를 끊었어요. 하지만 그놈의 술! 그마저 포기하기엔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자기를 죽이는 줄도 모르고. 그러다 술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질 때면 항상 나를 탓해댔죠. ‘전부 네 탓이다!’ 하고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을 때면 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죠. 실제로 그러기도 했구요. 아버지는 내가 그림을 배운 일이며,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가했다 경찰에 붙잡힌 걸 언급하며 ‘가장 멍청한 짓’ 이라고 말했어요. 난 아버지가 직장에서 해고된 일을 끄집어내면서 ‘한심한 일’ 이라 했고.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주먹이 오가기 시작했죠. 물론 아버지를 때리진 않았어요. 아버지를 증오한들 그 정도 까진 아니었다구요.”


그는 불안해 보이는 사람처럼 자신의 왼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손등에 기다란 흉터를 발견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은, 사실 이념이며 정의 같은 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어요. 전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고, 그게 더 중요하다 생각했죠. 학생운동에 참가한 일은 그것이 그림 그리는 소질을 기르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놈의 저항정신! 이름이 알려진 작가치고 그게 없는 사람이 없더군요. 결국 얻은 것이라곤 아버지와의 싸움뿐이었어요. 예전엔 아버지께 말을 꺼내지도 못했죠. 시위에 참가하고 나서야 그나마 말싸움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지금 이런 말 해봐야 웃기겠지만 어렸을 적 내게는 침묵이라는 습관이 있었어요. 오, 정말이에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내게도 놀라운 일이라구요. 어제 많은 일이 있기도 했고….”


전화가 울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더니 금방 받지 않고 머뭇거렸다. 나는 좁은 공간이나마 자리를 피해주려는 모양새로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멈춰있었고, 동시에 열차를 따라 달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통화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순간 사라졌다가 어느 시점에 다시 들려왔다.


*



울산을 벗어난 열차는 논밭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나는 쭉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찾는다는군요. 내 삶은 아직도 아버지에게 휘둘리고 있어요.” 그의 말에 무언가 대답을 해주긴 했는데, 마땅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표정이 굳어있었고, 다시 입술을 뜯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의 이야기는 분명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 그의 옆자리로 옮겨가 어깨에 팔이라도 얹어주어야 하나 싶었다. 열차가 여전히 달리는 가운데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불편함에 가득 차 들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어요. 특히 교수란 이들은, 내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었죠. 언제나 같은 말 뿐이었어요. 선이나 명암 따위에 대해 떠들면서 기술적으로 부족하다는 소리였죠. 그들은 내 그림 안에 담긴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난 언제나 그림 한복판에 큰 나무를 그렸어요.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되었죠.” 그는 허공에 손을 뻗어 그림 그리는 시늉을 해보였고 나는 그의 손끝을 쫒으며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았다.


“주변에 개구리를 그릴 때도 있었고, 사람들을 그려 넣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 하루는 썩어가는 나무 한 그루를 그렸고 그 아래 조그맣게 자라나는 어린 나무 한 그루를 그렸어요. 어떤 모호한 이유 때문에, 그 때 난 되었다 싶었죠. 그런데 누구도 알아보질 못하더군요. 또 나무를 그린다며 날 어중이떠중이 취급했어요. 아마 그 순간이 내게 남아있던 동심 비슷한 것이 사라진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는 허공에 뻗어두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난 곧바로 학교를 관두고 일거리를 찾다가 벌목소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즈음 아버지는 부끄러운 일로 해고를 당했고 나는 돈을 벌어야 했죠. 그렇게 울산으로 오게 된 겁니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번쩍 일으키더니 짐칸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술 한 병을 찾아내 나에게 흔들어 보이며 씩 웃어보였다.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익숙한 듯 주변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종이컵에 술을 채웠다. 그는 당연하게도 나에게 술을 권했지만 나는 벌써 몇 차례나 그랬듯, 점잖게 거절했다. 단번에 술을 털어 넣은 그는 손을 들어 카트를 끌고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세우고는 땅콩 한 봉지를 구매했다. 그는 다시 종이컵을 채우고 땅콩을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내심 이야기가 끝났기를 바라며 대답했는데 금방 그것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무슨 사단이 터졌다고 하셨어요.” 순식간에 땅콩을 반 봉지나 먹어치운 그는 손을 탁탁 털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얼굴이 조금 붉어진 듯싶었다. “아, 그래요. 사단. 사단이 터졌죠.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러니까 야마다와 만나기로 했을 때 전화를 받았더랬죠.” 술로부터 활기를 얻었는지 그는 조금 유쾌하고 흥겨운 말투로 돌아갔다. “소식을 듣자마자 확 짜증이 나더라니까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 갑자기 흥이 나기도 하더군요. 그건 내게 있어 어떤 해방 같은 것이었어요. 갑자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죠. 오랜 세월,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마음에 담아 둔 생각들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머리를 뒤흔들었어요. 그러다 왠지 모를 외로움이 밀려들었고, 빗방울도 떨어졌고, 나는 여자를 사러 갔어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말이에요. 지난밤 내내 난 그들의 몸에 그림을 그렸죠.”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입술에 다시 손을 가져다댔다. “아침이 밝을 때 까지 말이에요. 바로 몇 시간 전에. 그곳을 나오자 아내와 아들놈 얼굴이 떠올랐고, 오, 그 순간에는 그들을 증오하다시피 했죠. 내 말 알겠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라구요. 당신은 내 또래인데다 울산에 살고 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실은 열차에서 당신을 보자마자 당신은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어려울 것 없다니까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나는 처음으로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고 싶어졌다. “듣기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군요. 나도 이곳에 오래 살았지만 그런 짓은 해본 일이 없어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당신 말은 알아듣겠지만 공감이 가지는 않아요.” 나는 되도록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내기라도 할 기세로.


마침내 내가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 그는 놀란 표정으로, 그리고 반쯤은 조롱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이봐요, 이쯤 합시다. 더는 당신 이야기를 들어줄 수가 없어요. 나를 너무 불편하게 만드는군요. 그만 합시다 이제. 알겠어요?” 난 몸을 일으켰다. 담배 생각에 목이 간질거렸다. 짐칸에서 가방을 뒤져 담배를 찾았다. 옆에 놓인 꽃바구니가 보였다. 그의 말이 내 꽃바구니를 더럽힌 것만 같았다. 나는 화장실로 가 문을 걸어 잠갔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울산이 이토록 사람을 끔찍하게 만드는가. 나는 동의할 수 없었고 나 자신이 그 증인이자 증거였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려는데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너무도 낡아 금방 떨어질 듯한 화재경보기 하나가 창가 쪽 구석에서 붉은 빛을 깜빡거렸다.



*



열차가 의정부에 도착할 때까지 난 쭉 화장실에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도 무시해 버렸다. 한 손에는 라이터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난 거울을 보고 있었는데 이마엔 주름이 진하게 잡혀있었고 흰 머리가 금세 자라나있었다. 채호란 이와 퍽 닮아있는 모습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곧 의정부에 도착할 터였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조금 얌전해진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그럴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어디든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어요. 그뿐입니다.” 나는 잠깐의 틈을 두고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열차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창밖을 보았다. 징검다리가 드문드문 놓여있는 하천이 보였다. 어젯밤 내린 비 탓에 물이 잔뜩 불어나 있었다. 물은 빠르게 흘렀고 진한 흙색이었다. 휩쓸린 나뭇가지며 쓰레기들이 물살을 타고 떠올랐다.


나는 일찌감치 일어나 꽃바구니와 짐을 챙겨 입구에 섰다. 그는 나를 의식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느긋하게 짐을 챙겼다. 꽃 한 송이도 잊지 않았다. 그는 내 뒤로 와 서더니 방금까지 내가 앉아있던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나는 의정부의 공기를 한껏 받아들였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다. 마침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도착했는지를 물었는데 여전히 전날 밤의 다툼으로 기분이 상해 있었다. 무엇 때문에 다투었는지는 역시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꽃바구니를 선물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아내는 전화를 끊기 전 외롭다고 말했다. 난 어떤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막 역을 나서려는데 요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채호란 이가 경비들에게 붙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짐이며 소중히 싸두었던 꽃 한 송이는 짓밟혀 엉망이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자하니 그가 화장실에 있던 낡은 경보기를 부수려 했던 모양이다.


그의 사정을 아는 이는 나뿐이었고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가 정리되질 않았다. 나는 무턱대고 경비들에게 소리 질렀다. “이봐요! 너무 거칠게 대하지 마세요! 그 사람 아픈 사람이란 말입니다! 내말 알겠어요? 아픈 사람이라구요!” 그들은 나를 힐끗 보았을 뿐 멈추지 않았다. 나 또한 더 다가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역을 나섰고 택시를 잡아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내와 화해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에게 채호의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를 변호하며 털어놓는 내 속내는 분명 아내의 화를 돋우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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