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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시겠지만 존중하지는 않습니다

김요섭
2017년 06월 28일

진지충-(취향)-글쓰기



원고청탁 문제로 통화를 했을 때 [문학3] 편집자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키워드3’의 이번 주제가 ‘진지충’과 ‘글쓰기’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나에게 ‘진지충’‘글쓰기’처럼 들렸는데 그만큼 ‘진지충’이라는 신조어의 인상은 강렬했다. 이 신조어는 인터넷 문화에서 타인을 비하하고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대상의 속성에 벌레를 의미하는 충(蟲)을 붙여서 만들어낸 어휘의 일종이다. 사람을 ‘~충’으로 부르는 말은 2000년대 초반 한 연예인을 비하하던 ‘무뇌충’으로 처음 나타났고, 극우사이트 ‘일간베스트’의 사용자들을 ‘일베충’이라고 부르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후 ‘설명충’ ‘맘충’ 등 인터넷에서 흔히 쓰이는 비난의 수사법의 한 종류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진지충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함을 질타하는 방식으로 쓰이기 때문에 진지함을 자기정체성으로 하는 비평가들(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특히 나)에게는 어쩐지 자신이 지목당한 것 같은 당혹감을 느끼는 표현이다. 자연히 편집자가 조심스레 그 단어를 발음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 조심스러운 발화를 어떤 강조처럼 민감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러한 편집자의 조심스러움에 아랑곳 않고 어느 시상식 자리에서 만난 [문학3]의 한 기획위원은 ‘요섭씨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주제로 청탁이 간 것 같지 않느냐’며 농담을 건냈는데, 무어라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진지충을 주제로 청탁받았다는 내 말에 주위의 열에 아홉은 자서전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 기획위원과 같은 반응을 내보였다. 어찌하겠는가, 진지충인 것을.
 
인터넷 상의 신조어 대부분처럼 ‘진지충’은 그 명확한 의미나 용례가 정리되지 않았다. ‘~충’은 혐오표현의 일종으로 여겨지지만 자조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쓰이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지난가을부터 올봄까지 이어진 촛불집회에서 휘날린 시민들의 깃발 중에 강한 동류의식을 느끼게 했던 ‘전국설명충연합회’(‘설명충’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과도하게 상세한 설명을 남발하는 이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다)가 그 한 사례다. 진지충이란 주제에 대해서 자서전을 권유하던 지인들이나 내게 너무 어울리는 주제를 청탁했다는 기획의원도 내게 혐오를 드러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내 정체성의 일부를 과장하는 방식으로 이를 사용했으리라 믿는다. 진지충에서 혐오의 정서를 읽어내는 일은 분명한 혐오의 언어인 ‘맘충’이나 (남성 동성애자를 비하는) ‘똥꼬충’ 같은 표현에 비해서 수월하지 않다. 전자는 대상의 행위인 발화와 상황의 결합을 통해서 사건 속에서 지시되지만 후자는 그들의 사회적, 성적 정체성을 통해서 지시된다. 혐오의 언어는 그것이 상상적으로라도 구축된 대상의 정체성을 지시하지만 진지충은 상황과 행위 속에서 걸쳐 있을 뿐이다. 비평가들이 진지충이라는 표현에 민감함에도 비평가라는 직업/정체성과 ‘진지충’을 함께 묶는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재)생산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의 용법 중에서 ‘진지충’은 지시의 대상보다 지시의 상황을 통해서 그 성격을 설명해야 한다.
 
진지충의 사용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른 ‘~충’들에 비해서 방어적이다. 자신이 던진 농담이나 말에 (발화자가 생각하기에) 과도하게 진지한 반응을 보이는 상대를 진지충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자신의 말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할 때, 진지충이냐는 짜증 섞인 말을 뱉어낸다. 물론 많은 경우 입이 아닌 손가락에서 튕겨져 나오는 짜증들이다. 그들에게 진지충은 자신의 언어를 소비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에 개입하는 불청객이다. 그리고 불청객처럼 자신의 경계를 넘어 들어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타인의 행동을 입방아에 올리는 순간에도 쓰이기는 하겠으나 많은 경우 진지충이라는 호명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오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반작용이다. 자신의 언어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에 대한 말이 있다면, 이를 거부하는 말 역시 있을 법하다. 인터넷 유행어 중에 많은 공감을 얻고 때로는 그 언어를 사용하여 우스꽝스러운 자기변명의 태도를 묘사하는 식으로 이중적으로 쓰이는(인터넷 신조어의 상당수는 이렇게 이중적으로 쓰인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가 그런 표현이다. 일본 오타쿠 문화에서 온 이 신조어는 가치의 우열을 주장하기 어려운 취향을 자기 세계의 경계로 그어놓으며 타인이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폐쇄적인 경계에 취향이라는 사적인 기호를 세워놓는다.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라면 간섭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의 논리 앞에서 진지충은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한 인간일 뿐이다. 이 표현은 진지충에 맞서는 방어적 관용구로써 쓰이고 있다.
 
취향은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취향과 취향의 수용자, 취향문화 사이의 관계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1) 자신의 취향이 형성되는 조건은 그의 사회적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취향이 권장되거나 비판받아야 할 것이라는 평가는 그 사회의 문화적 기준을 따른다. 그러나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는 관용구는 취향을 타인이 간섭할 수 없는, 비사회적인 개인의 영역으로 가두어놓는다. 개인화되고 타인의 간섭을 거부하는 문화 소비를 취향으로 명명한다. 특정한 문화가 곧 개인의 취향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그 문화가 사회적 관계성 위에 놓이는 대신 사적인 소비의 대상으로 물화되어 손에 잡히기 때문이다. 취향은 소비하는 나와 소비되는 그것 사이의 폐쇄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리고 이 자신의 문화 소비, 취향을 비판할 때, 비판자는 진지충이라고 공격받게 된다.
 
평론가 손희정은 인터넷상의 여성혐오 문화가 쾌락의 언어로 소비되는 방식을 비판할 때 “나는 설명충, 진지충, 선비충이 되는 거다.”2)라고 지적하는데 이는 진지충이란 말의 쓰임을 잘 보여준다. 자신의 문화 소비에 개입하고 비판하는 불청객, 진지충의 이미지는 현재의 인터넷 문화에서는 페미니즘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손희정의 경우처럼 인터넷상에서 페미니즘의 의제를 가져와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진지충으로 비난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이며 많은 경우 ‘프로 불편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자신들의 취향 안에서 불편한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발견(혹은 발명)해내는 전문(혹은 의무/직업)화된 특수집단의 형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취향이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여성혐오)을 드러내는 일조차 취향이란 개인의 영역을 무너뜨리려는 공격으로 인식된다. 자기 문화의 인지되지 못한 폭력을 가시화하는 일과 이에 대한 반감이 진지충이란 언어의 사용과 결부되어 있다.
 
취향은 비평의 영역에서도 주요한 화두다. 소영현은 사회의 탈권위화로 인해 비평이 규범적 권위를 상실하고 취향들의 집합이 되는 시대를 맞이했다고 진단한다.3) 이러한 진단은 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탈권위, 탈계몽적인 사회전망과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준거 혹은 권위로서 기능하는 비평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은 비평행위 그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두가 매체에 접속할 수 있게 된 디지털 환경에서 비평은 소수 전문가 영역이 아니라 시민에 의해 수행되는, 비판의 민주화를 맞이했다고 진단한다. 이 비판의 민주화 과정에서 제도로서의 비평, 특히 문학비평은 협소한 취향의 영역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 소영현의 진단이다. 이때 취향은 세계를 읽어내는 역량을 상실한 비평이 수행하는 동질적 문화의 수용 혹은 집적을 의미한다. 즉 취향은 세계와 조우하지 못하는 문화적 폐쇄성 혹은 비평장의 게토화다.
 
소영현이 취향을 폐쇄성으로 설명한 데 반해서 취향을 사회적인 경합의 장으로 읽어내는 이도 있다. 오혜진은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에서 기존의 비평/문학장(그의 표현에 따르면 ‘K문학/비평’)을 “자신의 ‘좋은 취향’을 시민사회의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오늘날 대중독자가 가장 치열하게 수행하는 비평 행위”4)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5) 그는 취향을 사회적 경합의 대상이자 동시에 사회의 공통감각을 구축하는 질료로 파악한다. 취향을 대중/대중지성의 작동으로 읽어내는 오혜진의 논리는 기존의 문학/비평장의 폐쇄성을 비판하는 강력한 논리가 된다. 그가 주장하듯 취향이 사회적 경합의 영역이라면 대중은 새로운 비평적 지평을 구축함으로써 사회를 갱신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6) 그러나 앞서의 관용구가 사용되는 방식이 보여주듯 취향은 탈사회화, 개인화의 논리로도 작동하며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독자들의 압도적 행복”7)이라는 낙관적 전망에 쉬이 동의할 수 없게 한다.
 
우려스럽게도 취향에 대한 소영현의 인식이 현실과 더 맞닿아 있는 듯하다. 취향을 타인이 침해할 수 없는 경계로 만들어내는 수사법이 어떠한 토대 없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취향의 수사학을 구사하는 인터넷 문화는 개인의 사적 취향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취향들에는 폐쇄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혜진이 취향의 경합 속에서 반지성적·반문화적 조류로 지목한 일간베스트나 소라넷8) 같은 취향의 집단은 한국사회의 공통감각의 규제를 피할 수 있는 조건9) 속에서 성장했다. 인터넷의 사용조건은 기존의 사회적 규제가 작동할 수 없는 자율적 공간을 형성했고 이 속에서 취향을 매개로 한 동질적인 접촉이 강화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화의 창구인 인터넷 플랫폼들의 발전 방향도 취향이 동질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을 구성하는 기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튜브(YouTube)와 넷플릭스(Netflix) 같은 인터넷 플랫폼들은 사용자의 관심과 취향을 분석하여 그 취향에 부합하는 동질적인 콘텐츠를 공급한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취향을 영위하려는 개인은 사회의 공통감각을 경유하지 않고도 자신의 취향에 부합되는 복수의 문화적 체험을 얻을 수 있다. 최근에 국내외에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가짜뉴스도 유사한 취향과 세계관을 갖춘 동질적 사용자들을 매개하는 SNS가 정보의 편향을 야기한 결과라는 진단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취향을 매개로한 동질적 접촉은 (문화적) 소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회의 공통감각을 경유하지 않는 이러한 개인화의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진단했듯이 현대사회는 공공의 방식으로 체험되었어야 할 문제들이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하면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사적인 문제와 사적인 해결을 강구하는 담론을 소비한다.10) 개인사와 사적인 관심들이 미디어를 점유함으로써 사적 체험이 공적 체험을 대체한다.11) 오늘날 인터넷 속 개인의 자폐적/동질적 문화는 현대사회의 개인화, 탈사회화의 흐름의 가속화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개인적인 것은 타인이 침해할 수 없는, 폐쇄적인 경계로 인식된다. 극도로 개인화된 경험세계 속에 나를 규제하는 타인은 지극히 낯설고 예외적이며 불쾌한 경험이다. 자신의 취향은 (여성혐오와 같은) 사회적 편견이나 폭력을 재생산하더라도 침해할 수 없고, 개입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진지충이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은 불가침의 영역인 개인의 취향에 개입해오는 낯선 경험에서 오는 당혹감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낯설고 비정상적인 접촉이기 때문이다.
 
앞서 내가 인용한 두명의 평론가들 모두 (문학)비평이 취향의 문제에 결부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나는 부정적인 전망의 손을 들어줬으나 이는 전망일 뿐, 다른 실천을 하고 싶다. (고백하건대) 지난해 상당히 껄끄럽게 읽었던 오혜진의 글을 재독하면서 회의를 품은 것과 고개를 끄덕인 곳들을 일별해두었다. 대중의 취향이 사회의 공통감각을 갱신하려 한다는 낙관적 전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낙관론은 그가 오늘날 가장 치열하고 진취적으로 대중과 함께 사회를 갱신하려는 페미니즘의 조류와 함께한다는 행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반면에 나의 일상은 그가 퇴행적이라고 지목한 (많은 경우 남성적인) 취향과 취향공동체들에 근접해 있으며 그 속에서 극단화되고 게토화되는 정념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점점 다른 말들, 다른 대화의 방식으로 말 걸어오는 일들에 더욱 날카롭게 답한다. 오늘의 나는 진지한 벌레(蟲)지만 내일은 무어라고 불릴지, 어떤 언어들 속에 어떤 형상으로 포획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 역시 웅성거리는 말들 속에서 어떤 징후를 발견하고, 그에 앞서 형성된 역사들을 가시화함으로써 낡고 초라해져가는 우리의 문학과 비평의 장을 갱신하고 싶다. 오혜진은 오늘날 비평가의 역할을 “서로 다른 주체가 온갖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온갖 종류의 새로운 앎과 감수성을 수용하면서, 그것들이 생산적인 방식으로 공동체의 공통감각 형성·갱신에 기여”하는 것12)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지적은 사회의 공통감각을 갱신할 언어를 문학에서 길어올리지 못하고 이론의 과잉으로 질주한 많은 비평을 생각할 때 그 실천을 고민하게 하는 진단이다. 다만 그 새로운 앎과 감수성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접속하지는 않으리라는 비관을 거둘 수 없을 뿐이다.
 
이제 비평은 불청객이다. 타인의 개입을 허용치 않고 자가 증식하는 취향의 곁에 비평의 앉을 자리를 찾기 어렵다. 소영현이 아프게 지적하듯 현재의 비평과 문학제도가 정보와 가이드라인 정도로 전락한 상태13)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내 취향을 매개하는 알고리즘 혹은 또다른 기술적 해결책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비평의 유효성은 취향의 자폐 혹은 자기동일적 연결의 틈사이로 파고드는 불청객이 되는 일을 뻔뻔하게 감내하는 길이라는, 단순한 대안을 생각하게 된다. 점점 나의 언어, 나의 취향에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이들이 낯설고 불편해질 때, 더 적극적으로 그런 일을 감당하는 이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취향의 즐거움을 재미없는 물음과 의문으로 바꾸는 번거로움은 난감하리만큼 진지한 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이다. 피할 수 없다. 어쩌겠는가, 진지충인 것을.
 



1) 허버트 J. 갠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나남 1998, 157면.

2) 손희정 「‘압구정 가슴녀’를 아십니까?」, 『시사인』 2016.7.6.

3) 소영현 「민주화 시대의 비평(2)」, <문학3> 문학웹 2017.2.8.

4)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 2016년 봄호 96면.

5) 그의 표현은 더 신랄한데, 기존의 한국문학/비평장은 도태될 것이며 그렇게 사라진 뒤에 애도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이를 통해 독자의 행복이 가능해지리라는 갑작스러운 낙관론으로 이어진다.

6) 이를 보면 오혜진의 접근은 대중지성의 자율적 역량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강조는 독자에 대한 적극적인 영합을 활력 잃은 한국문학/비평이 취해야 할 갱신의 방안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대중의 지적 활력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 사회를 진전시키는 취향과 퇴보하게 하는 취향을 선별하는 권위적 인식의 주체를 배후에 놓고 있다는 점은 지적해야 한다. 이런 감식안은 대중들의 취향의 경합이 사회적 공통감각으로 승인되는 방식이 실상 어떠한 권위에 의해서 선별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황현경이 ‘가짜독자’(강동호·박인성·오혜진·이우창·황현경 좌담 「우리 세대의 비평」,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6년 가을호 59면)라고 그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한 트위터 사용자의 한국문학 인식을 징후적 독자군으로 선별/포착하는 방식은 대중이 구축한 사회적 공통감각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취향에서 선별된 감각을 사회적으로 기입하려는 것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오혜진의 논리에서 계몽주의적인 시선이 발견된다는 박인성의 우려(같은 글 65면)가 과도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취존(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의 논리 앞에서 모든 문학관과 가치관은 평등하다.”(오혜진, 같은 글 95~96면)고 말하지만 무엇이 발전을 이끌어내는지, 어떤 대중이 징후적인지를 선별하는 시선에 모든 것이 평등하지는 않다.

7) 오혜진, 같은 글 105면.

8) 오혜진, 같은 글 95면.

9) 물론 일간베스트와 소라넷의 사용자들이 갖춘 취향은 한국사회의 산물이다. 일간베스트의 문화에 자리한 지역주의와 반공주의, 소라넷의 여성의 성에 대한 폭력적 소비는 가부장적 남근주의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간베스트는 한국사회의 강력한 민주화 서사와 권위주의적 예의의 관념에서 이탈했고 소라넷은 한국사회의 성적 엄숙주의를 위배했다. 이 두 인터넷 커뮤니티가 등장했을 때 한국 주류사회가 이들을 폐륜, 성적 타락이란 수사를 통해서 인지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0)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강 2009, 49~50면.

11)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책 60면.

12) 「우리 세대의 비평」 97면.

13) 소영현, 앞의 글.



김요섭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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