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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홍콩의 태양은 반숙 계란 두 알
리세.첸 2020-02-08 14:34:09 조회 : 144
짐을 쌌다. 현관 앞에 놓아둔 코끼리 같이 생긴 커다란 가방에 옷을 몇가지 넣고 간단한 필수품들도 함께 챙겼다. 가방 군데군데 일단 비상금을 찔러 넣고, 선반위에 장식품처럼 올려놓았던 고흐의 아몬드 나무 우산에 내려앉았을 먼지도 털어냈다. 그리고 동그란 보자기 같은 거대한 모자로 가방을 덮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사진기를 한차례 더 살피고 필름 갯수도 다시 새었다. 어제 마시다 남은 와인이 생각나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대충 꼽아놓은 코르크 마개를 빼고 차가운 와인을 콸콸 잔에 쏟고 한 입 먹고 인상을 썼다.


못난이. 시원하면 맛있어 줄 법도 한데,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상당히 새침해진다. 뺨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새침쟁이 아가씨. 어째서 포도주스처럼 넉살 좋게 차가워질 수 없는 걸까 핀잔을 놓으며 다시 창문을 단속했다.


와인을 한잔 더 따라내고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열두시 십분. 짐을 싸느라 아침도 걸렀다. 기차는 두시 사십 오 분에 출발이니까, 빵을 사면된다. 몸을 조금 움직여 샌들에 발을 올리고 성실하게 동여맸다. 혹시 몰라 예비용으로 하나 더 잘 싸서 가방 바닥에 찔러넣었다. 뛰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일상이 되어준 거대한 침대의 섬에서 벗어나 진짜 표류를 시작할 것이다. 표면에 묻어 있던 액체가 연지만큼 고인 잔은 대충 선반 위에 두고, 샌들을 신은 탓에 두어 모금 남은 병은 현관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모자를 머리에 얹고 장비를 챙겼다. 이것저것 챙겼음에도 코끼리 가방은 사실상 비어있어 별로 무겁지 않았다. 렌즈는 여분으로 하나면 충분했다.


정아가 사는 건물을 벗어나자 나풀나풀대는 바지 안에서 바람이 일었다. 해는 모자 그림자 안에도 내리 쬐었고 정아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름의 계획을 되뇌었다. 가장 느린 기차를 선택 했으니, 부산에 도착하면 저녁 무렵이 될 것이다. 빙수를 한가득 먹고 자야지.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호텔에 들어가면 잘 것이다. 바삭바삭한 침대에 애인 없이. 애인은 정아가 집을 비웠다는 걸 모를 것이다. 찾아와서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알아서 짐작하겠지. 자신이 얼마나 무신경했는지를. 애인이 죄책감에 시달리길. 짧은 기원문을 외었다.








눈을 떴다.


빳빳한 시트가 밤사이에도 몸과 어우러지지 않아서 들떠있었다. 베개를 껴안고 창을 향했다. 창에 비친 농도가 낯설었다. 아직 아침 시간일텐데도 서울이라면 오후 늦게나 볼 수 있는 묵직함이 서려있었다. 이 자그마한 나라에도 색이 고르지 않아 정아는 사진을 위해 남쪽을 찾는다. 사뭇 이국적인 남쪽의 색온도를 처음 마주했을 때, 정아는 남쪽의 태양은 아침으로 오렌지 주스와 반숙 계란을 한 알을 챙겨먹고 나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홍콩의 태양은 반숙 계란 두 알, 아니, 어쩌면 오렌지 주스로 모자라 망고까지 챙겨 먹고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고. 아무튼. 남쪽에 있는 도시는 눈에 맺히는 온도도 조금 더 뜨거웠다.


팔을 뻗어 사진기를 작동시켰다. 찰칵. 한 장을 찍지만, 그저 참고용일 뿐.

정아는 이렇게 말간 걸 찍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햇살이 스미는 광경을 제일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앨범에 담을 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지는 않았다. 찰나의 시간과 흐름으로 변하는 그 섬세한 모습을 가둬버리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니까.


침대에 몸을 활짝 펴고 누웠다. 역시 침대는 커야해, 라며. 침대 경계에 닿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누워 손가락 끝으로 정체된 공기를 느꼈다. 가만히 공기를 가르는 손가락 끝에 심장 한 칸의 잊혀진 실밥이 감겨왔다. 옷고름처럼 자연스럽게 매듭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늘 의문이었다. 평범한 부모를 둔 만큼 의외로 무난하게 자라 그런 게 생길 이유가 없는데. 가만히 있으면 심장에 실밥이 느껴진다.


“예술을 할 운명인가보네” 지나가던 어떤 인연이 말해주었다. 그래서 일단은 그렇다고 믿고는 있다. 이유가 없는 것이라면, 타고난 운명이란 게 맞을 테니.


꿈쩍도 하지 않고, 그 느낌을 받아들였다.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어금니에 힘을 줬다. 이제부터는 굉장히 아플 것이다.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굉장히.


#오후햇살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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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잖아 커피 콩알 하나 만한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