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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어릴 때 겪은 무당굿과 꿈의 신비
구름밭 2018-10-05 11:47:57 조회 : 246

산골 동네의 마금쟁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원인 모르게 왼다리가 아프기 시작하여 하루 다르게 악화되었지만 산골이라 병원에 간다는 개념이 없어 방치하다가 일어서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먼 동네에 용하다는 영감 의원 집에 가서 여러 날 치료하는데, 다리를 양손으로 압박하여 밀면서 독물이라는 것을 짜낼 때의 아픔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의원 집에 오래 기숙할 수 없어 집에 와서 아버지가 같은 방식으로 했는데 아프다는 소리에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몸은 극히 야윈 채 방에 누워 지냈다.

어느 날 나는 소중히 가지고 있던 은색 동전 한 닢을 꿈에서 잃고 잠이 깨어 자리를 뒤적여도 없어서 내 돈이 없어졌다고 울부짖듯이 했다. 밖에서 들은 어머니는 내가 정신이상으로 헛소리 하는 것으로 여겼다. 동네에 굿의 일종인 '마금(막음?)' 하는 영감이 있어 밤에 그 마금쟁이가 우리 집에 오고 사람들이 모였는데 나는 무슨 행사인지 몰랐다. 영감은 북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고, 얼굴을 알 수 없는 아저씨가 종이 가닥이 많이 달린 막대기를 흔들면서 벽장의 문을 열고 그 안을 총채질 하듯 털기도 하며 여기저기 다니다가 나중에는 누워 있는 나에게로 와서 막대의 무성한 흰 종이들을 얼굴에다 흔들더니 뚝 멈추고 얼굴에 댄 채 가만히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 행사의 주인공은 아픈 나 자신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살아 돌아오기만 해도 천운이다

가을에 시작된 다리 병은 겨울이 되면서 더 나빠져 산타할아버지 그림이 있는 겨울방학 책을 누워서 받아 봤다. 겨울 방학이 끝날 때면 다리가 나아서 학교에 간다고생각했는데 그것은 허망한 물거품이 되었다.

읍내에 대표적 병원인 '울진의원'이 있었는데 25리(10km)를 걸어 면소재지인 매화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12km 더 가는 곳이었다. 추운 겨울 아침에 어머니 등에 업혀 가다가 나는 목이 말라 물을 먹고 싶다고 하니 나를 길가 자갈밭에 내려놓고 냇가로 가기에 그릇도 없이 어떻게 물을 떠 올까 했는데 한참 후 돌아 온 어머니가 내 입에 갖다 댄 것은 고무신에 담긴 물이었는데 흰 고무신을 어떻게 씻었는지 그렇게 새하얄 수가 없었다.

울진의원은 자기 병원에서는 못 고치니 대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대구행 새벽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날이 희끄무레 밝아지고 동해안 바다 가까이 버스가 지나갈 때 창밖에 출렁이는 엄청난 물의 세계를 처음 본 신기함에 나는 안다는 듯이 "저게 뭔지 알아?" 하니 어머니는 "바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놀라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수평선 위로 해가 뜨면서 광활한 해면에 비치는 찬란한 황금빛은 요정 같이 신비로웠다.

대구동산병원이 그 당시 가장 큰 병원이었다. 하얀 옷의 의사가 침대에 앉은 내 옆에 선 어머니에게 말하다가, 외국인 여자가 종이를 들고 서서 의사에게 무슨 말을 하니 의사는 유쾌하게 영어로 말했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체중기에 올라선 후 나를 내리고 혼자 올라가는 식으로 몸무게를 쟀다. 좀 먼데 가서 번거롭게 윗옷을 벗어 가슴 촬영을 하기에 이걸 왜하나 싶었다. 복도 소파에 앉아서, 아주머니가 긴 막대 걸레로 바닥을 닦는 것(처음 보는)을 구경하기도 하며 장시간을 기다린 후에 다시 의사를 봤는데 종이에 적은 것을 주면서 이 약을 한 달간 먹은 후에 오라고 했다. 지금 다리 수술하다간 죽는다고 하더라고 어머니가 나중에 누구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식당 의자에 앉을 때 벽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발견하고 놀랐다. 내 얼굴이 저렇게 되다니. 외할머니는 내가 대구 병원으로 떠날 때 '저 녀석이 살아 돌아오기만 해도 천운이다' 라고 했다고. 외갓집 방에서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운세 책을 읽어주었는데 "날이 가고 봄이 되면 어린 것을 땅에다 고이 묻으며...." 어머니가 자식 하나를 잃게 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것이, 고의로 꾸미는 말 같아서 나는 전혀 마음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내가 듣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사실 외할아버지는 병을 앓고 있었음)

굿을 해보자

다리 수술은 안 되고 약명을 적은 쪽지만 주면서 집에 가라고 하니 이런 큰 병원도 못 고치는구나 하는 절망감이 들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저녁 어스름에 나를 업고 낯선 길가의 전봇대 옆에 서서, 내 또래 아이들이 활발하게 장난치며 노는 것을 보고 "그러지 말어. 그러면 안 돼" 하며 엄마가 아이를 다정하게 과잉 돌봄 하듯 말했다. 순박해 보이는 아줌마가 다가와서, 병을 잘 고치는 의원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꽤 멀리 따라 가던 어머니는 뒤쳐지다가 그만 돌아섰는데 길은 더 어두워졌다.

기숙 집 주인 아저씨가 소개한 의원 집에 며칠 다녔다. 다리에 침과 뜸을 놓고, 독물이 나오는 상처에는 집에 가서 똥을 구어 붙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주인 여자의 멸시를 받으며 연탄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해냈다. 어느 병원에서는 관절을 고정하는 벋정다리로 만드는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다. 늦은 밤 희미한 전구 불빛 아래서 주인아저씨는 젓가락 두 개를 움직여 땅을 딛고 걸어가는 모양을 보이며, 뻐쩡다리는 아무 불편 없이 이렇게 잘 걸어갈 수 있다고 설명하느라 열변했다.

어머니는 나를 업고 길 가다가 나에게 은근히 물었다. "환욱아, 뻐친다리 수술할래?" 나는 가당치않았지만 안된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 오면 물어보고" 라고 긍·부정 대답의 난처함을 모면했다. 아버지는 그건 안 된다고 할 거라 믿으며. 아버지는 구장(이장)으로 업무에 바빠 대구에 같이 오지 않고 나중에 오겠다고 했다. (시골에서 농사 일만 하던 어머니가 혼자 어떻게 병원 가는 등 여러 것을 해냈을까?)

나중에 온 아버지는 방에 앉아 어머니한테 그간의 시골 일을 세세히 얘기했다. 볼일이 많아 집(산골에 있는)에도 가지 않다가 대구 오기 전에 집에 잠간 들렀는데 꼬마(4살) 환철이가 아빠 왔다고 좋아서 매달리는데 앉을 새도 없이 집을 나서야 하고 아이는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식모를 불러 얘 좀 데려가라고 떼놓고 오기가 참 안됐더라며, 과자라도 사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고 하니까 어머니는 에구, 그 좀 과자를 사 가지 않고 그랬냐고 안타가워 했다. 그 얘기를 누워서 듣던 내가 눈물을 글썽이니까 아버지가 보고 웃으며 "이 녀석 우는 거 보래" 했다. (나는 그 후로 가끔 그 상황을 떠올리면 눈물이 났다. 그때 아버지가 과자봉지를 내놓았더라면 아이는 얼마나 좋아하며 그 귀한 과자를 먹었을까? 엄마 아빠 없어도 좋았겠지)

아버지는 우리를 대구에 두고 먼저 내려 가야할 사정으로, 시골에 가 있으면 대구에서 상황을 알리는 방법으로서 편지를 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것을 내가 글로 쓸 수 있는지 시험한다고 가상 예를 구술하며 수첩에 쓰게 했다. 둘이 엎드려서 말하고 쓰다가 아버지는 그만 반대쪽으로 엎드려 잠자코 있기에 의아했는데 나중에 출입문의 커튼으로 눈물을 닦기에 내 모르게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왜 우는지 몰랐다. 그 때 어머니가 들어오니, "환욱이가 글 쓴 것 좀 봐라" 하여 어머니가 보고는 "아이구 그러네. 언제 이래 배웠노" 하고는 무슨 생각 하는지 허공을 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어머니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는 일어서며 "아까운 자식" 했는데 나는 두 분이 그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건데 그게 뭐 대단하다고. (어머니는 글 쓰는 거 배우지 않았다)

시골집으로 돌아온 날 밤에 나는 숨 쉬는 게 힘들만큼 죽을 지경이었다. 엎드리면 숨쉬기가 좀 쉽지만 마냥 엎드리고만 있을 수 없어 반드시 누우면 숨이 넘어갈 것 같아 다시 엎드리며 숨 쉴 약 좀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약이 없는 걸 알면서도. 옆에서 애가 타는 어머니. 고모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면 아버지도 이 방으로 들어 올 텐데 안 오기에 이상했다. (건너 방에서 나의 고통 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방바닥에 박고 괴로워했으리라고 지금에야 상상된다)

그날 집으로 오면서 그 먼 길을 여자 둘이서 교대로 나를 업었다. 고모님이 처져 내리는 나를 자꾸 추켜올리니까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가 "의구, 많이 힘들제" 하니까 "내사 뭐 힘들지 않네만 업힌 애가 힘들까봐 걱정이네" 했었다.

어려운 밤이 지새고 새벽 일찍부터 대책을 서둘렀다. 굿을 해보자.

외로운 듯 외롭지 않은 무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작은 집에서 사람들이 왔다. 나를 업고 갈 사람은 제일 건장한 아재(삼촌)였다. 가랑잎같이 가벼운 나를 업고 25 리를 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집에 올 때는 그렇게 멀었는데, 언제 왔는지 잠결에 눈을 어렴풋이 떠 보니 버스 정류소였다.

나는 굿하러 간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사실은 '굿을 해보자' 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도 같고 다만 병을 고치러 읍내로 간다는 게 위안이었다. 산골에서 읍내로 간다는 것은 '서울 가는' 기분이었다. 읍내 외갓집에 가는 것이 좋았다. 읍내의 넓은 장터 한편에 있는 외갓집은 유리문에 '신흥찐빵' 큰 글자가 두 군대에 세로로 써져 있었다.

외갓집에서 '오실골'이라는 곳에 가는데 버스를 타고 얼마간 가다가 내려 논들의 한적한 길을 가는 중에 어머니가 물었다. "환욱아, 며칠 동안 외갓집에 떨어져 있을래, 나하고 같이 집에 갈래?" 나는 선뜻 외갓집에 있겠다고 했다. 맛있는 단팥죽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모든 음식이 싫은 내 입에 단팥죽은 천국의 만나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너, 외갓집에 있으면서 단팥죽 먹으면 안된데이" 하기에 실망이 컸다. 단팥죽을 먹으면 입맛을 잃어 다른 것을 못 먹게 된다고.

많이 걸었는데 나중에는 오르막길을 올라가 굽이를 돌아서 가고 또 가서 더 높은 곳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 들어갔다. 나는 아늑한 방에 혼자서 벽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예쁜 여자 아이가 들어와서 나를 보고는 같이 놀 사람이 없는데 잘 됐다는 듯이 앞에 서서 재롱을 부렸다. 저렇게 발랄 깜찍한 아이도 있구나.

아이는 나가버리고 아무도 오지 않아 지루하게 기다리는데, 고운 옷을 입은 여인이 들어와서 내 윗옷을 올리고 커다란 북어를 배에 대고 천을 허리 뒤로 돌려서 맸다. 수심어린 얼굴로 묵묵히 그 동작을 할 때 선녀 같은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에 가까워지며 나를 안는 것 같아 그 순간이 짧은 것이 아쉬웠다.

산중 이 외딴 곳에서 어린 아이와 단 둘이만 살면 외롭지 않을까? 나중에 알았는데 그럴 리 없었다.

신과 대화하는 무녀

굿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소설 '태백산맥' 에 나오는 굿은 씻김굿으로서 죽은 이의 영혼을 씻어주어 이승에서 맺힌 한을 풀고 극락왕생 하기를 비는 것이다. 마당에다 차일과 병풍을 치고 굿상을 차려놓고 네 남자가 장구, 피리, 북, 아쟁을 연주하고 무녀는 징을 치면서 주문을 왼다. 흉사한 남편의 원혼을 풀기 위해 여인이 손으로 빌고 무녀는 칼춤을 추기도 한다. 드디어 혼대(손대, 내림대)를 잡은 여인의 손이 떨리면서 망자의 혼이 혼대를 타고 내리는데 망자는 무당의 입을 빌려 소원을 말한다.

이와 달리 그날 밤 굿은 방에서 시작되었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휘장이 내려 쳐진 신단에 과일, 과자 등이 높다랗게 놓여 있고 무당 옷을 입은 그녀가 대장처럼 주도했다. 그녀는 나에게로 와서, 지금부터 중대한 일을 치러야 한다며 내가 놀랄 것 같으니 누가 붙잡으라고 했다. 외갓집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큰 형이 언제 왔는지 뒤에서 두 손으로 나를 잡았다. 나를 소금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인데 형도 겁내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해진 방에 혼자 누워 있으면서 이제 굿이 끝났나 했는데 다시 방으로 들어온 무녀는 신단 앞에서 징을 치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본 장면은 두고두고 떠오르는 희귀한 것이다. 그녀는 징을 들고 치면서 허리를 약간 굽혀 눈을 감고 하늘님과 대화를 했다. 나는 저 요란한 징소리에 어떻게 말을 들을까 싶은데 징을 크게 쳐야 신이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어라고 묻고는 징을 더 세게 치면서 신의 대답을 들었다.

"ㅇㅇㅇ를 하시렵니까."

.............

"ㅇㅇㅇ는 어떻게 합니까."

.............

"ㅇㅇㅇ를 하라는 겁니까."

............

그때 나는 그녀가 신의 대답을 진짜 듣는다는 감이 잡혔다. 신의 말을 듣지 않고는 그런 모습을 할 수가 없다. 그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만이 누워서 그 비경을 엿보았다. (혼자서 신의 대답을 간구하는 외로운 듯 외롭지 않은 무녀)

행사가 끝난 후에 조용한 방에서 무녀와 어머니가 얘기했다. 무녀의 말이 "그 묘에 차돌이 박혀 있는데" 어머니는 "내사 몰시더" 나는 누워서 듣고, 아! 언제 성묘 갔을 때 내가 묘 가장자리 비탈에 차돌들이 수정처럼 켜켜이 박혀 있는 것이 신기하여 그걸 하나하나 빼내면서 좋아 했는데. 나는 그 사실을 그때 두 분께 발설하지 않았던 게 나중에 후회되었다. 그러나 나는 굿의 결과내용에 대해 알지 못했고 별 관심이 없었는데, 후에 그 묘를 이장하는 큰 일이 실제로 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맛있게 먹었다

그날 밤 무녀 집에서 먹은 저녁은 참 맛있었다. 어머니가 아는 여인내들이 빙 둘러 앉아 방바닥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몇 마디 안 되는 은근하고 정겨운 말을 했다.

"이거 먹게"

"자네도 먹게"

송이버섯 반찬은 희한하게 맛있었다.

"아유, 애가 밥을 잘 먹네요"

"정말 그러네요"

어머니도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좋아서 활짝 웃는 얼굴을 했다. 외갓집에 와서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같이 밥 먹은 얘기를 자랑삼아 하면서 "무당이 글쎄, 그 많은 음식을 두고도 이거 먹으라는 말 한 마디도 않잖아요." 했다. (그 음식들이 어머니가 낸 돈으로 마련되었기에?)

아무튼 나는 무녀 집에서 살아난 듯 생기를 얻었다. 우리 집으로 오기 전에 외갓집의 재환 형이 나를 업고 '현대약방'으로 들어가니 듬직한 노장이 멀리서 나를 보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얼굴 보면 알아. 저게 결핵이라고" 하며 누굴 나무라듯 말했다. 대구 병원에서 적어준 약을 이미 본 모양이었다.

집으로 올 때 아버지 등에 업혀 보니 넓고 든든하여 훨씬 편했다. 여자 등에 업혀 오다가 마지막에 아버지가 업은 것이다. 우리 집 동네가 가까워질 때 덮어 쓴 홑이불을 벗기고 앞쪽 주위를 보니 봄이 오려는지 산천이 온화해 보였다. 나는 마음 편히 껌을 씹었는데 아버지가 기분 좋은 듯 말했다. "어허, 이 녀석 보래. 껌을 그래 너 혼자 씹고 있냐. 집에 가서 동생들에게도 줘야지" 하기에 나는 그만 부끄러워졌다. 동네에 이르자 개울의 징검다리 위에서 놀던 동생이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는 좋아서 돌다리를 빠르게 건넜다. 집 앞 길에 이르니 어느새 선옥이(식모) 누나가 나와서 나를 얼른 받아 업고는 나에게 얼굴을 돌리고 기쁘게 웃었다. 안방에 내리자마자 나는 남아 있는 껌 두 개를 꺼내 동생에게 선물인양 선뜻 내주었다.

노란색 '뉴-파스짓'과 빨강색 '비타엠'을 복용하고, 아침마다 나에게만 주는 개장국을 맛있게 먹었다. 한약도 다려 먹으면서 나는 하루하루 건강이 회복되고 있었다.

문에서 귀신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더라

서향인 우리 집의 남쪽 동마루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았다. 마루에 앉아 있다가 해가 져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옆집 누나가 울타리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내가 눈치 챈 것을 알고는 씩 웃으며 돌아섰다. 동생이 학교에 입학하는 날 아침에 옷에다 이름표와 코 닦이 수건을 새로 다는 등 분주할 때 나는 일어서 보려고 엉덩이를 꽤 많이 들었다가 도로 앉았다.

나는 이제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옮기는 앉은걸음을 곧잘 하면서 마루와 방 사이의 문턱을 쉽게 넘고, 동생과 숨바꼭질 한다고 제법 빠르게 이동하며 사랑방과 뒷방에도 오랜만에 가보았다. 동네 아이들이 샛방에 있는 나를 들여다 볼 때 나는 책상에 놓인 라디오의 안테나를 길게 뽑아 올리며 서는 동작을 하여 이렇게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동생이 진달래꽃을 한 아름 꺾어와 내 앞에서 꽃을 보라는 듯이 잠자코 서 있다가 싱긋 웃었다. 한껏 온화한 날 기다란 동마루 가운데에 느긋하게 누워보았다. 마당가에 높이 선 감나무의 잔가지들에 수많은 잎들이 돋아났는데 파란색 하늘을 배경으로 한 연둣빛 새끼 잎들은 참 좋아 보였다.

건강이 차차 좋아져 아버지는 내가 잘 때에 숨 쉬는 걸 들어보니 숨을 길게 쉬더라고 했다. 급성 폐결핵의 원인이었던 그 때의 폐단을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방안에 가득한 그 하얀 연기의 해독을 아무도 몰랐다니. 내가 있는 샛방에는 마을 반장이 자주 와서 오래 동안 아버지와 얘기하며 담배를 피웠다.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재미있는 무늬를 만들며 떠돌았다. 겨울이라 문을 열지 않는 좁은 방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아버지보다 연세도 많고 촌수가 한 등 위인 반장 할배는 내가 궁둥이에 살이 없어 뼈가 방바닥에 눌리는 것이 아파서 양손으로 땅을 짚고 앉아 있다는 말에 허허 웃었다.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내 몰골은 인간 같지 않았을 것이다. 대구 병원에 가기 전 외갓집에서 중학생 형 친구가 내 다리를 보고 "꼬챙이 두 개를 꽂아 놓은 것 같다"고 했다.

그 당시 몸이 아주 쇠약한 생태로 우리 집 작은 방에서 외롭게 지내던 어느 날 저녁에 집에는 사람들이 없고 식모만이 부엌에서 일하다가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그리로 가버려 나 혼자 남았는데 어두운 집이 무서워졌다. 문의 창호지에 생긴 티끌 선이 화를 낸 얼굴 모양이었다. 그것이 무서워 문을 열어버리려고 베개를 던졌는데 미치지 못했다. 식모가 빨리 와서 문을 열면 좋겠는데 옆집에서 싸움을 말리는 식모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울면서 어떻게든 문을 열려고 기를 쓰는데 그 얼굴은 잔뜩 성내는 모습으로 변하기에 식모를 부르며 울부짖었는데 마당에서 개가 컹컹 짖었다. 아래채에 세 들어 사는 노쇠한 할머니가 와서 내 뒤에 앉아 두 팔로 나를 감쌌다. 어머니는 내 말을 듣고 오해했는지, 과장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와전했다. 문에서 귀신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더라고.

그렇게 잘 아는 무당은 첨 봤네

'환욱이는 이제 작대기를 짚고 마당에 걸어 다닌다....' 아버지가 삼척공고에 들어간 형에게 쓴 편지를 우연히 봤다. 집에 아무도 없는 어느 날 혼자 넓은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뒤에서 "환욱아" 하기에 돌아보니 먼 삼척에서 온 형이었다. 형은 나보고 걸어보라고 하기에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 보였다. 형은 동마루에 누워서 노래를 불렀다.

아침 먹기도 전에 나는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폐달을 밟는 둥 마는 둥하며 노래를 불렀다.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아래채 방에서 베 짜던 어머니가 히히 웃기에 왜 혼자 웃을까 이상했는데 나중에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재밌게 말했다. 내가 마당에서 '어쩐지~ 나는 좋아~' 하고 노래하는 것이 우습더라고. 아버지도 웃으며 "다리 아픈 놈이 좋기는 뭐가 좋아" 했다. 나는 이제 다리 아프지 않는데.

드디어 먼 길을 걸었다. 1km 넘게 떨어진 소로실에 사는 고모네 집에 심부름을 간다는 것은 대장정이었다. 고모님이 문을 열고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복학하려고 아버지와 2km 떨어진 학교에 갔다. 3학년 교실에 들어갔다가 복도로 나오니 교무실에서 나온 아버지가 복도에서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결핵이 치유되니까 다리도 자연히 나았지만 후일에 재발되곤 했다. 다리가 안 좋아 다시 학교에 안 가고 집에서 노는데, 읍내에 다녀온 어머니가 희색이 만연하여 중대 뉴스인 양 울진에서 있었던 놀라운 일을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잘 아는 무당은 첨 봤네......"

귀신이 가져갔나?

아주 신통하다는 선녀 집에 몇 사람이 같이 갔는데 그렇게 잘 맞출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용서장네 할매의 점을 볼 때 무녀가 말했다.

"너 집 마루에 있는 고무나무에 내가 살짝 올라 가 봤더니 아래로 숙여지기에 그만 내려왔다."

용 서장(울진경찰서장)은 내게 할아버지뻘 친척으로서 그 집은 다소 신식이어서 당시에 보기 힘든 고무나무 화분이 마루에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찬장 안을 들여다보니 먹다 남은 밥이 있더라...."

그날 아침에 먹었던 밥그릇을 묘사하는 무녀의 말에 할매는 그만 에구머니나 놀랐다. 경찰서장 부인인 할매는 말하자면 지성적인 여성이었다. 어머니 차례가 되어 점쟁이 앞에 앉았다. 그녀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잠에서 깨어난 듯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 동내에 갔다 온 얘기를 했다.

"너 동네 앞산이 나지막하더라. 산 위에 앉아서 너네 집을 봤다. 동마루에 머리가 꼽슬꼽슬한 영감이 앉아 있더라."

무당의 말을 흉내 내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선뜻 떠올랐다. 그저께 작은 할배가 동마루에 앉아 안마루로 향하여 무슨 얘기를 했다. 작은 집 할배는 논물을 본 후에 가끔 우리 집에 들렀는데 그날 나는 마당에서 할배의 뒷모습을 봤다. 어머니는 무녀가 할배의 곱슬머리를 말하는 것에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너 집에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애가 누구노?"

나는 꼬마 동생이 안(못) 타는 세발자전거를 타며, 끌며 작은 집까지 갔다 오는 것을 즐겼다. 우리 집에 들어가는 길이 약간 비탈이 져서 자전거를 밀면서 들어가곤 했는데 그 것을 본 것이다. 그 얘기 듣고 있던 아버지가 건넛산 보며 "그런 거 있어" 하고 신통 무녀를 시인했다. 무녀의 말이, 그 애의 아픈 다리는 딸만 셋 낳은 집의 바가지를 훔쳐 삶아 먹으면 낫는다고. 어머니 얘기를 듣고 누가 아래 동네에 딸 셋만 있는 집을 지적하면서 "바가지를 훔칠 것 없이 사실을 얘기하고 달라고 하면 안 주겠나" 하니 "훔친 바가지라야 되겠지" 라고 누가 말했다. 나는 어린이였지만 미신에 대한 비판력이 있었다. 무당이 잘 맞추는 것은 신통한 것이지만 뒤의 결론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겼다. (앞부분은 진실. 뒷부분은 거짓. 그건 무당도 속으로 시인하는 것일 테다)

25리 떨어진 장에 갔다 온 작은 할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치마(?) 속에서 큰 바가지를 꺼냈는데 웬 거냐고 동생이 물어도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당이 말한 바가지 비법을 하찮게 여겼었는데 그걸 실지로 실행하는 할머니의 정성이 존경스러웠다. 집 앞에서 노는데 어머니가 불렀다. 부엌에서 내 온 그릇에 담긴 걸 마시라고 안마루 끝에 놓았는데 나는 좀 싱거운 생각이 들면서도 약 먹는 기분으로 따뜻한 노란 물을 다 마셨다. 행여나 다리가 낫는 기적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할머니는 매화 장에 갔다 오다가 갈면 동네의 딸만 셋 낳은 집 부엌에 물 마시는 척하며 들어갔던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더라고. 아마 그날 저녁에 주인아줌마는 쓰던 바가지가 감쪽같이 없어져 귀신이 가져갔나 했을 것이다.

어린이 때의 신기한 꿈

나는 어릴 때 아주 생생한 꿈땜을 서너 번 경험하였다. 어머니와 대구에 있을 때 나중에 온 아버지가 시골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했다. "양재 집 백식이가 짚가리에 불을 질러 그 큰 짚더미가 다 타는 큰 불이 났는데...." 내가 꾼 꿈과 똑 같았다. 아버지가 대구에 오기 전에 꾼 것으로, 불이 난 그 날이었을 것 같다. 꿈에서 나는 동마루에 서서 마당으로 오줌을 누고는 건너편 양재 집 쪽에서 아주 큰 불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굉장한 구경거리인양 소리를 질렀다. 그 불을 백식이가 냈구나. 양재 집은 개울 건너 앞산 밑에 있는 동향집으로 아침에 해가 뜨면 산 위에서부터 비추는 햇빛이 차츰 아래로 내려와 집이 노란색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였다.

꿈에 동네의 또래 여자 아이를 보았다. 인물이 좋아 남다르게 여겼던 그 아이가 내 앞에서 머리를 뒤로 젖혀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날 낮에 방에서 나는 그 아이가 우리 집 앞 골목길을 지나가는 것을 잠깐 보았다. 내가 아픈 기간이 길었기에 참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에서는 바로 앞에서 봤는데.... 그 아이가 우리 집으로 들어 올 리 없지.... 꿈이 안 맞아. 그런데 이럴 수가! 결국 그 아이는 내 친척 여자 애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서는 게 아닌가?

일반적으로 성인들의 꿈땜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꿈이 현실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돼지꿈을 꾸고 다음날 횡재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나의 꿈은 상징이 아니고 실제 일어나는 그대로 꾸는 것이었다. 꿈에서 길이 무너져 움푹 빠진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길을 가다가 바로 그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다. 이것은 내가 잠자는 동안에 나의 영이 시공간을 구애받지 않고 다닌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무녀의 영이 공간이동 하듯이 내 영이 불이 난 곳에, 무너진 길에 가본다는 것이며, 여자 아이를 실제 만나기 이전에 타임머신 타듯 시간 초월하여 미리 본다는 얘기다.

  성인이 되어서는 상징성의 꿈땜은 있은 것 같으나 어릴 때 가졌던 사실성 꿈땜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나이가 더 들어서인지 좋은 꿈이 없으니 상실감이 들면서 내 어릴 때의 족집게 같은 그 꿈들이 보석처럼 여겨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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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알겠어요? 시골 성묘 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