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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왜 네 마음대로?:자기결정권 침해로서의 성폭력

김태권
2017년 04월 14일

성폭력은 나쁜 짓, 그런데 왜?

 
후세페 데 리베라 「익시온」
 
거대한 바퀴에 거꾸로 묶인 사내. 얼굴은 뵈지 않지만 뒤틀린 몸만 봐도 알겠다, 얼마나 괴로운지. 왼쪽에 숨어 사슬을 잡은 자는 형리인가. 비웃는 얼굴로 사내를 굽어본다. 뾰족한 귀를 보니 평범한 옥졸은 아니다. 이곳은 지옥. 사내는 영원한 벌을 받는 중이다.
 
후세페 데 리베라(Jusepe de Ribera)가 그린 「익시온」(Ixiōn). 리베라는 에스파냐 바로크의 대가다. 바로크회화의 특징은 한마디로 ‘강렬함’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빛의 효과가 강렬하다. 화면은 시커멓고 아주 일부에만 센 빛을 쳤다. 구도도 강렬하다. 사내의 몸이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른다. 긴장이 화면에 가득하다.

익시온은 그리스신화의 악당으로 유명하다. 하고많은 죄를 짓고도 멀쩡했는데, 죄 하나가 정말 컸다. 신들의 여왕, 헤라(Hera) 여신을 겁탈하려 든 것이다. 헤라의 남편 제우스(Zeus)는 헤라와 똑같이 생긴 구름을 익시온 곁에 두었고, 익시온은 구름을 덮쳤다. 제우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익시온을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그러고는 지옥의 가장 끔찍한 곳으로 보냈다. 영원히 쉬지 않고 돌아가는 바퀴에 묶었다. 익시온은 아마 지금도 돌고 있을 것이다.
 
익시온은 벌받아 마땅하다. 성폭력은 나쁜 짓이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자. 성폭력은 왜 나쁠까. 인간 주제에 여신을 덮치려 한 것이 죄라면, 인간을 덮치면 덜 나쁜가? 아니다. 옛날에는 여성의 정조를 침해하기 때문에 성폭력은 나쁘다 했다. 그럼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덜 나쁜가? 요즘은 먹히지 않는 소리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다. 인간은 자기 일을 자기가 결정할 자유가 있다. 이것이 바로 자기결정권. 성폭력은 성적인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 그래서 나쁘다.
 
 

침해당한 것은 정조인가, 자기결정권인가?

 
「삼강행실도」 중 ‘최씨분매’
 
조선 세종(世宗) 때 목판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그림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전달할 내용은 모두 들어간, 소박한 느낌의 목판화다. 그 가운데 ‘최씨분매(崔氏奮罵)’편. 최씨가 화를 내며 꾸짖는다는 뜻이다. 
 
최씨가 살던 진주에 왜적이 쳐들어왔다. 그림 아래쪽은 왜적이 마을을 노략질하는 장면이다. 최씨는 산으로 달아났는데, 왜적이 쫓아왔다. 최씨를 겁탈하기 위해 남자들이 칼을 꺼내 위협했다. 최씨는 거세게 저항했다. “차라리 죽겠다”며 꾸짖었다. 결국 남자들은 최씨를 살해했다. 그림 위쪽에 최씨가 피살되는 장면이 있다.
 
성폭력은 나쁘다. 옛날 일이지만 최씨를 겁탈하려다 살해한 남자들은 참 나쁘다. 그런데 「삼강행실도」가 이 에피소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수상하다.
 
‘최씨분매’ 에피소드는 「삼강행실도」의 ‘열녀도’ 섹션에 실렸다. ‘열녀도’에는 ‘영녀정절(寗女貞節)’, 중국 명나라 영씨의 이야기도 있다. 영씨 나이 열여섯에, 결혼하기로 했던 남자가 죽었다. 영씨는 “아직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집 며느리가 되기로 약속한 몸이니, 그 집에 들어가 시부모를 모시겠다”고 선언했다. (어이없어하는 친부모를 뒤로하고) 시댁 아닌 시댁에 들어가 52년 동안 베를 짜서 봉양했다고 한다. 조선남자들은 조선여성도 영씨를 본받아야 한다며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뿌렸다. 나는 모르겠다, 저게 본받을 일인지.
 
‘영녀정절’ 같은 이야기와 엮이며 ‘최씨분매’의 주제는 변질된다. 「삼강행실도」의 관점으로 볼 때, 왜적은 왜 나쁜가. ‘여성’ 최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유부녀’ 최씨의 정조를 침해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성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정조를 지킨 여인인 ‘열녀’로 칭송된다. 아휴, 지나치게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다.
 
 

수산나를 바라보는 두가지 시선

 
렘브란트 판 레인 「수산나」
 
정원에서 미역을 감으려던 참인가보다. 옷과 신을 곱게 벗어두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사나이가 나타났다. 잘 차려입은 걸 보니 점잖은 양반 같은데, 대체 무얼 하는 건가. 여성은 겁에 질렸다. 참 고약한 상황이다.
 
다시 작품을 보자. 배경은 물가. 맨살을 드러낸 여성 곁에서 잘 차려입은 남자 두명이 걸근대는 그림이다. ‘수산나(Susanna)의 목욕’이라는 장면으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도상이다. 출전은 「다니엘」(Daniel). (가톨릭에서는 『구약성서』로 들어가고, 개신교에서는 내용의 일부를 『외경』으로 따로 뺐다.) 수산나는 바빌론(Babylon)의 부잣집 사모님인데, 정원에서 목욕을 하려는데 갑자기 정원에 숨어 있던 두 사내가 달려들었단다.
 
두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성관계를 강요했다. “자, 정원의 문은 닫혔고 우리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 만일 거절하면 부인이 젊은 청년과 정을 통하려고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다니엘」 13장 20~21절) 수산나는 원치 않았다. 꺄악 소리를 질러 하인들을 불렀다.
 
그런데 두 남자는 재판관이었다. 당대에 존경받던 장로였다. 둘이서 말을 맞춰 증언하면, 없던 ‘젊은 청년’도 있는 사람이 된다. 반면 수산나는 혼자다. 게다가 사회적 약자인 젊은 여성이기도 하다. 눈에 익은 상황이라 속상하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성폭력은 성적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욕구의 문제라고 한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힘으로 덮치고 자기 말을 듣게 만들려는 짓이라는 것이다.
 
앞의 작품은 렘브란트가 그린 「수산나」다.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은 잘 아는 것처럼 네덜란드 바로크의 대가다. 거무죽죽한 화면에 두텁게 물감을 올려 반짝반짝 빛나는 효과를 냈다. 렘브란트가 그린 인물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 수산나도 눈이 반짝인다. “나는 억울하다, 나를 위해 증언해달라”며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다.
 
구에르치노 「수산나」
 
옛날 그림은 대개 남자들 보라고 그렸다. 부유한 남자들이 그림 값을 내니까. 그러다보니 남성의 시선이 반영된 작품이 많다. 「수산나」도 마찬가지. 수많은 작품이 남았지만, 렘브란트 작품처럼 피해자와 눈을 맞추는 작품은 드물다. 렘브란트 그림 속 수산나가 ‘목격자인 당신이 피해자인 나를 도와달라’며 간절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남자들은 영 부담스러웠나보다.
 
대부분은 껄떡거리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수산나는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 하지만 같이 자자는 제안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여기서도 여성은 “성녀이자 탕녀”라는 남성 판타지의 대상에 불과하다. ‘부잣집 마나님이 옷을 벗는다. 『성서』도 인정한 미인이니, 함께 훔쳐보자’라고 말하는 듯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이탈리아 화가 구에르치노(Guercino)의 「수산나」. 그림 속에서 수산나는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철저하게 대상화된 피해자로 표현되어 있다. 훔쳐보는 남자들은 얼굴이 드러났다. (흥분하여 시뻘게졌다.) 그림에서 차지하는 면적도 수산나보다 더 크다.
 
장로 한명은 숫제 관객을 마주 본다. “쉿!”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흥미로운 구성이다. 구에르치노는 바로크시대의 화가다. 바로크미술의 특징은 그림이 그림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 ‘작품 속 행위가 관람자의 공간에까지 확장’된다고 한다.
 
미술사를 몰라도 흥미롭다. 가해자 남성이 우리와 한편이다. “쉿! 같이 훔쳐보자고.” 공범은 우리였다. 가해자는 우리였다.
 
『성서』 속 수산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가해자 두사람이 법정에서 거짓증언을 할 때, ‘소년 탐정’ 다니엘이 등장한다. 두 가해자의 진술에서 허점을 찾아내는 다니엘 소년. 수산나는 누명을 벗는다. 어디까지나 『성서』. 현실에는 다니엘도 없고 해피엔딩도 없다.
 
 

유딧, 남자를 죽인 여자

 
카라바조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이번에는 유딧(Judith)의 이야기다. 가톨릭은 『구약성서』, 개신교는 『외경』에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Hebrew) 땅에 적이 쳐들어온다. 장수의 이름은 홀로페르네스(Holofernes). 유딧이 그의 막사로 찾아간다. 홀로페르네스는 유딧을 덮칠 생각에, 파수병을 물리친 채 술을 마신다. 홀로페르네스가 곯아떨어지자 유딧은 큰 칼을 꺼내 그의 목을 끊는다. 장수를 잃은 적군은 물러갈 수밖에.
 
유혹은 달콤하지만 결과는 끔찍하다. 이상한 일이지만, 남자들이 이런 상황을 좋아한다. 또하나의 남성 판타지인 셈이다. 그러나 걸근대다 목이 잘리다니, 남성으로서는 불편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혹이냐 살해냐?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다르다.
 
르네상스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가 유딧의 동상을 피렌체(Firenze)에 세운 적이 있다. 유혹하는 모습은 전혀 없고 두건을 눌러쓴 채 남자의 목을 써는 무서운 유딧이다. 피렌체 남자들은 그 조각을 싫어했다. 위원회를 소집해 “여자가 남자를 죽이는 장면이 상서롭지 못하다”며 「유딧」을 치워버렸다. (그 자리에 남자 중의 남자,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다비드David」를 세웠다.)
 
앞의 작품은 카라바조의 「유딧」이다. 카라바조는 이탈리아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시커먼 화면에 강렬한 한줄기 빛을 던지는 연출로 유명한 작가다.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비.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힌 홀로페르네스의 표정이 돋보인다. 
 
유딧과 홀로페르네스의 대비 또한 강렬하다. 수염이 부숭부숭한 홀로페르네스와 달리, 그림 속 유딧은 앳되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가끔 나오는, 큰 칼을 휘두르는 여고생 전사 같다.) 할머니 하녀와 대비되어, 유딧은 더 소녀처럼 보인다. 『성서』에는 저렇게 어리게 나오지 않는다. ‘약자가 강자를 죽였다’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카라바조가 이번에도 장난을 쳤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달콤한 유혹과 끔찍한 죽음, 남자의 판타지. 카라바조의 「유딧」은 판타지에 충실하면서도, 참혹한 살해 쪽이 더 강조되었다. 아무려나 보기 편한 그림은 아니다. (불편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카라바조만큼 솜씨 좋은 화가는 흔치 않다.)
 
이 작품은 어떤가. 한술 더 뜬다. 유딧은 홀로페르네스를 힘으로 제압했다. 유혹이 아니라 완력으로 살해하는 것 같다. 수행하는 하녀도 젊다. 팔뚝 힘으로 유딧을 거든다. 홀로페르네스는 꼼짝없이 붙들려 목숨을 잃는다. 가축처럼 도살당한다.
 
이탈리아의 바로크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가 그린 「유딧」이다. 카라바조 다음 세대의 작가다. 시커먼 화면과 한줄기 빛을 보면, 카라바조의 영향은 확실하다. 주제도 유딧, 똑같다. 그런데 느낌이 이렇게나 다르다. 어째서?
 
아르테미시아의 개인사를 초들어 설명하곤 한다. 화가 집안의 딸 아르테미시아는 자기도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피렌체 미술학교는 여성을 받지 않았다. 성차별이다. 별수 없이 미술공부를 위해 독선생을 들였다. 그 선생이 나쁜 사람이었다. 아르테미시아를 성폭행했다. 그것도 여러차례. (여성 차별 때문에 성폭행이 일어난 셈.)
 
참다못한 아르테미시아의 폭로. 길고긴 재판 끝에 미술선생은 벌을 받았다. 그러나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성폭행을 증명해야 한다며, 아르테미시아의 신체부위를 남성 재판관들이 들여다보며 조사했다. 도시 전체가 피해자의 인생을 까발렸다. 요즘 말로 하면 전형적인 ‘2차가해’다. 나도 조심스럽다. 그림을 이해한다는 명분으로 피해자의 사생활을 들추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이 그림은 다들 이렇게 설명하니까, 일단은 나도 아르테미시아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여성은 성폭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수산나」
 
성폭력사건에 대한 시선조차, 남성 판타지에서 자유롭지 않다. 「수산나」를 그린 수많은 작품 가운데, ‘2차가해’라 할 만한 그림이 많다. 
 
그렇다면 여성은 성폭력을 어떻게 바라볼까? 또하나의 「수산나」 그림이 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작품이다. 17세 어린 나이에 이렇게 그렸다니 놀랍다. 성폭행을 당하기 전이지만, 피해자 여성의 처지에서 그렸다. 여느 작품과는 다른 특징이다.
 
검은 머리 남자의 매만지는 손길. 흰 머리 남자는 손을 입에 가져간다. “쉿!” 구에르치노와 비슷한 손짓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관객이라는 공범에게 조용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보고 침묵을 지키라는 손짓이다.
 
무섭고 끔찍하다. 남자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후욱, 후욱.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는 것 같다. 싫다. 수산나의 얼굴에 싫다는 빛이 가득하다.
 
수산나는 어디를 보고 있을까. 렘브란트의 작품과는 다르다.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수산나는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 가운데 다니엘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 역시 가해자와 공범이라는 사실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달아날 수 없다. 그림의 구도를 보라. 사회적 지위를 가진 두 남자는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수산나를 짓누르고 있다. 남자들 뒤로는 푸른 하늘이 탁 트였다. 수산나의 등 뒤로 꽉 막힌 벽이 답답하다. 자세도 엉덩이 끝만 겨우 걸쳤을 뿐.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 저 고통스러운 상황에, 수산나는 갇혀버렸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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