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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산뜻한 늦봄이었다.
리세.첸 2020-01-21 19:13:29 조회 : 128
미루고 미뤄뒀던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고 넣어둔게 엊그제 같은데 다시 해가 강해져 난감했다. 무난한 나날들이 계속되어 의식하지 못한 사이, 또 한달이 흘러가버렸다. 무난하지 않은 점이라면 또 애인을 보지 못한 정도.

대학시절 은사의 추천으로 전시회 명단에 들어가는 바람에 한동안 휴일이고 퇴근 후이고 정아답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십여년을 재활용하고 있는 작품들을 쓰고있으니 망정이지.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사진에게 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 또한 굉장히 소모적인 작업이다.


“이제는 인스톨레이션만 하시는 건가요?” 사진의 거처를 정해주고 있는 정아에게 큐레이터가 물었다.


“...뭐.” 그마나 은사의 청이 아니었으면 하지도 않았을 일이니까.


“작가님 새 작품이 궁금해서 그래요.” 일손을 돕던 그녀가 웃었다.


“당분간은, 그럴 것 같아요.”


“그러시구나…

활동을 안하셔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가 걱정했었거든요. 제가 작가님 팬이라.” 큐레이터의 말에 정아가 잠시 침묵했다.


“제가 건강해 보이나요?”


“어머, 제가 실수를 했나보네요.” 큐레이터가 난감한 얼굴을 하는 바람에 정아의 속이 불편해졌다.


“아니에요. 그냥, 건강해 보이는구나. 해서요.”


“아, 그러셨구나.” 안도를 하며 정아가 배정한 틀에 사진을 넣다. 다시 말을 걸었다. “오프닝 파티는...”

“못 가요.”


“네, 안그래도 박교수님께 전달 받은 내용이라 저희측에서 작가님 빈자리 느껴지지 않게 잘 준비해 놓고 있어요.”


“그렇게까지 해주실 건 없는데, 고마워요.” 정아가 짧은 미소를 짓고 빈 벽에 눈대중을 재봤다.



“그냥, 그렇게 신경 써서 인스톨레이션 하시는데 손님들이 저희가 받아서 큐레이션 한 거라 생각해버리니까 좀 아쉬운 거죠.

이것도 작가님께서 이렇게 고민하고 하신 또 하나의 작품인데 말이에요.” 큐레이터는 정아가 작품을 대보는 위치 마다 표시를 하며 정아의 뒤를 좇았다.

“전 상관없어요.” 위치를 정한 작품을 건네며 고개를 돌렸다. 옆 방에 줄지어 걸린 익숙한 작풍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또 하나의 작품인데 말이에요.’

어쩌면 너무 열심히 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참, 작가님. 초대권은 우선 10장씩 배정이 되었는데 혹시 더 필요하신가요?”

“아뇨. 그거면 돼요.” 생각에서 깨어났다.

“네, 그럼 10장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혹시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주세요.”


초대권은 그걸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책장 한 구석 꽂혀있을 봉투를 흘겨보았다. 꼬박 10장. 박교수님이나 수석 큐레이터도 참. 초여름에 정아의 사진이라니.

정아가 초대권 나눔이나 인터뷰, 심지어 오프닝 파티 참석 같은 의무적인 일에 손을 놓고 일상으로 돌아갈 궁리만 하는 동안, 애인은 여러 의무적인 행사에 정신이 없었다. 서로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산뜻한 늦봄이었다.







오랜만에 장을 보러갔다. 한 동안 밖에서 산 샌드위치 따위로 연명한 동안 많은 것이 낯설어져 있었다. 확연히 달라진 색감이 정아의 눈 앞에서 춤을 췄다. 특히나 해를 받아 막 익기 시작한 토마토들이 한 가득. 붉은 구슬 같은 방울토마토들도 예쁘게 투명용기에 담겨 차곡차곡 매디를 차지했다. 그 격정적인 색감이 너무 아름다워 토마토만 한가득 사가지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집 근처 구멍가게에 들려 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 하나 베어 물며, 느긋하게. 낮잠을 부르는 햇살을 멀뚱히 바라보고 걸으며 골목에 들어서는데 어딘가에서 아기 울음소리 같은 음이 길게 늘어졌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며 정아의 걸음도 함께 멈춰 서 버렸다. 다시 한 번 길게 울었다.

대낮부터 얼룩고양이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듯 기지개를 한껏 켜고는,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웅크려 앉아 정아의 앞길을 막았다. 생긋 웃고 있는듯한 그 얼굴을 보자 속에 잠들어 있던 어떤 우울감이 피어올랐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선뜻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분한 마음에 고양이한테 내리쬐는 햇살을 막아선 채로 있었다. 대책 없는 우울함에 매를 맞는 기분이었다. 괴롭힘 당하는 외톨이처럼. 살려달라 해도, 들어줄 이가 없을 거란 고립감이 정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 동안 고양이와의 눈싸움으로 지쳐갈 때 쯤 갑작스런 진동이 울렸다. 저 대범하기 짝이 없는 생물은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혼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와인샵에서 온 문자였다. 언제 와인을 가져 갈 것이냐고. 그것마저 우울하게 느껴져 답장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집을 향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집에 문을 걸어 잠그고 평화를 찾을 요량으로 토마토를 정리하려던 차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엄마였다.


“참, 네 홍콩 애인이랑은 요즘 어때?”

열무김치를 담갔으니 가져가라고 건 김에 궁금하다는 듯이. 분명 김치 쪽이 핑계겠지만. 어느 쪽이든, 어차피 정아는 김치를 가지러가지 않을 테니.


“괜찮아. 바빠서 잘 못 만나.” 묻지 않은 디테일을 말해주는 것은 옵션이자 입막음이었다. 정아의 대답에 엄마는 별 말을 하지 못하고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좀 하다 빨래를 널어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겨우 혼자가 된 정아는 전화와 토마토를 내버려둔 채, 발사믹 샐러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큼하고 진한 식초로 변해버린 와인을 한번 흩뿌리고, 올리브유를 덧넣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맛이 나기에 특별히 좋아하는 샐러드다. 흐물흐물 녹아 없어진 바다생물의 사채에 절여있는 엄마의 김치가 떠올랐다. 막상 입에 대라하면 먹기야 하지만, 마늘과 생강까지 한가득 들어간 그 빨간 음식을 떠올리자니 왠지 속부터 쓰렸다.

엄마는 애인을 ‘네 홍콩 애인’이라 부른다. 딱히 홍콩사람이 아닌 걸 알지만, 만난 장소가 그곳이라는 걸 알아버린 바람에 굳어진 명칭이다. 엄마는 애인이 아직도 홍콩에 주로 머물며 출장차 한국에 들어오는 줄 안다. 유능한 금융인이라는 말에 엄마는 애인을 좋아한다.


“훤칠하니 잘생겼지?”

언젠가, 엄마는 그렇게 정아를 놀라게 했다. 정말 ‘훤칠하니’ ‘잘’생겼으니. 정아는 순간, 엄마가 애인을 찾아낸 줄 알고 잠을 설칠 정도로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저 엄마의 푼수끼가 발동한 것뿐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용할리 없으니.


통화의 서막처럼 나타난 얼룩고양이와 맥 빠지는 생각의 고리에, 커다란 양푼에 녹색 채소를 가득 채우고 꼭 꼭 씹어 말끔히 비워버렸더니 속이 쓰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 스테인리스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들어 바닥에 흥건히 남아있는 식초를 마저 들이켰다.

#오후햇살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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