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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나는 실은 어제 영화 보러 제주도에 간 게 아니다
고타래 2019-12-12 19:49:27 조회 : 114

최근 제주도에 간 적은 3, 4년 전이었다. 수살우체국 집배원으로 근무하던 때.

그때는 혼자 갔다.

제주도에 혼자 간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에는 줄곧 여자 친구였던 J와 둘이 갔다.

사진을 전공한 J는 여행을 좋아했다. 여행하면서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스마트폰으로 찍을 게 아니라면 그나마 편하게 디카로라도 찍을 것이지, 왜 굳이 필름 값에 사진 인화 값에 돈을 그렇게 낭비하는지 답답했다. 물론 그런 걸 직접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J와 제주도를 참 많이도 갔다.

그때 생각도 나고 해서 집배원 시절 혼자 제주도에 갔는데, 기대보다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즐겁기는커녕 아주 몸서리칠 정도로 우울했다.

J와 갔을 때는 매번 스쿠터를 빌렸다. 그래서 내가 운전을 하고 J가 뒤에 타고, 해안가 달리다가 경치 좋은 곳에 멈춰 서서 J는 돈 아깝게 필름 카메라고 사진을 망설임 없이 마구 찍었고,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2박 3일 혹은 3박 4일 내내 그러고 다녔다. 다니다가 배고프면 아무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고. 그리고 어두워지면 가까운 모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갔고. 그러다 일정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에 오르면 그렇게 슬펐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그때 생각도 나고 해서 집배원 시절 혼자 제주도에 갔는데, 혼자 가서 내가 한 거라고는 자동차 빌려서 그때 J와 다녔던 곳을 돌아다녀 보는 게 고작이었다. 여기에서는 뭘 했고, 여기에서 밥을 먹었고, 여기에서 잠을 잤고.

그래서 그 뒤로는 제주도에 안 가려고 했다. 여기에서 사진을 찍었고, 여기에서 커피를 마셨고, 여기에서 수영을 했고. 그런 게 너무 우울했다.

그래서 안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느닷없이 제주도에 가서 영화 한 편 보고 바로 돌아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행동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제주도 가면 J 생각 때문에 몸서리칠 정도로 우울한데, 그럴 바에는 컨셉을 아예 우울한 쪽으로 잡아서 갔다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기발하다는 생각에 바로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리고 영화도 예매했고.


아침도 아니고 새벽 다섯시 삼십분에 일어나서 씻고 가게로 가서 미리 청소를 해놓고 청주공항에 갔다. 도착하니 아홉시 사십분. 비행기는 열시 사십오분 출발.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느긋하게 커피 마시면서 책을 읽다가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 한 시간도 안 돼서 제주도에 도착했다.

확실히 남쪽이라 그런가 제주도는 내가 사는 곳보다 따뜻했다.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그렇게 찬바람은 아니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면서 제주 시내에 있는 영화관까지 걸어갔다. 시내를 가로질러 가는 게 빠를 것 같아서, 여기가 제주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내를 가로질러 갔다. 기껏 제주도까지 왔는데 아무 볼 것도 없는 시내를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차도 많았고, 그래서 매연도 심했고, 삼사십 분 걸으니까 다리도 아팠고, 그래도 그냥 영화 상영 시간 전까지 영화관에 가야 해서 계속 걷기만 했다.

영화관에 도착하니까 한시 삼십분 정도 됐다. 영화는 두시 오십분 상영. 그래서 점심이나 먹을까 하고 식당을 찾았지만, 혼자 갈 만한 식당이 없어서 분식집에 들어갔다. 라볶이와 김밥을 시켰다. 치즈김밥.

J는 분식집에 가서 김밥을 시키면 늘 치즈김밥이었다. 그리고 쫄면 아니면 라볶이.

생각 없이 그렇게 주문하는 바람에 갑자기 눈 주위가 뜨거웠다. 주문한 메뉴를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라볶이는 맛있었지만, 치즈김밥은 밥이 조금 질었다.

영화 보는 내내 절반은 잤다. 영화가 재미없어서 잔 건 아니고,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서 가게 청소하고 한 시간 반 운전해서 공항까지 간 다음, 비행기 타고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이번에는 한 시간 넘게 걸어서 영화관까지 왔다. 그러니 영화가 아니라 70m 상공에서 94km/h의 속도로 3초 만에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자이로드롭을 연속으로 두 시간 타더라도 절반은 졸았을 것이다.

그리고 깨어 있는 시간에는 영화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가 왜 영화를 보러 비행기 타고 제주도까지 왔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왜 왔을까! 미치지 않고서야 왜 영화 한 편 보러 비행기 타고 이 먼 제주도까지 왔을까! 바다를 본 것도 아니고, 관광지를 구경한 것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왔을까! 영화관에 와서 잠이나 자는 주제에 왜 왔을까!

제주 시내는 여느 소도시 시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설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도대체 왜 왔을까!

영화관을 나와서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간은 오후 다섯시가 조금 안 됐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오후 여덟시 오분. 세 시간 정도가 남은 셈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어디 갈 데가 있는 건 아니었다. 대신 이번에는 공항까지 시내를 가로질러 가지 말고 해안가 쪽으로 가기로 했다.

탑동광장으로 해서 용두암을 지나 공항까지 가는 길.

두 시간 조금 안 걸릴 것 같았다.

바람이 매우 강했고, 조금 걷다보니 날이 금세 어두워졌다. 용두암 근처를 지날 때는 걷는 게 힘들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래서 파도도 거셌다. 길 아래에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동물의 포효만큼이나 크고 무서웠다.

난간에 기댄 채 그 소리를 계속 들었다. 바람 불어 추웠지만,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면서 내지르는 비명에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한 삼십분은 그렇게 서서 파도의 절규와 비명을 들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야 해서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쉬웠지만 다시 걸었다.

공항까지 걷는 동안 귀에서는 줄곧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항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하니 일곱시 이십분이 조금 넘었다.

얼른 화장실로 가서 가볍게 세수를 한 뒤, 공항 안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음료수와 빵을 샀다. 찬바람 맞아가며 걸어서 그런가, 갑자기 허기가 밀려와서 간단히 뭐라도 먹어야 했다.

음료수와 빵을 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고, 빵을 한입 물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 빵을 한입 무는 순간 느닷없이 눈 주위가 뜨거워졌다.

J를 떠올리기도 전에 눈부터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곳은 어둡지도 않고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눈에 힘을 줬다. 목울대가 간헐적으로 떨렸지만, 계속 눈에 힘을 줬다.


바람 불고 깜깜할 때에는 제주도 용두암 근처가 울기에 좋다. 그리고 다 울었으면 이제 공항까지 걷자. 용두암에서 공항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도 안 걸린다. 물론 개인차가 좀 있겠지만, 걷는 게 다음 날 변비 탈출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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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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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햇살 정아는 그런 것들을 대하는데 서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