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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엄마에게
2017-07-18 15:48:09 조회 : 244
   2014년 7월 11일 새벽, 딸이 사라졌다. 남편은 딸이 다니던 학교 주변에서 전단지를 돌리겠다고 했다. 그 때만 해도 이렇게 까지 오래 딸을 못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걱정보다도 "네가 감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둘째는 뭐가 저리 태평할까. 아는 것을 모두 말하라고 윽박지르려다 둘째 마저 떠날까 두려워 속으로 삼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둘째의 눈빛과 이제 "엄마의 삶을 살으라"던 첫째의 무덤덤한 말이 마음에 꽂혔다.
   1991년 9월 14일, 스물넷에 큰애를 낳았다. 9살 차이가 나는 남편은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을 애지중지했다. 임신중독증으로 팔다리가 퉁퉁 부어 낳은 팔삭둥이라 잠시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지만 제 아빠가 정성들인 덕에 곧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그때는 그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었는데 어쩌다 그 입에 들어가는 음식 하나하나를 아니 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됐을까. 남동생이 서울로 대학을 갈 때도, 전공과는 전혀 관련없는 여사원 1이 되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이제 인간 박영숙의 인생은 끝났다, 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아 잘 키우는 것이 엄마 박영숙의 일이었다. 내 인생을 아이가 다 가져갔으니 그 댓가로 남들에게 자식 자랑을 할 수 있게 자라 주는 것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가 계속해서 아가처럼 예쁘기를 바랐고, 한글을 빨리 떼길 바랐고 항상 1등을 하길 바랐다. 나는 여자여서, 가난해서 하지 못했던 것을 아이는 해 주길 바랐고 너무나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해내지 못하면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든, 아이가 모자라서든 좌우지간 이미 조용한 전쟁은 시작됐다.
  2002년, 드디어 M동에 내 집, 우리 집을 얻었다. 뻔한 월급을 가지고 맞벌이와 외벌이를 오가며 재테크를 잘 한 덕이었다. 좋은 동네 멋진 집에서 살게 된 게 다 내 덕인데 가족들이 그것에 대해 고마워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이따금씩 화가 났다. 내가 아끼고 희생하며 얻은 것들을 같이 누리는 대신 가족들이 내게 해 줘야 할 것들이 있었다. "너희 좋으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그들이 원하는 것으로 포장했다. 그 우선순위에 아이들의 공부가 있었다. 아이들이 성적을 잘 받아오면 내심 기뻤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우리 애들은 나처럼 집에 주저 앉지 않는 대신 화려한 경쟁 속에서 살 것이고, 살아 남아야 하니까. 당근보다는 채찍이 당장은 효과적이었다. 아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임에서는 절대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식 자랑을 하는 팔불출 엄마들을 내가 어떤 시선으로 보는 지 알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남이 우리 애들을 칭찬하면 꼬아 듣거나, 손사래를 치기 바빴다. 그런 날에는 괜히 심사가 뒤틀려서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화풀이를 해대곤 했다. 하지만 내가 폭발하면 할 수록 가족들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갔고 나는 그게 또 야속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를 얼굴로 첫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었다. 결과가 항상 내 기대에 차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집을 풀어오라면 풀어왔고, 아이들의 미래가 불안해서 새벽에 깨워 게워낸 하소연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식탁 맞은 편에 앉아 그 초점 없는 조용한 얼굴로. 둘째는 정반대였다. 절대 시킨 것을 한번에 해온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본인이 하고 싶은 게 우선인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말 안 듣는 둘째보다 말 잘 듣는 첫째가 얄미웠다. 겉으로는 그 애의 의뭉스러움을 탓했지만, 속으로는 사실 내가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게 항상 순종적이어서 열이 뻗쳤다. 첫째와 있을 때면 언제나 나쁜 사람은 나였다. 나는 원래 좋은 사람인데 왜 나를 이런 미친년으로 만드는지 서운해 하고 슬퍼하다가 어느 순간 또 남보다 못하게 흠을 잡고 비꼬았다. 
  그러고보니 단 한번, 큰애가 진심을 말했던 적이 있다. 2008년 그날, 나는 보란듯이 학교든 어디든 갈 필요가 없단 뜻으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랐다. 아마도 그때부터 딸과 나의 관계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모양새로 겨우 이어져 왔던 것 같다. 
  2009년 11월, 재수없이 수능 전 주에 신종플루에 걸린 딸에게 나는 또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12년을 달려온 가장 중요한 날에 몸관리 하나 잘 못해서 모든 걸 망쳐놓을거란 두려움에 떨었다. 결과는 역시 기대 이하였다. 이듬해 2월, 나는 아이의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10년 동안 도장 하나 없이 만료된 여권과 명절에 친정 한번 제때 가지 못한 댓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SKY를 간 아이 친구들의 엄마를 웃는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홀로 졸업식을 마친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3월이 오고 아이는 내가 비웃고 욕하던 퉁퉁한 하체를 가진 채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면 첫째보다 뚱뚱한 젊은 여자애를 찾기 힘들었다. 제발 살을 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자극을 했다. 무릎 위부터 툭 튀어나온 허벅지와 땅에 닿을 듯한 엉덩이, 비현실적인 비율 등으로 시작한 독설은 남자친구도 못 사귀고 누가 널 사랑해주겠니를 지나 밖에서 아는 척 하지 말라까지 이어졌다. 그때마다 아이는 살짝 달라지는가 싶다가 금세 다시 푹 퍼져있곤 했다. 더 이상 말하기도 지쳐 이제 빤히 몸을 쳐다보는 것으로 그칠 때쯤 아이는 대학 4학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재수를 했었다면 어땠을지, 네 진짜 수준에 맞게 "주저앉아 버린" 기분이 어떤지, 왜 고등학교 때 잘 나가던 친구들은 만나지 않는지 물었다. 그리고 현재에 만족한다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무엇 하나 특출나게 잘 하는 것이 없고 다 어정쩡한 너에게는 초등학교 교사가 딱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당연히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한다 생각했고, 내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그 애가 취해야 할 자세라고 생각했다. 임용 준비를 하던 아이는 간혹 자신없는 모습으로 울면서 공부를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짜증이 났지만 나는 나름대로 참으려 노력했다. 2014년 2월, 아이는 임용에 합격했고, 나는 아이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했다. 처음으로 웃으며 가 보는 아이의 학교 앞에서 우리 셋은 오랜만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아이를 보고 생각했다. 이제 다 왔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살을 빼는 것만 남았다, 고.
  2014년 5월, 발령 전까지 살을 빼는 것을 목표로 PT 등록을 해 주었다. 3개월 간 철저한 식단과 운동을 거쳐 딸이 누가 봐도 예쁜 모습으로 발령받기를 원했다. 예뻐지고 나면 자신감도 생기고 표정도 밝아질테지. 능력있는 남자친구도 사귈 수 있겠다. 먹는 것 하나하나를 체크하고,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뭘 먹을지 모르니 외출 전과 귀가 후에 몸무게를 재 엑셀 파일로 기록을 했다. 다 너를 위한 것인데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냐, 예뻐지면 네가 좋지 내가 좋냐, 그런 몸으로 계속 살고 싶냐, 는 말을 달고 살았다.      
  2014년 7월 11일 새벽, 딸이 사라졌다. 핸드폰은 연락이 되지 않았고 위치추적조차 되지 않았다. 괘씸하고 화가 났다. 아이는 책상 위에 이제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부족하고 모자란 너를 완성시키는 게 내 일인데, 거기에 20년을 넘게 기다려 온 내 행복이 있는데 이제 와서 내 이름 석자로 살으라니 이 무슨 배은망덕한 말인지. 어차피 며칠 지나지 않아 기어들어올테니 기다리자고 말했다.   
  2014년 7월 13일, 둘째를 시켜 아이가 아르바이트는 한다는 곳으로 편지를 보냈다. 아이는 편지를 읽을까. 
  2014년 7월 14일, 아이는 편지를 읽었을까.
  2014년 7월 19일, 아르바이트 장소로 남편과 향했다. 과외가 아닌 아르바이트는 시간낭비라고 못하게 했었는데 이런 곳에서 아이가 벌써 몇개월째 일을 해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차 뒷자석에서 기다리고 먼저 들어간 남편이 딸을 데리고 나왔다.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자른 딸이 낯설었지만 낯익은 무표정을 보니 눈물이 났다. 언제 마지막으로 잡았는지 모를 딸의 손을 잡고 편지를 읽었는지 묻자 딸은 읽지 않았다고 답했다. 편지에 썼던 내용을 한자 한자 되새기며 다시 한번 딸에게 전했다. 내가 달라질 테니 돌아와달라고 말했다. 내 딸로 태어나 준 것 만으로 이미 사랑받기 충분했던 딸을 몰라주었던 것이 미안했다. 항상 성에 차지 않는 모습만 보고 나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묵묵히 노력하던 모습은 보려 하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이제 인생에서 힘든 시기는 지났으니 같이 여행도 가고 친구처럼 데이트도 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상처받고 있던 딸의 마음을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욕을 먹으면서도 항상 담담히 주어진 일을 하는 딸도 감정이 있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딸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며 내 손을 놓고 자리를 떠났다. 평생 본 적이 없는 냉정한 모습이라 어찌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2014년 9월 10일, 추석이다. 곧 딸의 생일이다. 아직 친척들에게는 딸의 가출을 알리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이 일을 뭐라 설명해야 할 지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딸의 신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 딸의 현재 전화번호는 모르지만 이전 통화기록 조회를 통해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기간제를 시작한 것을 알았다. 이렇게 제 앞길 잘 찾아서 하는 아인데 왜 그리 못 미더워 안달복달했었는지 지난 날이 너무나 후회된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조금 걱정이 된다. 며칠 전, 남편이 학교로 전화를 해서 내게 전화를 하도록 부탁했다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듯 싶다.
  2015년 2월, 홈페이지에서 딸의 발령 소식을 접했다. 축하한다, 내 딸아.
  2015년 추석, 딸에게 처음으로 전화가 왔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떨려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했다. 비록 발신지는 학교였지만 먼저 전화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를 내어 줘서 고마웠다.
  2016년 6월 1일, 남편의 차 밑에서 새끼 고양이를 발견했다. 며칠을 굶은 듯 앙상했는데 뭘 주어야 할 지 몰랐다. 귀엽긴 하지만 키울 자신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중 둘째가 언니가 고양이를 키운다며 물어보겠다고 한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구나. 첫째가 흔쾌히 자기가 키우겠다고 했단다. 제 아빠와는 가끔 만나 식사도 하는 사이니 전해주기로 했다. 이름은 미우로 내가 지어줬다. 왠지 미우가 복덩이처럼 느껴진다.
  2017년 3월, 자궁을 들어냈다. 약 기운에 취해 병원에 누워있는데 차마 저장도 못하고 있던 번호로 처음 전화가 왔다. 언제나처럼 덤덤한 아이는 지난 7년간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7년간 만났다니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잘 지내고 있다며 조만간 밥을 한번 먹기로 했다. 
  2017년 4월, 한 손에는 미우를, 다른 손에는 케이크를 들고 딸이 집에 찾아왔다. 거의 3년만에 집에서 만난 딸은 마치 남의 집을 보듯 구경을 하고, 식탁에 앉았다. 그때와 같은 식탁이지만 이제는 구조상 나란히 앉을 수 밖에 없어서 우리는 서로의 옆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그래도 딸이 내가 한 음식들은 참 좋아했었는데... 딸이 좋아하던 음식들을 해 주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아쉽고 미안했다. 미우가 많이 불안해해서 밥만 먹고 딸은 떠났다. 그래도 관계가 조금은 나아지기 시작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2017년 5월, 딸이 먼저 연락을 해 와 식사를 하자고 했다. 딸이 남자친구와 자주 온다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예전 같으면 쓸데 없는 데 돈을 쓴다고 뭐라 했을 텐데 딸이 사주는 밥을 먹는 기분이 어떤건지 알고 나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밥을 먹고 백화점에서 함께 쇼핑도 했다. 행복했다. 조금 자주 연락을 하고 싶은데 딸이 부담스러워 할까 걱정이다. 




  한동안 엄마는 자주 문자를 보냈다. 마지막 연락은 10일 전. 새로 산 가방이 괜찮은지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살갑게 답장을 하진 못해도 이제는 물결무늬나 느낌표 정도는 붙일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의견을 엄마에게 밝히는 게 무섭거나 뒤에 따를 엄마의 반응이 두렵지 않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라 나는 항상 엄마의 마음에 드는 딸일 수 없고, 엄마도 내가 원하는 말만을 하지는 않는다는 걸 아니까. 예전보다 서로를 훨씬 더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우리는 그 불완전의 간극을 인정하고 좁혀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들을 때는 콧웃음쳐지던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라는 말을 아빠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마음이 가장 많이 무너졌던 것 같다. 냉정하게 이제는,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를 낳아 잘 키울 자신은 없다. 역겨운 한국 사회의 여혐은 차치하고, 엄마의 딸로서 받은 상처가 다 치유가 될 수는 있을지 지금이 용서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단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가 이 글을 보고 얼마나 공감할 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글은 다시 엄마의 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길로 한발짝 들어선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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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해수욕장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