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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큐티클 1
임동욱 2019-04-10 14:24:25 조회 : 528
1

지수는 상가 건물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봄날. 꽃샘추위같은 거 다 사라진 줄 알았더니 비바람에 떠밀려 들어와 오소소 한기가 돋는 날이었다. 교복 소매 끄트머리로 투명인간이 내뱉은 숨에 지수는 벌벌 떨었다. 2층 문은 아침부터 진작 환히 열려있었다. 지수는 슬쩍 2층을 올려다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빗물 머금은 운동화로 보도블럭을 두어 번 차다가 다시 기둥에 몸을 기대곤 했다. 휴대폰을 열어도 친구들은 조용했다. 별 일 없으면 꼭 보자던 수아도 바쁜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물 고이지 않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친구들 SNS를 열어보았다.

오늘이 생일이라는 우재. 친구들은 모두 거기 가있었나보다. 코인노래방에서 찍은 영상들이 우수수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서 멀지도 않았다. 불과 한 두어 블럭 쯤. 지수는 노래방이 있는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수아는 다른 친구들이랑 미팅 자리에 나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같이 속해있던 학교 친구들 단톡방에서 수아가 한 마디를 남겼다. 아 이 자리 엄청 재미없음. ㅋㅋㅋㅋ 나도 마찬가지. 지수는 짧게 답하고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가 건물 2층 유리문에는 하얀 시트지 배경으로 호흡체조 하림선원 이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군데군데 장기매매 대출상담 스티커들이 붙었다가 지저분하게 떨어진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아빠 솜씨였다. 스테인리스 손잡이를 어정쩡하게 잡고 문을 여니 우레탄 매트가 넓게 깔려있는 홀이 지수 눈에 보였다. 하얗게 도배된 벽에는 군데군데 호흡체조의 좋은 점을 적어놓은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다. 뇌의 흐름을 맑게 하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혼란스러운 마음을 바로잡고 세상을 이롭게 한다. 라는 글귀가 벽 위에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저것도 아빠 솜씨였다. 직접 페인트붓으로 칠한 그 글귀 아래에서 아빠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아빠는 갈색 개량한복을 입고 길게 기른 머리를 꽁지머리처럼 묶었다. 염색을 한지 오래 되어 머리 이곳저곳이 희끗희끗했다. 총재님인가 누군가가 직접 하사했다는 징표를 끈에 묶어서 목에 걸었는데, 학교에서 만들어도 그 징표보다 훨씬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지수는 생각하곤 했다. 높다란 창문이 열려있었는지 빗물이 밀려들어왔다. 지수는 홀 한 켠에 세워져 있던 밀대를 들고는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아빠를 지나쳐 걸어갔다. 지수 키보다 한참 높은 창문샷시에 밀대를 대고 쿡쿡 찔러댔다. 창문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닫혔다. 슬쩍 아빠 쪽을 돌아봤지만 아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는 당신이라니. 밀대를 찌르는 소리가 더 커졌다. 삐걱삐걱 끼이이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닫혔다.

하림선원 자리는 원래 태권도 도장이었다. 이 동네가 생길 때부터 있던 도장이라고 했으니 족히 사십 년은 넘었을 것이다. 이 곳을 고르고 나서 호흡체조 도구들을 나르면서, 지수는 이 홀 안에 들어차 있던 땀냄새를 수도 없이 맡아야 했다. 홀에 깔려있던 우레탄 매트 역시 도장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태권도 꿈나무들의 흔적이 매트 곳곳에 남아 패이고 더럽혀져 있었다. 도저히 안되겠는 부분은 아빠가 새로 구해다 붙였고, 쓸만한 부분은 아빠와 지수 둘이서 물걸레로 연신 닦아내 썼다. 들숨으로 들어오는 짭짤함이 느껴질 때마다 지수는 진저리를 쳤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1층에 있던 구멍가게로 내려가 급한대로 마스크를 사서 썼다. 구멍가게 주인할머니는 거스름돈을 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동네 뭣하러 왔어.

홀 구석에는 플라스틱 재질 블라인드가 붙어있었다. 부엌과 간이침대가 그 안에 있었다. 미동도 없는 아빠를 지나쳐 블라인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빗물에 젖어 옷들이 구겨져 있었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비닐봉투에 교복과 참고서 몇 권을 아무렇게나 담았다. 세탁소는 조금 걸어 동네를 나오면 대로변에 크게 하나 있었다. 유명아이돌을 모델로 하는 코인 세탁소였다. 블라인드를 나오니 아빠가 참선을 끝내고 합장을 하고 있었다. 다시금 아빠를 가로질러 입구로 향했다. 아빠의 묵직한 목소리가 지수를 멈춰 세웠다.

"어디 가니?"
"보면 몰라요. 옷 맡기고 독서실 가지."
"빨리 와라. 오늘은 합동참선 하는 날인 거 알지?"

지수는 답 없이 문을 나섰다.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대로변으로 걷는 동안 지수는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비 그쳐 눅눅해진 하늘은 언제든 다시 비를 뿌릴 것처럼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대로변까지 곧장 나와 보이는 세탁소에 들어가 교복과 묵은 속옷 양말 따위를 붙박이형 세탁기에 넣었다. 이미 누군가가 돌려놓은 세탁기 안에서 주인 모를 빨래들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 좀 살려달라고. 빨래들이 외치는 것만 같았다. 지수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세탁소를 나섰다. 세탁소를 나선 그녀가 도착한 곳은 대로변 지하철역 앞에 있던 헤어샵이었다. 가게로 들어가니 친한 가게언니들이 지수를 반겼다.

"어서 와. 오늘은 좀 늦었네?"
"네. 비가 와서..."
"그랬구나. 이따가 7시부터 예약손님 온다고 했거든. 너한테 받고 싶다고 늦게 온댔어."
"에이. 제가 그 분들 봐드릴 실력이라도 되나요. 나영 언니도 계신데."
"얘는. 요즘 여기서 이지수 쌤 솜씨 모르는 사람도 있니?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랬어."

옅게 웃은 지수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참고서가 들어있던 비닐봉투는 트레이닝복 사이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가게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H라인 스커트로 마무리된 옷이었다. 가게는 헤어와 네일아트를 같이 하는 곳이었다. 제법 입소문을 타서 이 근방 손님들을 많이 끌어모았고 비오는 초저녁에도 예약하고 온 손님들로 대기실이 북적거렸다.

"지수 쌤, 우리 왔어."

근처 고급 아파트단지에 사는 미소 언니가 가게로 들어왔다.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 손님도 함께 있었다. 지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미소 언니. 비 오는데 오시기 힘드셨죠?"
"에이 힘들기는. 지수 솜씨 받고 가면 이런거 하나도 안 힘들어."
"감사합니다. 같이 오신 분은 친구분이신가요?""
"응, 저기 강 건너 골드캐슬 알지? 거기 사는 친구인데 내가 지수 자랑을 좀 했거든. 한번 받아보자고 내가 꼬셔서 데리고 온 거야."
"그러셨구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지수는 자신의 자리였던 문 바로 옆 테이블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테이블 위로는 각양각색의 네일 모형과 손톱 칠하기에 쓰이는 얇은 붓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수는 두 사람을 앉히고 손등을 보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미소 언니는 지수가 오랫동안 손톱 관리를 해준 고객이었다. 얇고 긴 손톱이 매끈하게 코팅되어 있었는데, 손톱마다 과하지 않게 포인트성 장식을 넣은 것이 특징이었다.

"미소 언니 먼저 봐드릴까요?"
"아니. 오늘은 이 친구 먼저 봐줘. 원래 다니던 네일샵 직원이 바뀌면서 손톱이 좀 상했다고 하더라고."
"그러셨구나. 언니 먼저 봐드릴게요. 실례지만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아, 혜주예요. 최혜주."
"네, 혜주 언니. 잠시만 실례할게요."

지수가 혜주의 손톱을 살포시 매만져보았다. 확실히 손톱 이곳저곳이 균일하지 못하고 벗겨져 있었다. 코팅이 벗겨진 상태에서 제대로 메이크업하지 않고 막 덧칠한 듯 했다. 약품을 잘못 쓴 걸까. 아니면 그 직원 솜씨가 부족했던 걸까. 지수는 혜주에게 조심스럽게 상태를 설명했다.

"언니, 지금 이 상태에서 계속 매니큐어 덧바르시면 제대로 덮이지도 않고 점점 더 상하기만 할 거예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다 깎아내고 처음부터 다시 해드리는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괜찮아요.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혜주 언니."
"지수야, 우리 혜주 좀 잘 부탁해. 언니는 오늘 네일 말고 머리 하러 와서. 나 옆으로 가 있을게."
"네, 미소 언니."

지수는 아세톤이 담긴 고무병을 집어들었다. 손톱 가득 덕지덕지 발린 매니큐어를 전부 다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아세톤을 적절히 써서 손톱을 씻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과하게 쓰면 손이 상할 수 있고 적게 쓰면 매니큐어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지수는 면봉에 아세톤을 적당히 묻혀 세심하게 매니큐어를 지워나갔다. 열 손가락 매니큐어를 전부 지운 지수는 따뜻하게 덥혀놓은 수건으로 혜주의 손을 닦아냈다. 혹 남아있는 아세톤을 전부 닦아내기 위함이었다. 새롭게 칠하기 앞서 손톱에 영양크림을 먼저 발랐다. 상해버린 손톱을 메꿔주는 밑작업이었다. 그리고 손톱에 기본 베이스가 되는 연한 매니큐어를 발라나가기 시작했다. 매니큐어를 바르길 삼십 분 여, 혜주의 열 손가락이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수는 제법 손재주가 좋았다. 학교 가정시간이면 지수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뜨개질, 바느질, 목공 등등.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하는 일에 그녀는 능했다. 특히 아주 작은 물건들을 다루는데 익숙했다.
한참을 말 없이 바라보던 혜주가 열중하고 있던 지수에게 물었다.

"제법 잘 하네요. 이 일 한지 오래 됐어요?"
"아, 아니예요 언니. 여기 이사와서 아르바이트 식으로 한 반 년 정도 됐어요."
"반 년 밖에 안됐는데 이만큼 재주가 좋단 말예요? 대단하네요."
"대단하긴요. 여기 계시는 직원 언니들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예요."
"그런가요. 지수 씨는 요즘 아이들 답지 않게 굉장히 인성이 좋아보이네요. 싹싹하기도 하고. 우리 딸도 지수 씨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아직 부족한걸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언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혜주 손톱이 전부 끝났다. 잔뜩 거칠어져있던 손톱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한껏 멋들어지게 변했다. 큐티클을 과하지 않게 써서 포인트를 살리는 지수 솜씨가, 혜주는 퍽 마음에 든 눈치였다. 머리를 마치고 돌아온 미소도 혜주를 보며 반색했다.

"어머, 얘 너 네일 엄청 잘 됐다 야. 여기까지 온 보람 있지?"
"그러게. 너 덕분이네."
"저도 재미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언니."
"지수야. 이 친구 웬만하면 이런 반응 안 보이는데 네 솜씨가 정말 마음에 들었나봐. 너 봉잡은거야. 이 친구가 얼마나 돈이 많은ㄷ... 윽!"
"별 소리를 다 한다 너는. 지수 씨, 못 들은 척 해줘요 미안해요."
"아, 아녜요 언니. 마음에 들어해주셔서 저는 감사하기만 한 걸요."

혜주는 지수에게 원래 가격보다 더욱 많은 돈을 주었다. 팁 명목으로. 지수는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사양하다가 끝끝내 받으라는 혜주의 강권에 못 이기는 척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언니, 다음 번에도 꼭 들러주세요."
"그래요. 아, 혹시 개인 출장같은 것도 오나요?"
"아, 네. 특별히 부르시면 그렇게 가기도 해요."
"잘 됐네요. 번호 좀 알려줄래요?"

지수는 혜주의 휴대폰을 건네받아 키패드에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혜주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수 스커트주머니 안에서 낡은 휴대폰이 길게 울었다.

"그럼 다음 번에 또 봐요 지수 씨."
"네, 다음에는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혜주 언니."
"그래요. 노력해볼게요."

두 사람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여덟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가게 안에서는 항상 밝은 표정이던 지수 낯빛이 시나브로 어두워졌다. 정해진 알바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 지수는 못내 아쉬웠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세탁소에 들러 빨래 돌린 옷가지를 찾은 지수의 발걸음이 더뎠다.

하림선원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합동참선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열댓명이 지수를 반겼다. 아까까지 활기가 넘쳐보이던 지수는 굳은 표정으로 작게 묵례를 했다. 홀 안쪽 블라인드로 향하던 지수의 팔목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아빠였다.

"늦었구나."
"공부가 좀 길어져서. 빨래도."
"내가 합동참선 있는 날은 적어도 10분 일찍 오라고 하지 않았니?"
"최대한 빨리 온거야."
"아빠한테 말대답 하는거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빠와 지수의 눈이 마주쳤다. 더 길게 보기 힘들었는지 지수가 시선을 약간 내리깔았다. 누군가가 두 사람 사이로 다가와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학순 아저씨였다.

"허허, 이 선생도 지수도 그쯤 하시지요. 회원님들이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학순 아저씨의 사람 좋은 미소에 아빠도 더는 지수를 닦달하지 못했는지 팔목을 풀었다. 지수는 팔목을 부여잡고 블라인드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비닐봉투를 구석에 내동댕이 친 지수는 간이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 만났던 혜주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 오늘 감사했어요. 또 봐요 지수 양.


2

지수는 마스크를 눈만 보이게끔 바짝 올려서 썼다. 까만 캡모자, 까만 트레이닝복으로 온 몸을 보호색처럼 감춘 그녀는 블라인드를 나왔다. 합동참선을 마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오늘의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오늘은 번화가 쪽으로 가시죠. 그쪽이 홍보하기 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워낙 많은데... 우리 인원 가지고 충분하겠습니까?"
"뭐가 걱정입니까. 우리에게는 총재님이 하사하신 물건이 있는데요. 그렇죠?"

그들이 나누는 대책은 사실 뭐 특별할 게 없었다. 별 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꼴이 우스워 보였다. 허나 넋놓고 웃을 수 없는 탓은 지수 역시 그들 사이에서 함께 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지수도 얼른 이리 와서 이것 좀 먹고 하렴."

학순 아재가 손짓하며 지수를 불렀다. 그의 인자한 미소를 지수는 애써 외면하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배 안고파요."
"어허, 어른이 권유하면 잠자코 와서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야지."
"배 안고프다고."

지수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문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저저, 저런 싸가지 없는...! 격분한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아빠였고, 그를 말리는 건 학순 아재였다. 지수는 계단을 한 층 올라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너저분한 잡동사니들이 옥상 출입문을 가득 메웠다. 전깃줄을 잘라서 만든 빨랫줄, 잡초인지 작물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화단, 녹이 탱탱 슬어 버려진 덤벨 몇 개가 보였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 건물보다 더 높은 원룸상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옥상에서도 동네를 훤히 보기는 어려운 2층짜리 건물이었다.

지수는 주머니에 감춰둔 담배 한 개피를 꺼내물었다. 비구름이 향하는 곳으로 지수의 구름도 함께 흘러갔다. 바람이 아직 차가운 초봄이었다. 인적이 드문해진 골목에는 그 흔한 취객도 하나 없었다. 차라리 그런 취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지수는 생각했다. 아랫층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취객 역시 소중한 그들의 '형제들'로 생각할 테니까. 인파가 많은 곳까지 갈 필요가 없을테니까.

건물 아래로 15인승 미니버스가 한 대 도착했다. 일행들 중 유일하게 1종 대형 면허가 있던 재영 아저씨가 몰고 온 차였다. 나이로 치면 사실 지수와 일곱 살 정도 차이났지만, 지수는 재영 아저씨를 오빠라고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2층에 있던 사람들이 줄지어 버스 앞으로 모여들었다. 내려가기 싫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전화기에서 진동이 느껴졌지만 꺼내보지 않았다. 이윽고 저 아래에서 낯익은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지수! 버르장머리없게 무슨 짓이야? 당장 내려오지 못해?"

지수는 최대한 빨리 담배를 몰아 피우고 바닥에 비벼 껐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며 곧 내려가겠노라 말했다. 담배냄새를 지우는 미스트를 온 몸 구석구석 뿌리고 은단껌도 하나 꺼내 씹었다. 은단껌이라니. 열여덟 나이에 은단껌이라니. 스스로를 자책하며 지수는 계단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도 사람들은 연신 오늘의 작전을 논의했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총재님의 말씀으로 무지몽매한 자들을 더욱 빨리 일깨울 수 있을 것인가. 버스 출입문가에 앉아있던 지수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꽂다가 아빠 손에 빼앗겨버렸다. 싸늘한 아빠 시선을 앙다물며 외면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때우기였다. 비정상인 사람들만 모인 버스 안이었다. 마치 모두가 술에 취했는데 혼자만 말짱히 깨있는 기분. 지수는 더더욱 질끈 눈을 감았다. 버스는 이리 휘청 저리 휘청 거리다 몇 번이고 터덕거렸고, 쉽사리 그 목적지까지 가지 못했다.

이십 분 여를 달려 도착한 번화가 뒷골목. 대형버스를 세워놓을 장소를 찾다 겨우 발견한 공터 앞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마지막으로 지수가 내렸다. 아빠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먼저 앞장섰고 먼저 나섰으며, 먼저 뭇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자리였다. 번화가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지수는 그들과 일행이 아닌 척 떨어져 걸었다. 금요일 밤 11시, 비오는 날이었지만 불금을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거렸다. 행인들이 모였다가 사라지는 광장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멈춰섰다. 그들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하나둘 내려 안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플래카드와 전단지, 확성기와 마이크. 하나같이 누군가에게 어필하기 위한 도구들이었다. 학순 아재가 아빠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아빠는 광장 한가운데 올라설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방팔방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사람들을 향해 아빠가 말을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는 하림선원에서 나온 이필성이라는 사람올시다."

유난히 큰 마이크 볼륨 탓에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아빠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그런 아빠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바람을 잡았다. 끄트머리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들고 온 전단지를 사람들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호흡체조 전문 하림선원. 당신의 뇌를 자유롭게 해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저라는 사람. 대단히 멀쩡해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왜 이런 자리에 서서 민망함을 감수하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궁금하시죠? 네, 궁금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굉장히 떨리고 부끄럽지마는, 여러분께 꼭 드리고픈 좋은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학순 아재가 다가와 지수를 아빠 곁으로 등떠밀었다. 그의 축축한 손이 지수 팔에 닿았던 순간, 지수는 생각했다. 이런 사소한 이유로도 살인을 할 수 있는 걸까 하고. 아빠는 곁으로 엉거주춤 다가온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보이는 이 여자애. 다름아닌 제 둘도 없는 딸자식올시다. 리먼브라더스 그 때! 집 잃고 직장 잃고 길거리로 나앉을 때 여기 이 딸자식 겨우 일곱 살 밖에 안 됐습니다. 이 하나 밖에 없는 아이랑 험한 세상 살아 나갈 생각하니 얼마나 막막했는지 뭡니까. 그런데 말이오. 사람이 그래도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마침맞게 바로 그 분을 만나게 되었지 뭐요."

일행 두 명이 갖고 온 플래카드를 지수 앞으로 갖고 와 양 옆으로 펼쳤다. 제천대제 강림하사 혼돈지옥 정화하리. 하림선원 서울 지부.

"제천대제! 그 분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두루두루 살피고 계신다오. 지금 코웃음치면서 지나가는 자네들! 지금 그 오만한 태도는 필시 큰 화를 치를만 하지만, 대제님께서는 결단코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오. 명심하시오. 제천대제 그 분의 존함을. 그 분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끝장낼 것임을!"

일갈하는 아빠 옆으로 일행들이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몇몇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하늘을 향해 싹싹 빌며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 비슷한 것을 내지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 몇몇이 발길을 멈추고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빠의 절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기 보다 사진을 찍고 서로 킬킬거리려는 것 뿐이었다.

플래카드 뒤로 뒤집어진 글씨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지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두 귀와 볼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지수는 받았다. 숲에서 야만인들이 쳐들어와 마을 사람 누군가가 포위당했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 사람은 아마 두려움보다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순간, 지수는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 중 낯익은 얼굴을 목격했다. 미팅이 있다며 연락이 뜸했던 수아와 그런 수아 손을 잡고 걷는 한 엄마. 그 엄마 손톱에는 낯익은 큐티클이 박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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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소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