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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려본다

커피 콩알 하나 만한 죽음
리세.첸 2020-02-08 14:35:28 조회 : 143
외지인의 신분으로 이곳저곳 탐방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체력은 간간히 찾는 헬스장보다는 지금, 이 잠시간의 시간으로 충족된다. 애인을 보지 못했으니 건강은 심한 마이너스 상태.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감성이 너무 커져 균형이 깨져버리기 십상인데 꽤나 불리한 상태로 사진을 찍게 생겼다. 이건 애인에게 사과를 받아야할 문제다. 몸이 버텨내기 어려울 정도로 감성이 커지면 매개가 물리적 신체가 잠식되기 때문에 ‘예술’은 불가하고, 정아는 난산 끝에 생산에 실패하게 될 지도 모른다. 아주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인데 애인 그걸 무심하게 지나쳐버렸다.


애인에 대한 원망은 꾹꾹 눌러담아 치워두고 국제시장으로 향했다. 바다의 기운이 느껴지는 남쪽의 여름은 가벼운 질식감을 안겨준다. 폐에 조여오는 그 느낌을 받아들이며 시인한다. 자신의 여름 작업이 순수하지 않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인화를 하지 않을 거고 공식적으로 은퇴를 한 신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늘로 피하지 않고 투쟁과 투정을 함께 이어나갔다. 정아가 제발로 찾아들어가야하는 고통에 애인이든, 누구든, 똑같이 질식감을 겪도록. 말을 하지 않은 시간이 길어질 수록 고통의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언젠가 그들을 깨닫게 될 그 짜릿한 순간을 위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다.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데도 온 몸으로 서러움을 떨치며 사람들 사이에 외딴 섬이 된다. 담담하면 담담할 수록 더 서러워지는 이상한 규칙.


정아를 전혀 모르는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 말을 걸어준다면 고민할 것 없이 대답할 것이다.


“애인이랑 엄마에게 버림 받았어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 모두가 알아주게.



애석하게도 아무도 정아에게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그저 타자를 볼 때의 눈빛으로 가벼운 구경을 할 뿐. 상인들은 정아에게서 감지한 ‘서울 깍쟁이’에 대해 질시와 동경, 그리고 적대와 환영을 균일하게 배합한 눈빛을 흘렸다. 매해 보는 그 눈빛도 앨범에 나란히 담는다. 조금씩 달라지는 그 눈빛을 정아는 정확히 구별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은 시간에 영향을 받아 변해간다. 그리고, 대개 시간이 꽤나 명확한 직선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 사진들을 아무리 뒤섞어놓아도 정아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알아볼거 아무데나 찔러넣는다. 사람의 사진을 시간에 맞춰 보관하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니까. 괜히 변해가는 눈빛을 확인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찰나의 파편만 산발적으로 머리 속에 꽂아넣는다. 그래서 정아의 앨범을 열면 모래알 같은 사진들이 흐트러져 제각기 굴러다닌다.


오늘 정아는 왠지 모든 것이 낯선 타지에서 딸기맛 키드오우를 발견했다. 소윤이를 만나러 갈 때는 보이지 않더니 이렇게 혼자가 되었을 때야 다시 나타난게 조금은 괘씸했다. 소윤이를 위한 비상용 과자 한 두개를 남겨둘 수 있게 넉넉히 두 팩을 사들고 호텔에서 한동안 축내기로 했다.


신호를 기다릴 것이다. 이 맘 때면 오는 어떤 신호.


하루 종일 돌아다닌 몸을 침대 위에 대자로 뻗자 발바닥에 피가 몰리며 부산스러운 열감을 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발의 감촉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두고 나른함에 잠겼다.



이런식의 작업은 홍콩에서 돌아오고 나서하기 시작되었다.


은퇴는 이미 했고, 생활을 할 방법으로 우든로즈를 발견하게 되었다. 별다른 기술도 없으면서 사무직조차 할 수 없던 정아의 입장에서 딱히 대안은 없었다. 커피나 마실 요량으로 바리스타 학원에 등록해보았는데, 까다로운 콩알갱이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 보름만에 그만두었다.


여름마다 우든로즈를 떠날 예정도 원래는 없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다 질리게 된다면 적당한 곳으로 옮기고, 뭐 그러면서 은퇴한 여생을 보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모처럼 계획을 잘 실천하고 있었는데, 5월을 지나면서 정신 산란하던게 여름에 다가갈 수록 견딜 수가 없어졌다. 은퇴안 이런 것이겠거니 하고 가만히 견뎌왔던 것이 뼈에 고름이 차버려 당일 떨어질 때 초콜렛을 찾는 것처럼 죽음을 찾게 되었다. 카운터 뒤에 멋드러진 원목에 둘러싸여 있다가도 문득,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언제나 커피 콩알 하나 만한 죽음이 주머니 깊은 곳에 끼어있긴 했지만 그걸 손가락 사이 데구르 굴리면서 낙서를 하거나 사진을 찍으면 어느 순간 빠져나가기라도 한듯 잡히지가 않았다. 근데 일을하느라 사진기도 공책도 만지지 않은 열달 동안 그 콩알이 너무 커져버려 정아의 뼈를 파고 들어 정아를 갉아먹어버리기 시작했다. 정아의 마디마디에 죽음의 뿌리가 자라나 그 자리에 차오른 고름을 빼내기 위해 결국 카메라를 들 수 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작업을 시작한 건, 그러니까. 계산없는 우연이었다. 해산이나 죽음을 앞둔 동물이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먼 구석을 찾아가듯, 기차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선택한 게 부산이었다. 기억 속 부산의 해가 홍콩의 해와 많이 닮아있어 부산으로 정해진 것도 있었다.


서울도 홍콩도 아닌 그 어딘가인 이곳에서 해산을 준비한다. 점점 시트가 바삭바삭한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 시간이 늘고 열달 사이 잘 자란 그 무언가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얼추 그 정도면 때가 맞을 것이다. 태풍. 적어도 장마가 찾아와 지표면을 뒤엎어줄 그 때가.

#오후햇살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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