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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미르
정은진 2019-12-06 12:39:56 조회 : 712
온 마음으로 너를 사랑했어.

오랜만에 편지지를 꺼냈다. 언제 깎은 지 기억나지 않는 연필을 칼로 열심히 조각했다. 거뭇거뭇한 것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나무껍질이 종이 위로 쌓일 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너에게 전하는 편지까지 더러워지면 어쩌나,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너에게 주는 편지는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어. 오탈자도 내면 안 돼. 이미 엎질러진 철자를 하얀 것으로 뒤덮는 건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연필을 꺼내든 거였다. 너에게 전해주는 모든 것은 완벽했으면, 하는 강박이 내 머릿속에서 두드러기처럼 돋아올랐다.

지금의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런 말들만 맴돌았다. 그러니깐, 진실로 너의 상태를 묻는 것보다 네가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답답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그런 말들. 내 앞에 나타나줬으면, 그리하여 내가 너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색깔들을 보여주고 보드라운 것들을 쓰다듬을 수 있게 해주었으면. 네가 행복해하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었으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니깐, 제발 나타나줘. 미르야. 네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

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달래며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얇은 직사각형이 된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밋밋한 보랏빛을 띤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미르에게, J가. 경주의 햇빛이 생각났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따스하게 차오르던 그것. 나를 자꾸만 눈부시게 하여 자꾸만 눈을 깜박거렸던 기억. 밀어내는 숨결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오늘 날씨가 춥다고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주변에는 온통 능이었다. 불쑥 솟아오른 그것들을 보며 나도 어딘가에 파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분명 경주에 간 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인데,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보다도 더 깊게 내 안에서 번졌다. 눈을 깜박거려도 자꾸만 헷갈렸다. 이곳에는 너도 경주도 없는데 너와 경주가 자꾸만 번갈아 나타났다. 이윽고 나는 경주에 너와 있게 되었다. 너는 그곳에서 능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푸릇푸릇하게 돋은 잔디들 혹은 매끄럽게 굽어 있는 모양 혹은 그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젊은 연인들 혹은 그것이 품어온 셀 수 없는 시간 혹은 기억 혹은 그것이 머금었던 모든 날씨 혹은..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너만이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봤을까 너무너무 궁금했다. 비니를 쓰고 있어 아이처럼 보이는 너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너는 무엇을 보았니 능의 무엇이 좋았니, 아님 하나도 좋지 않았던 거니 저것이 너를 슬프게 만들었니 화가 나게 만들었니 아니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는 나에게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너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네가 작게 숨쉴 때마다 네 입 주변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거야 정말 혹시나. 네가 내쉬었던 숨을 나도 내쉴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도 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너를 조금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서 그랬던 거야. 너는 듣지 않았지만 나는 열심히 너에게 설명했다. 바깥은 많이 추웠다. 양쪽 볼이 얼얼해졌다. 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것을 애써 눈 밖으로 흘려내진 않았다 시야가 흐려지지 않게 열심히 눈을 깜박였을 뿐이다. 햇빛이 반짝였다. 작고 여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태양을 열심히 응시하다 너를 보았다. 그곳엔 네가 아닌 하얀 섬광만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너를 불렀다. 미르야, 미르야, 미르야. 사랑하는 미르야. 이번에는 눈물이 들어가지 않고 있는대로 흘렀다. 볼이 축축했다. 곧 발도 축축해졌다. 찰랑찰랑, 조금씩 작은 시냇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내 발을 있는대로 까딱거렸다. 첨벙거리는 소리에 더 열심히 까딱거렸다. 시냇물이 강이 되기 시작했을 때쯤 너가 다시 보였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소리내서 너를 불렀다. 미르야, 미르야, 미르야, 미르야, 뭐해, 미르야, 넌 정말 무엇을 보고 있는 거야, 미르야, 미르야, 나를 한 번만 돌아봐주면 안되겠니, 미르야. 여전히 너는 답이 없었다. 너에게는 나로부터 촉발된 어떠한 감각도 가닿지 않는 듯 했다. 너는 핸드폰을 꺼내 노래를 들었다. 무슨 노래를 듣고 있는지 핸드폰 화면을 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까만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안에 내가 비춰 보였다. 퉁퉁 불어버린 눈으로 너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강물이 내 턱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수면 위에 있었다. 땅 위에서 노래를 들으며 능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의 표정이 어떤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너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너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짭짤한 물이 내 입 가득 들어왔다. 너무 짜서 나는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점점 잠겼기에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미르야, 미르야, 미르야, 미르야, 미르야, 사랑해, 미르야. 물 안에서 작은 거품들만 피어났다 터졌다. 아무 소리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 젖은 편지지를 나는 질겅질겅 씹었다. 미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물이 꼬르륵거렸다. 점점 숨이 막혔다. 햇빛도 더 이상 닿지 않았다. 코로부터 비릿한 느낌이 시작되어 내 온 몸을 막았다. 내 온 몸 안에 가득 차올랐다. 그 후로는 기억할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기억할 것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후로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J는 숨을 거치게 내쉬었다. 다 꿈이었다. 모두. 전부. 다행이란 생각보다 나와 미르가 경주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슬프게 다가왔다. 꿈에서 내가 보았던 그것은 뭐지, 그것은 지금 내가 느끼는 무엇보다도 더 선명했는데. 미르는 나에게 무엇을 전하지도 받지도 않았지만 내 앞에 있었는데. 내 앞에서 열심히 능을 보고 있었는데. 미르가 그곳에 있지 않았다면 어디에 있었던 걸까. 어디에 있었다가 어디로 간 걸까.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지만 편지지에 미르의 주소를 적어넣었다. 미르가 있어야 할 곳이지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미르가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미르가 나를 쳐다보던 순간을 기억한다. 미르의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내가 말할 때 미르는 모든 단어 모든 숨결을 조용히 지켜봤다. 오직 눈동자로만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에게 위로를 하고 나에게 알겠다고 했다. 좋다고 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미르의 조용한 눈동자로 나에게 말해줬다. 나는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미르가 쓰는 언어가 궁금했으므로 열심히 해석하고 배웠다. 미르는 모든 것을 이용할 줄 아는 아이였다. 미르는 자기 옆으로 흐르는 공기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작은 사과 조각도 자기가 마시는 물도 자기에게 나는 향기도 다 이용할 줄 알았다. 그것들을 이용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세상의 어떤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오직 우리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때 미르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절대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을 잊는 것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끝없이 상영되는 스크린 위에 천막을 덮어놓아도 영화가 끊기는 것은 아니니깐. 누군가가 정지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영화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보는 것을 멈출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것에 대해 그만 궁금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간이란 얄궂은 것이었다. 그것은 뚝 반으로 나누어져 미르가 나와 함께 영화를 보던 시간과 미르가 나에게 영화를 그만 꺼달라는 시간으로 갈라졌다. 미르는 그만 정지 버튼을 누를 수는 없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는 그냥 상영관을 나섰다. 곧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를 그만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네 집 주소를 아는데, 너에게 할 말이 아직도 우주에 떠다니는 행성만큼 많은데 어떻게 그만 편지를 보내라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매일 편지를 썼다. 미르의 말대로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종이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체국 차에 탈 수 없는 운명이었다. 부쳐지기 위해 나무에서 얇은 종이로 가공된 것들이 나를 만나 돌연변이가 되었다. 운명을 거역하는 호로자식들이 되었다. 어쩔 수 없어 얘들아, 미르는 너네를 원치 않아. 나는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계속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미르가 보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오탈자가 나면 안되니깐 나는 항상 지우개를 옆에 갖다놓았다. 지우고 또 지웠다. 자국이 나서도 안되니깐 연필을 조심조심 놀렸다. 흑연이 종이에 닿는 듯 마는 듯 했다. 그럼에도 어떤 말들을 너무 많이 썼다 지워서 종이에 구멍이 났다. 그런 말들은 항상 미르야로 시작하곤 했다. 동사는 사랑해 보고 싶어 그리워 용서해줘 돌아와줘.

종이는 이제 책장만큼 높이 쌓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많이 변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편지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턴 음들을 흥얼거렸다. 옆에 있는 책과 물병을 두들겼고 먼지 쌓인 피아노 건반을 다시 건드려보기도 했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부턴 눈을 뜨고 있을 때면 미르를 생각하며 온갖 음들을 직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것으론 부족하다 싶어서 기타와 드럼 우쿠렐레 플루트 바이올린 하프 탬버린 등을 사들였다. 모든 음과 모든 박자로 연주했지만 부족했다. 어떤 음도 박자도 미르를 완벽히 표현하지 못했다.

그때부턴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색깔들로 어떤 모양들을 만들고 지우고 번지게 했다. 온갖 색깔을 뒤섞고 붓칠했다. 문구점에서 파는 물감이나 크레용으로는 부족했다. 편지지를 아주 얇게 조각낸 뒤 그것들을 뒤섞어 잘게 빻았다. 흑연과 종이의 더러운 색깔만 남았다. 녹슨 냄비의 녹을 핥은 침을 뱉어냈다. 구석구석에 슬어있는 곰팡이들을 비벼서 하나의 색깔로 만들었다. 여전히 부족했다. 나는 미르를 향한 내 마음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나는 미르를 그리고 싶었다.

어떤 것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비로소 나는 내 몸의 가죽을 벗겨내어 큰 북을 만들었다. 피가 쏟아졌다. 흐르는 피를 받아 가죽 위를 잔뜩 색칠했다. 온몸의 근육과 내장, 뼈 같은 것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차곡차곡 주워 어떤 것들은 비틀어 색깔을 빼냈고 어떤 것들은 곱게 빻아 북 위로 흩뿌리기도 했다. 사람의 뼈 중 제일 크다는 대퇴골을 집어 북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해괴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것은 전혀 미르가 아니었다. 실패했다는 생각을 했을 때엔 이미 모든 게 늦어있었다. 북이 울리고 난 후의 진동만이 작은 소리로 수렴하고 있었다. 그것은 여전히 아직도 침묵을 향해 수렴하고 있다. 무한을 향해, 영원한 무(無)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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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방황하는 두번째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