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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비평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을까?

임지훈
2017년 04월 11일

이 글은 '문단-(  )-문학' 연속기획 도중 투고되었습니다. 3회에 게재된 이은지의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에 대한 반론으로 씌어졌습니다.
토론을 이어가주신 임지훈님께 감사의 인사와 함께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게속해서 활발한 토론을 기대합니다―편집자.


 

문학-(적층)-문단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건 무엇인가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 매서운 질문이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든 생각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자 문학이 무엇인지,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일상에서 그 단어를 흔히 사용하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고자 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무엇이고, 또 문학은 무엇인지. 이 두 질문을 경유하지 않고는 이은지의 물음에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용어가 어떤 단일한 실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것은 이은지가 예시로 제시한 ‘채식주의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채식주의자”에 대한 일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먼저 묻고 싶은 것은 그 채식주의자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냐는 것이다. 이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채식주의자가 채식주의자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좀처럼 수긍이 가질 않는다. 그에 더불어 이은지가 비판적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빌려온 것으로 보이는 『채식의 배신』의 저자 리어 키스의 주장 역시 채식주의의 수많은 담론 가운데 하나일 뿐, 과학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채식주의 담론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그 담론장에 속한 사람들일 것이다. 채식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여러 입장이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확실한 건, 모든 종류의 채식주의에 대해 지금 여기에서 옳다, 그르다를 판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먼 미래엔 어떤 결론이 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담론이 오랜 시간의 산물이고, 그 안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입장들이 마구마구 다투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정치적 올바름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걸 단일한 실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 용어가 처음 제시되었을 때의 ‘정치적 올바름’과 현재의 ‘정치적 올바름’ 사이엔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가 있다. 현재의 정치적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은 그 거리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미래에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가 현재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거리를 통해 또 다른 무언가로 변모해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어쩌면 거기엔 ‘외계인에 대한 환대’나, ‘안드로이드에 대한 환대’ 같은 항목이 끼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일단 그때까지 죽어갈 외계인, 안드로이드 투사들을 위해, 묵념). 그런데도 사람들은, 특히 평론가들은 자꾸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를 ‘단일한 실체’로 규정하려 한다. 그래야 문제가 단순해지고, 자신의 말이 힘을 얻으니까.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올바름이 오랜 시간을 통해 구성되는 적층의 산물이라면, 문학은 또 무엇일까. 문학을 단일한 실체로 말하는 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문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해보았다. 아마 내가 자기 전에 베개 맡에서 쓴 ‘당선소감’만큼이나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봤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정의도 늘 전체를 포괄할 순 없었다. 정의를 내리는 순간, 나를 약 올리듯 빠져나가는 실체를 수도 없이 목격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왕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그러했듯이, 과감하게 문학도 ‘적층의 산물’이라고 말해볼까 한다.
 
문학이 적층의 산물이라고 하자면, 그 안에 이중의 적층구조가 존재함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건 예술로서의 적층과 사회에서의 적층이라고 거칠게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쉽게 말하자면 작가도 어쨌든 사람인지라 그 시대의 문화적 짐을 짊어진 상태로 글을 쓸 수밖에 없으니 사회라는 적층구조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문학작품 또한 오랜 시간 축적된 형식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으니, 결국 문학이라는 건 이중의 적층구조를 통해 직조된다는 말이다.
 
이건 아마 철학, 미술을 비롯한 다른 용어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우린 문학이든 철학이든 혹은 미술이든, 그것을 배우면서 역사를 함께 배운다. 문학사, 철학사, 미술사는 우리에게 그 안에 얽혀 있는 사회문화적 적층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함께’ 배우고 나서야,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아주 거친 추론이나마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런 식이다. ‘문학이란 이랬다’든지, ‘문학이란 무엇이라고 믿었었다’같이.
 
이런 문답은 문학 안에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배경들이 도려낼 수 없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문학은, 특히 페미니즘, 퀴어, 채식주의와 같은 소수자를 소재로 다루는 문학들은 현실로부터 잉태되어 현실이라는 거친 표피를 찢으며 태어난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찢어낸 현실의 살점, 그로부터 터져 나온 고혈이 잔뜩 묻은 몰골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세월호 문학, 페미니즘 문학에는 그 시작점에서부터 필연적으로 반대되는 의견들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이들을 위협하는 현실이 이들을 잉태하고 길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작품들을 향해 울타리 밖의 타자들을 환대하지 않는다고 일갈하는 건, 이들의 출생 맥락을 삭제함으로써 역으로 현실의 일부를 도려내는 행위나 다름없다.
 
거듭 말하자면, 작가는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제 아무리 미래의 이야기를 써낸다고 해도, 거기에는 무의식적으로나마 현실의 적층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걸 읽어내는 것이 평론가의 몫이다. 그걸 읽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거기에 ‘거친 현실’이 도려내져 있다고 말하는 건 평론가의 불성실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다. 설령 누군가 그런 현실을 의도적으로 도려낸 작품을 써냈다면, 도려낸 흔적은 그 자체로 도려내진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알려준다. 그러므로 평론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작가가 어떤 현실을 도려냈음을 지적하고 성토하는 일이 아니다. 그걸 ‘왜’ 도려냈는지, 그리고 도려냄으로써 어떤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도려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어야 한다.
 
덧붙이자면 나는 세월호 문학, 페미니즘 문학, 퀴어 문학과 같은 문학들이(이것들이 왜 같은 층위에서 묶이는지는 다소 의문이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이라는 성격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당사자든 아니든, 작가가 그것을 써내려갈 때, 우리는 모두 증언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가령 무라까미 하루끼의 『언더그라운드』에서 고백하는 이들도 생존한 증언자들이고, 그것들을 받아 적고 묶어낸 하루끼 또한 생존한 증언자의 위치가 된다. 나는 비평하는 작업 또한 생존자의 증언을 증언하는 행위라는 점을 평론가들이 자각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세월호 사건은 일어난 지 이제야 3년 남짓이고,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 문단의 화두가 된 건 길어야 2년 남짓이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문학은 여전히 무수히 많은 협박과 폭력을 대면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향해 “신자유주의의 기율을 내면화한 자폐적 주체”라거나 “더럽고 지저분한 충돌의 과정”을 더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만인 건, 그런 주장이 일상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실질적인 폭력들을 모두 은폐시킨다는 점이다. 이은지는 이 작품들이 현실을 도려냈다고 말하지만, 기실 현실을 도려내고 있는 건 해당 작품을 규정짓고 그것을 단일한 실체로 사유하길 욕망하는 평론가 자신인 것은 아닐까?
 

비평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을까?

 
글쎄. 이건 아마 내가 반골이라서, 안 팔리는 인디밴드의 멤버라서, 비평적 선취를 이루고 싶은 욕망이 살아 있는 평론가(조만간)라서 그런 거겠지만, 나는 우리가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군지도 말할 수 있다. 그건 우릴 정의하려는 사람들이다. 아니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늘 정의하려는 꿍꿍이를 가진 사람이다. 그들은 늘 정의 내림으로써 적을 만들어내고, 무언가를 배제시키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다. 기실 그들이야말로 촛불집회에서 금속노조를, 전국노동자연합을 쫓아낸 자들이다.
 
그러니 정말 물어야 하는 건,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비평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 그리고 ‘비평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적확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가 등단을 못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아니 약간은 그렇다. 적어도 나는 내가 몸담을 직업군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집단이었으면 좋겠고, 그걸 계속 갱신해나갈 수 있는 집단이었으면 좋겠다. 부디 문학이든 정치적 올바름이든 어떤 용어를 단일한 실체로 규정하고자 하는 집단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 까닭에,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질문이 작품의 해석에 대한 정치적 책임까지도 작가에게 전가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메타적 입장에서 대상을 단일한 실체로 규정하며 성토하려 하는가. 오히려 평론가들이야말로 ‘더럽고 지저분한 충돌의 과정’을 더욱 경험하며 나뒹굴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 지금의 문단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어떤 실체가 되어 횡횡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평론가의 잘못이다. 평론가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해서다. 특정 텍스트가 성역화 되는 문제에서부터 비평의 전개가 인물의 윤리적 태도로 소급되는 근래의 경향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비평은 갈수록 전형화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의 비평 지형이 꽤나 비겁했고, 또 게을렀던 건 아닌지 묻고 싶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은지의 문제 제기에 동의한다. 문단이 갈수록 경직되어가고, 트렌드처럼 소수자 문학을 소비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향후의 문학에서도 이것이 적층되어 남을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과연 구조가 바뀔 수 있을까 하고 염려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가 이은지에게‘도’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겨우 한 사람의 사례를 들어 채식주의자를 정의하려 하는 것이 불편하고, 리어 키스의 일방적인 주장을 사실인 것 마냥 정의하려 하는 것이 불편하고, 페미니즘 문학이 페미니즘을 모르는 문학을 도려낸다고 정의하려 하는 것이 불편하고, 소수자들이 자신들을 환대하지 않는 세계를 거세하려 한다고 정의하려 하는 것이 불편하다.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에게 왜 당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계를 거세하려 하느냐고 일갈하는 것이 불편하고, 생존자들에게 자꾸 트라우마를 상기하고 대면하라고 일갈하는 게 몹시도 불편하고, 적층이라는 맥락을 잘라낸 채 대상들을 단일한 실체인 것처럼 정의하려 하는 것이 불편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은지에게 되묻고 싶다. 과연 현실을 도려내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 비평이라는 행위가 오히려 현실 안에 울타리를 만들고, 그에 반하는 사실들을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말할 수 없다. 왜냐면 나는 아직 등단을 못했으니까. 등단 못한 이는 없는 세계가 문단이니까.
 

 
임지훈
평론가 지망생. 밴드 ‘넌 아만다’의 드러머. 앨범이 안 팔려서 마음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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