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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프로포즈 8주년
리세.첸 2020-01-14 10:34:52 조회 : 73
애인과 호텔방에 와있다.


커튼 사이로 내다본 한낮의 도시가 부스럼 같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촬영이 생기는 바람에 한 동안 만나지 못했었다. 사실 정아에게는 이제 필사적으로 일을 안 하면 안 되는 이유도 없고, 그나마 있던 억지도 사라져, 될 대로 되라지. 방관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꼬박 한 달 간 흩어져 있어야 할 뻔했다. 애인이 다시 채워준 잔을 들고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정아는 든든한 팔의 지지를 받아 창틀에 걸터앉아 있다. 투명한 빛의 감촉에 여리여리한 금빛 물이 나지막하게 찰랑인다. 한 모금 마신다. 향기로운 과일이 한 번에 훅 올라와 감각이 아득해진다. 그 기운이 가시자 틀림없이 굉장히 좋은 와인 일거라 생각한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수하는 애인의 와인에는 실패가 없다.

단단한 팔의 촉감을 감상하며 올려다본다. 애인은 허공에 뜬 어떤 시점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다가 문득 정아의 눈길을 느꼈는지 내려다보며 웃는다. 애인의 발 아래 있는 구름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애인의 몸 구석구석이 각자 대양 위 다른 대륙에 흩어져있다. 정아가 알고 있는 홍콩은 보통 애인의 뒷덜미에 자리잡고 있다. 손을 뻗어 애인의 목 뒤를 쓸어내린다. 애인의 입모양을 보니 입 안에선 혀가 여유롭게 와인의 향을 피워내고 있을 것이다. 그 많은 과일 향이 신경에 흩뿌려지는 걸 즐길 수 있게. 부드럽게 목젖이 올라갔다 내려가, 와인이 목적지로 떠났다는 걸 알렸다. 그에, 정아는 애인의 강한 턱으로 손을 가져와 그를 감싼 근육을 쓰다듬는다.


정아를 바라보는 애인의 눈에 한가득 빛이 났다.


“얼마 전에 ‘안경잽이’를 찾았어.” 쾌거를 이룬 반응이었다.


“어떻게?”


“소셜에 있더라고. 걔가 있을 줄이야.”


장난스러운 애인의 양복 자켓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들렸다. ‘아차’라는 단어가 애인의 얼굴에 떠오르고, 정아와 눈을 마주쳤다. 정아의 동의를 확인하고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애인의 얼굴은 ‘이런’이란 단어로 바뀌었다.


금융계통의 일이라 그런지, 웬만한 일이 아니고야 휴대전화를 꺼놓는 것은 애인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정아는 그걸 잘 알고 있고,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둘만의 시간에 전화가 울려버리면, 애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미안해한다. 이런 그의 태도에 정아는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애인이 마음 놓고 통화를 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웃어 보인다. 그리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다 마지못해 통화를 하는 애인의 목소리를 음미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변하는 목소리와 말투를 맛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Hello?” 로 시작한 오늘의 전화. 상대방은 외국인이었다.


침착하게 상황 설명을 하는 느낌. 애인의 몸에서 평소보다 깊은 목소리가 난다.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통화다. 정아는 애인의 허리춤에 팔을 두르고 듣는다. 가볍게 진동하는 몸에 귀를 대고.


유능한 남자의 목소리는 섹시하다. 그래서 정아는 클라이언트들과의 통화를 엿듣는 것을 즐긴다. 남자의 일 얘기를 싫어하는 여자들은 무심한 존재들이라 생각한다. 일 얘기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매력을 흠뻑 발산한다. 원시시대 때부터 남성의 유능함은 생존과 결합된 그들만의 페르몬이었으니까.

통화를 끝낸 애인에게 말한다.

“당신 섹시해” 진심을 담아 그를 바라본다.


애인은 영문도 모른 채 당한 칭찬에 기분이 좋다. 당연하단 감도 없지 않아,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오만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남자다. 애인이 이마에 입을 맞첬다. 그러니, 그의 자신감과 능력을 양껏 발휘해서, 이번 일을 멋지게 해내길 바란다. 그렇게만 하면 휴가가 주어질 테니까.


원시시대에 남성의 유능함은 생존과 결합되어 매력적이었겠지만, 애인의 경우에는 ‘휴가’와 직결되기 때문에, 그의 유능함은 정아에게 아주 매력적이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애인이 속삭인다.


방긋 웃는다.


“그럼”

크리스마스도 의미 없는 정아의 유일한 기념일을 잊을 리 없다.


프로포즈 8주년.

애인이 정아에게 처참히 거절당한 달콤한 날.

훌륭한 기념일이 되어 매해 축배를 든다.

#오후햇살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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