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SHARE
3

혐오를 ‘진지하게’ 마주하기

박해민
2017년 07월 11일
몇년 전, 대학가의 한 식당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다. 우리는 서로 며칠 후에 있을 민중총궐기 집회 참석 여부를 물으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짝 붙은 옆 테이블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은 남학생 세명이 묘한 웃음을 띠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그중 한명이 말했다. “아 X발, 깍두기가 왜 이렇게 빨개?” 그들에게 빨간 것은 깍두기만이 아니었다. 곧 이어 나온 라면 색깔도, 옆자리에 앉은 나와 내 친구들도 그들에겐 ‘빨간 것’이었다. 빨간 것 타령은 식사 내내 계속됐고, 그들은 끊임없이 키득거렸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화가 났지만 그들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그저 깍두기와 라면 색깔이 빨갛다며 낄낄거리는 그들에게 ‘진지하게’ 화를 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또다른 몇년 전. 당시 나는 대학에서 단과대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단과대 학생회 활동은 마초적·꼰대적 분위기의 소속 학과 선배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는 아주 유용한 핑곗거리였다. 학과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있지도 않은 단과대 학생회 일을 만들어냈다. 그러다가 생각을 고쳐먹은 계기가 생겼다. 어쩌다 참석한 한 학과 술자리에서 한 남자 선배가 나를 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야, 페미니스트 있으니까 말조심해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깔깔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앞으로 학과 술자리 열심히 나와야 하나?’
 
 
 
혐오는 종종 웃음을 동반한다. 누군가의 가치관, 신념, 존재, 정체성 등을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혐오는 혐오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와 위계를 만들어낸다. 이 조롱에 진지하게 반응할 경우 ‘진지충(蟲)’이란 낙인이 되돌아온다. 많은 경우, 진지충이라는 말은 혐오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 혐오가 유희, 재미의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것은 어렵다. 진지충이라는 호명은 그 호명의 대상을 재미라고는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구도에 가두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나는 씩씩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학과 술자리에서 나는 웃으면서도 내 목적(?)을 어느정도는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식당에서 화가 나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진지한’ 문제제기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자각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내 친구들이 그들에게 문제제기를 했다면 아마도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을 것이다. ‘저희는 그냥 깍두기 색깔 말한 건데요?’ 그 상황에서 진지한 문제제기는 그들로 하여금 그저 단체 채팅방에서, 온라인 싸이트에서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고 다시 한번 낄낄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결국 ‘빨갛다’는 말을 또다른 재미로 받아칠 능력이 없었던 나와 친구들은 그저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학과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선배에게 페미니스트 없으면 성희롱·성추행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냐고 따졌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내 말보다는 태도가 입방아에 올랐을 것이고, 학과에서 그에 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 선배의 말을 웃어넘기며 자리에 앉았을 때에만 페미니스트의 문제제기는 ‘수용 가능한 것’이 된다.
 
하지만 매사에 진지하게 따지고 들지 말고, 적당히 웃어넘기며 분위기를 맞추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롱과 인정의 위태로운 경계 속에서 눈치껏 상황을 넘기자는 식의 주장은, 내용의 문제를 표현 방식의 문제로 둔갑시켜버린다. 중요한 것은 재미가 최종심급으로 작동하는 상황1)에서 진지한 고민들은 어떻게 발화되어야 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웃음으로 둔갑한 혐오는 적나라한 혐오보다 빠르게 퍼지며, 혐오를 접했을 때 생기는 즉각적인 거부감을 교묘하게 비껴간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여기서는 글쓰기를 통해 웃음의 얼굴을 한 혐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 글쓰기는 길고 ‘재미없다’는 점에서 혐오의 문법과 다르지만 오히려 이 지점에서 오늘날 혐오의 단면을 성찰하는 효과적인 전략이 되기도 한다. 아래는 가능한 몇몇 방법들과 그에 대한 짤막한 단상이다.
 
 
 
첫번째로는 웃음의 얼굴을 한 혐오를 유희로 대하는 방법이 있다. 메갈리아(이하 메갈)를 한 예로 들 수 있다.2)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이하 일베)는 우리사회에서 수도 없이 문제적인 싸이트로 지적되어왔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을 향한 문제제기를 모두 ‘진지충’이나 ‘씹선비’들이 하는 소리로 만들어버렸다. 벌레와 선비라는 조롱은 그들을 비판하는 자뿐 아니라 재미를 조금이라도 훼손할 기미가 보일 경우 일베 이용자 상호간에도 오간다. 이러한 일종의 ‘원칙’은 일베가 그저 ‘웃긴’ 커뮤니티인데 왜 심각하게 달려드느냐는 식의, 일베를 위한 변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많은 일베 유저들이 메갈에 극도로 분노한 이유 중 하나는 메갈이 자신들의 전유물이었던 재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메갈은 일베가 했던 방식 그대로 일베 유저를 조롱했다. 메갈을 비난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베를 방어했던 논리는 메갈에도 작용한다. ‘그저 웃기 위한 것’이라는 일베를 위한 변명은 메갈을 위한 변명이 될 수도 있다. 재미 뒤에 숨어 있던 남성성이 벌거벗겨진 상황에서 메갈을 ‘남성혐오’로 비난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정체를 시인하는 결과만 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재미라는 공통의 원칙을 가진 두 집단이 마주한 결과는 달랐다. 오히려 이들이 공통의 원칙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결과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각 집단이 자리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말이다. 일베와 메갈을 ‘똑같이’ 문제적인 집단으로 호명할 때, 각 집단을 만들어낸 사회적 궤적과 불평등의 문제는 삭제된다. 메갈로 인해 성찰될 수 있었던 문제들(일상적 젠더 불평등의 경험 등)이 뒤로 밀려버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메갈은 재미에 대한 이중의 책무를 떠안는다. 메갈은 일베뿐 아니라 자신을 일베와 똑같은 집단으로 취급하는 사회와도 싸워야 했다. 즉 권력관계가 동반될 때, 재미에 재미로 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두번째는 진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말하는 방법이다. 이때 필요한 건 재미가 아닌 용기다. 모두가 재밌게, 당연하게 여기는 무언가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흥’을 깨는 용기가 필요하다. 때때로 흥을 깨는 것의 댓가는 가혹하다.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거나 분위기라고는 알지 못하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종종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나는 한 세미나에서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자들이 모이면 “문제를 앞에 두고도 그 해결은커녕 뒷말을 하는 것에 여념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곧바로 문제제기를 했지만, “왜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에 인격 살인을 하느냐”는 말이 돌아왔다. ‘인격 살인’이라는 명명은 분위기를 깨는 자가 일상적으로 감수해야 할 모욕이다. 먼저 누군가를 ‘죽인’ 것도 그고, ‘상식’의 이름으로 그 살인을 정당화한 것도 그지만, ‘살인’의 오명을 감당해야 했던 것은 진지하게 반응한 나다.
 
정당한 문제제기가 흥을 깨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회성이라곤 없는 꽉 막힌 사람들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사후적인 발화, 행위로밖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제기는 문제 이후에 가능하다. 문제와 문제제기 사이의 시차는 문제제기를 고루한 것으로 만든다. 문제제기가 분위기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은 문제와 문제제기 사이의 시차에서 온다.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복기하는 일은 귀찮고 성가신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제기는 문제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가능하다. 문제적인 상황은 개별적·독립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가능케 하는 더 큰 무언가가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그 생각과 느낌을 가능하게 하고 지속시키는 체제와 구조들 말이다. 하지만 ‘상식’ ‘일반적인 것’ 등이 더 큰 무언가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문제 발생 이전의 문제제기는 다시금 어려워진다. 분위기가 이미 존재하고 모든 것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뒤바뀌지 않는 한은 말이다.
 
 
 
세번째는 혐오를 법적, 제도적으로 제재하는 방법이다. 혐오가 점점 더 중대한 사회문제로 부상하는 요즘, 이를 법·제도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일정 부분 유용한 효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득보다 실이 크다. ‘표현의 자유’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혐오의 내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무엇을 혐오로 판단할 것인지, 그 혐오의 내용은 누구의 입장에서 씌어지는 것인지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혐오를 정당화하는 엉뚱한 효과로 이어진다. 아무리 정교하게 혐오의 내용을 명문화한다고 해도 여기서 벗어나는 혐오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명문화된 내용에서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법을 벗어난 혐오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왜 내 말과 행위를 혐오로 규정하느냐’는 식의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법적, 제도적 제재는 특정한 발언과 행위가 등장한 사회적 맥락을 삭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앞서 언급한 일베와 메갈의 경우에서 법과 제도는 누적된 혐오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로 그 혐오를 비트는 발화와 행위를 기존의 혐오와 똑같이 처벌할 것이다. 즉 사회적 조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법의 ‘정당성’은 법의 집행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허물어버리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법적, 제도적 혐오 제재의 정당성은 사회적 구조가 양산한 폭력을 가려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급한 여러 문제들은 혐오를 법적,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게 한다.
 
 
 
결국 웃음의 얼굴을 한 혐오에 문제제기하는 것이 진지충으로 조롱당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진지한 문제제기를 무마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미’ ‘웃음’ ‘분위기’를 운운할 때 그것이 어떤 효과를 야기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다. 혐오를 웃으며 넘기는 것은 웃음과 유희가 아니라 섬뜩함을 자아내는 공포에 가깝다. 우리는 국어교과서에서 해학과 풍자가 어떤 조건 속에서 행해져왔는지를 지겹도록 배우고 외웠다. 교과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을 해학과 풍자로 말하지 않는다. 해학과 풍자는 기존의 사회질서가 뒤틀릴 때, 약자가 그 뒤틀림에 동일시하며 쾌락을 느끼는 순간 가능해진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강자가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말장난은 유희가 아니라 괴롭힘이고 폭력이다. 그렇게밖에 웃을 수 없는 사정은 딱한 일이지만, 이것이 섬뜩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재미 그 자체보다는 어떤 재미를 추구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웃음의 얼굴을 한 혐오를 가능케 한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으로도 나아간다. 헬조선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의 삶 조건은 개인의 무력함을 혐오를 통해 극복하라고 부추긴다. 진지한 고민은 이 흐름을 끊어내는 단초이다. 약자를 향한 혐오를 웃음을 동반하는 분노로 바꾸고 이것을 어디로 향하게 할지를 고민함으로써 말이다.
 
재미가 최종심급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글쓰기를 매개한 진지충의 개입은 이미 ‘노잼’이지만 노잼의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진지충이 재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의의가 있다. 애초부터 재미의 짝은 진지함일 수밖에 없다. 재미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재미를 둘러싼 상황과 맥락, 사회적 조건과 권력의 문제가 있다. 진지충이 따라붙지 않는 재미는 불명예로 얼룩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진지충을 떨쳐버리고 싶다면, 진지충이 달라붙지 않을 만한 재미를 만들면 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진지충을 떼어내려는 시도 역시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재미를 향한 욕망이 강력한 만큼, 그 재미를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욕망 역시 끈질기다. 뭐든 쉬운 일은 없는 법이다. 심지어 웃는 일에서조차도.

 




1)  윤보라 「김치녀와 벌거벗은 임금님들: 온라인 공간의 여성 혐오」,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현실문화 2015.

2)  이 글은 최근 온라인에서 워마드의 퀴어 혐오를 둘러싼 논쟁이 첨예화되기 이전에 씌어진 글이다. 필자는 메갈의 의의를 분석하는 것이 최근 워마드의 퀴어혐오를 승인하는 효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하지만 이 글이 워마드의 퀴어혐오가 아닌, 일베와 메갈을 ‘똑같이’ 문제적인 집단으로 다루는 것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원고를 수정하지 않았다.





박해민
문화연구자. 게이의 친밀성, 사랑 경험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