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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생리활동
리세.첸 2020-02-07 22:44:18 조회 : 125
낮에 와인샵에 갔었다.


약간씩 채워 넣은 덕에 셀러의 재고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와인 바에서 두병 구매, 친구가 한 병, 엄마 집에 물 주러 갔을 때 아빠의 창고에서 한 병, 사무적인 선물 세 병, 애인이 가져온 네 병, 원래 있던 세 병, 마이너스 다섯 병) 그렇지만 왜인지, 가보고 싶었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익숙한 공기에 마음이 트이면서 괜히 민망해졌다. 단순한 호기심이 들킬까 와인병을 만지작거리며 둘러보다, 손 가는 대로 아무거나 들고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오랜만이에요.”


정아의 퉁명스러운 동작에 그가 소년처럼 웃었다. 정아 만큼 나이가 묻어있는 얼굴에 그 미소는 왠지 망고를 연상시켰다.


“저 없는 동안 와인 잘 찾아가셨다는 얘기 들었어요.” 그의 말에 딴청을 피웠다. 역시. 꽤나 악명 높은 고객이 된 게 분명했다.


“네, 홍콩...에 가셨다고...” 꽤나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하, 일이 좀 있어서” 그도 말꼬리를 흐리고 다시 웃었다.


“망고주스 드셨어요?” 홍콩에 다녀왔다니, 진지한 눈으로 묻는 정아에,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은 사장은 알겠다는 듯이.


“아 혹시, 그 체인? 그럼요. 갈 때마다 먹는 걸요.” 사장은 익숙한듯 이야기를 했다.


‘갈 때 마다.’ 와인 가게 사장도 홍콩과 연이 있는 사람이었다니. 왠지 놀라워 다시 그를 구경했다. 어쩌면, 잘 찾아보면 그의 눈동자 속에 정아가 보지 못한 지난달의 홍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콩 가보신 적 있나봐요?” 사장이 말을 이어갔다.


“음. 그냥 있었어요. 홍콩에.”


별 생각 없이 말한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적합한 표현도 없었기에. 정말로. -그냥- 있었으니까.


“그러셨구나.”


남자이고, 정아와 비슷한 서른 후반 쯤 돼 보였지만, 얼굴선은 어딘지 모르게 고왔다. 그에 비해 몸은 건강해 보여 잘 자란 도련님 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왠지 취미로 테니스를 칠 것 같은 프레피족스러운. 애인과 다른 형상이 신기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시음 좀 해 보실래요?”


말을 하는 그를 감상했다. 종종 무심코 빠져버리는 혼자만의 감상. 비디오테이프를 보듯, 속도를 멋대로 조종해 보며, 찬찬히.


“망고주스라고 하시길래… 마침 이번에 좀 크게 납품 행사 같은 걸 해보려는 와인이 있는데, 그게 이상하게 망고랑 어울리더라고요. 어때요? 괜찮으신가요?”


망고를 닮은 그가 따라주는 망고랑 어울리는 와인이라니.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아 그를 따라 가게 한 편에 마련된 작은 라운지로 가기로 했다. 캐주얼한 소파에 앉아 있자, 그가 쟁반에 큼지막한 생망고와 몇가지 다른 모양의 건망고를 담아왔다. 쪼골쪼골하고 반가운 모양들.


“그러고 보니, 망고랑 먹기 전에는 이 와인. 정아씨랑 분위기가 비슷하네요.”


이름을 불러버리는 바람에 많이 놀라버리고 말았다. 이름을 알고 있었다니.


“아, 이런. 제가 실례를 했나보네요.”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원래 사업하는 사람이라 이름 부르는게 익숙해서요...”


“아...”


이상한 기분에 그를 쳐다보았다.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나.


“하하. 그렇게 당황하실 건 없어요. 단골이신데 이름 정도는 외워놔야죠. 거기다 한참이나 와인을 맡기셨는데.”


생각이 들켜버린 민망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안해요.”


“아, 저희야 믿고 맡겨주신 건데 감사하죠.” 사장이 코 끝에 찡긋 힘을 줬다. 손을 꽤 잘 쓰며 말을 하는 그도 외국인들 사이에서 자랐을까. 홍콩을 자주 오가는 사람이라니, 그래서 딱히 어색할 건 없었다.


“그냥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까 조금, 살짝 걱정은 했어요.”


손가락으로 작은 표시를 한 사장은 씨익 웃어놓고 과즙이 가득한 신선한 망고 조각을 포크로 찍어 정아에게 건네주었다. 오랜만에 맛는 생망고가 입 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입안에 이러저러한 망고를 씹으면서도 그의 입은 웃는 모양을 했다. 굉장히 잘 웃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과 함께 홍콩 이야기를 잔뜩 하며 와인을 마셨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홍콩을 느낀 것이 꽤 오랜만이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정겨운 풍경.


돌아갈 때가 되자 마시게 했으니,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그는 잠시 문을 닫아두고 정아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하는 정아에게 그는 술 냄새 좀 빼는 김에 걷는 거니 그야말로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한 사장은 정아가 구입한 와인을 사거리까지 들어주기로 하고 망고와 어울리는 그 와인까지 덤으로 챙겨줬다. 집에 돌아와 조심스레 샐러에 넣었다. 문을 닫기 곤란할 정도로 풍성한 셀러를 보니 뿌듯해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늦은 저녁 시간, 애인이 들렸다 갔다.

식사도 거른 채, 욕정을 채우고. 곧 돌아갔다.


굳 나잇.

배웅하고 문단속을 했다.



한밤 중이지만, 정아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입욕제도 넣지 않은 채 들어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별다른 예고 없이 소파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정아의 몸에 남은 애인의 체취가 두둥실 떠다니는 고요한 탕 속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처참히 실패한 것 같지만, 애인과 정아는 ‘플라토닉 러브’를 선언했었다.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애인이 정아와의 결혼을 깨끗이 포기하면서 그렇게 정했다. 애인이 결혼을 해도 무리 없게.


너무도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생활에 마룻바닥 아래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조약이 떠올랐지만, 정아는 태연했다. 흔들림 없이 모든 걸 인지한다. 왜냐하면, 그저 생리 활동일 뿐이니까. 에로스가 아닌. 단지 생리 활동일 뿐이니까.


오늘의 일도. 살아가는 것도. 규칙적인 신체리듬을 지켜주는 삶에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이 축 늘어졌다. 물에 풀어진 밋밋한 몸둥아리처럼.


애인과의 관계는,

생리 활동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후햇살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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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 어쩔 수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