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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진지충이 된다

김송희
2017년 08월 01일

진지충-(용기)-글쓰기

 
 
[문학3] 편집자로부터 이번 ‘키워드3’의 주제가 진지충이라는 얘기를 듣고 잠시 내 머릿속에 종이 울렸다. ‘디~잉~’. 진지충이라…… “아니, 아직도 고것에 대해 떠드는 사람이 있당가”(Feat. 「내부자들」 이병헌) 적어도 나와 지인들 사이에서 진지충에 대한 논쟁은 이미 오래전에 정리가 되었고, 나는 그게 사회적으로 합의가 된 사항인 줄로 알고 있었다. 모두가 하하 호호 웃을 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용기있게 말하는 사람을 진지충이라고 손가락질하며“너 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냐”고 힐난하는 사람이야말로 소수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웃음충’이 아닌가,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고 개인이 ‘불편함’을 거리낌 없이 토로하고 그것이 공론화될 수 있어야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나와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아무도 진지함을 찾지 않고 얕은 재미만 찾으면 도대체 진지한 논의와 토론은 언제 하겠는가. 게다가 이 단어에 대한 논쟁 자체가 조금은 때늦은 감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제가 그러하다니 어쩌겠는가. 자, 그리하여 나는 새삼 이 단어에 대해 고민하고 검색을 해보기 시작하였다.
 
나무위키를 비롯(심지어 위키백과에는 진지충에 대한 설명 자체가 없다)하여 각종 기사와 SNS 타임라인들은 진지충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몰지각한 병폐로, 웃자고 하는 말에 과도하게 진지하게 반응해 덤벼드는 것. 상대방은 웃고 즐기자는 측면에서 가벼운 농담을 던졌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까칠하게 받아치거나 정색하여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점에서 눈새와도 비슷한 속성을 공유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볼 수 있는 유형으로 친구, 동료 중에도 이런 사람 하나가 있으면 굉장히 인간관계가 피곤해진다. 게임이나 커뮤니티, 채팅에도 이런 타입이 출몰하면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을 키워 각종 문제거리와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무위키 중] 
 
 
검색은 계속되었다. 진지충이 언급된 가장 최근 기사는 배우 이제훈이 영화 「박열」 관련 인터뷰에서 ‘나도 진지충, 그러나 벗어나고파, 웃기는 사람 되고 싶어’라고 거론한 기사였다. 심지어 ‘네이버 지식iN’에는 “진지충을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라는 다급한 도움의 요청까지 있었다. 진지충인 게 싫어서 고민이 될 정도라니! 진지충이란 여전히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재미없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매사에 진지해 어울리기 싫은 사람들로 분류되는 것이 사회 분위기로구나. 미안하다! 나야말로 뇌피셜(자기 혼자만의 생각을 공식적인 사실로 믿고 주장하는 행위의 신조어)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지충을 설명하는 다수의 글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이 ‘씹선비’ ‘프로불편러’라는 단어들이었다. 유의어처럼 보이긴 하지만 약간씩 다른 세 단어들이 맥락의 차별성 없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었다. 만약 “진지충, 씹선비, 프로불편러의 차이점을 설명하라”라는 논술 문제가 나온다면 어떻게 답변하겠는가. 누군가 위키백과에 “진지충은 웃자고 하는 말에 진지하게 대응해 분위기를 망치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 씹선비는 어떤 주제로 다 함께 대화할 때 혼자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처럼 타인을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 프로불편러는 사안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대응해 사사건건 불편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면 그게 그 단어들의 정의이자 각각의 사용처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저 정의들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부정적인’ 가치판단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제 와 ‘진지충이 뭐 어때서 그래, 모두 문제를 의식하지 못할 때 예민하게 문제를 지적하는 진지충이 있어야 개개인이 보호받는 사회가 되지.’라고 주창해봤자 진지충, 씹선비, 프로불편러라는 단어들은 태생자체가 비판적인 견해를 내재한 채 조합된 단어들이다. 벌레를 칭하는 충, 욕이 들어간 씹이 단어에 들어 있는 것부터 그렇다. 지칭 대상을 비난하기 위해 탄생한 단어들이 ‘좋은 의미’로 재정의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예를 들어보자. 친구들이 함께 모여 영화 「군함도」를 봤다. 관람이 끝난 후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A: 류승완 감독 역시 대단해. 상업영화로 재미 하나는 확실히 있더라. B: 응, 재미있었어. 나 마지막엔 울었잖아. ‘국뽕’ 영화면 어쩌나 했는데 잘 만든 것 같아. C: 영화 소재 선택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니야?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상업영화의 소재로 사용하다니. 위안부를 다루는 방식도 그렇고 난 너무 불편했어. 그리고 위안부는 어쨌든 처절한 희생자인데, 그들을 주체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건 알겠지만 자칫 현대에 와서 바라본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당시 관계는 다른데 너무 현대적 관점으로 그린 것 같아. A와 B: (절레절레) 프로불편러 나셨네. 야, 영화는 영화로 봐야지. C: 그런 어려운 상황에 황정민 캐릭터는 왜 그렇게 자꾸 개그를 치는 건데? 아무리 상업영화라고 해도 군함도에 딸이랑 끌려간 피해자 캐릭터를 너무 가볍게 다룬 거 아니야? A와 B: (절레절레) 진지충 나셨네. 야, 그럼 내내 울고 짜기만 하면 영화를 무슨 재미로 보냐.
 
자, 여기에서 A와 B는 C를 프로불편러와 진지충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같은 영화를 보고 다른 견해를 말한 것이 왜 프로불편러와 진지충이 되어야 하는가. 이처럼 영화를 보고 리뷰를 서로 공유할 때뿐 아니라 친구들끼리 대화를 이어나갈 때에도 약자나 특수집단에 대한 비하가 개그의 소재로 활용될 때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진지충’이라고 지적받기 쉽다.
 
 
사실 나는 진지충이 되고 싶어도 못되는 족속이었다. 다수가 웃고 넘어가는 사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실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말을 함으로써 분명 분위기는 싸아- 해질 텐데 뒷감당은 또 어쩌나. 좌심방우심실이 콩알만 한 소시민은 절대 진지충이 될 수 없다. 소싯적부터 눈칫밥 먹으며 자란데다 막내 아니면 계약직 인턴을 전전하다보니 눈치만 더욱 빤해졌다. 약자와 을의 위치에 있을수록 목소리를 내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인턴이 감히 분위기 흐리는 소리를? 하아,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또한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은 절대 진지충이 될 수 없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하는 순간 발화 시점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지충을 손가락질하는 측에 속해 있었다. ‘이것이 사회생활’이라고 정신승리하며 억압에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특히 나는 낯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아무말대잔치’를 개최하고 만다. 초면인 사람들 앞에서 분위기를 타개해보겠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다가 ‘쟤 푼수 같다’고 오해받기를 여러번. 그러지 말자고 되뇌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일종의 ‘진행병’이 있는 셈인데, 그 진행이라는 것이 유재석보다는 김구라 스타일에 가까워서 더 문제다. 웃기고 싶다는 강박까지 더해져 잘 모르는 사람의 외모를 비하하는 말실수를 한다. 모임에서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초면인 남성에게 “신화 팬클럽이세요? 주황 겅쥬다!”라고 지껄인 적도 있다. 그러면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는다. 다행히 주황 겅쥬로 지목된 분은 ‘신화 팬클럽과 주황 티셔츠’ 사이의 연관관계를 모르셔서 그냥 웃음으로 무마해주셨다. 만약 그 자리에 진지충이 있었다면 “초면에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신화 팬클럽만 주황 티셔츠를 입나요? 그리고 남성분에게 공주라니요. 너무하시네요.”라고 지적당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진지한 용자가 안 계셨던 것이 참 다행이다. 말하다보니 거참 비호감이다. 아직까지 총 안 맞고 살아있는 게 용하다. 대한민국이 총기 소지 불법 국가라서 다행이다.
 
사실 모두가 낯선 상황에서 굳이 내가 ‘진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나는 굳이 나서서 어색한 분위기를 탈피하려 한다. 기자 일을 하면서 진행하는 게 버릇이 되어 다수에게 자꾸 질문을 던지거나 분위기 해소용 자기 비하 개그를 하곤 한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까지는 이런 나의 우스운 면모를 다들 좋아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분위기메이커’라고 오해하고 잘못된 버릇을 고칠 생각조차 못하고 있던 내게 경종을 울려준 것은 진지충 친구였다. 다수에게 진지충이라고 지적받던 그 친구는 내 볼을 붙잡고 물었다. “실례가 되는 그런 말을 왜 해? 너 왜 모르는 사람들만 있으면 오버해?” 그녀의 진지한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빨개졌다. 아, 그러게. 나 왜 그러지? 나 왜 낯선 사람이 있으면 안해도 될 소리를 하게 되지? 진지충 친구는 친한 친구에게도 뼈있는 비판을 해주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나는 가끔 지나치게 ‘오버’할 때 그 친구를 떠올리며 자중하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진지충으로 거듭나기 위해 용기를 내기로 했다. 첫 실험은 첫 직장에서 만났던 팀장님. 사회 초년생일 때 팀장 대 막내 기자로 만났던 그녀와 나의 권력관계는 명확했다. 그녀는 나를 ‘못난이’라고 부르며 나름의 애정을 표시했다. 귀여워하며 ‘못난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는데, 이어지는 레퍼토리는 “연애 좀 하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실없이 웃으며 ‘연애를 하고 싶으니 제발 소개 좀 시켜달라고 농을 치는 귀여운 막내캐릭터’를 연기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관계 맺어진 우리의 역할 놀이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사실 어릴 때에도 그녀가 ‘못난이’라고 부르며 살을 빼라고 하거나 ‘왜 00는 연애를 못하니?’라고 장난을 치면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이의 대화 소재로 자리매김되면서 ‘그만하시라’고 못한 채로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오랜만에 메신저로 연락을 취한 나에게 또 그 대화를 이어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또 ‘에헤헤헤~ 그러게요. 왜 저는 연애를 못하고 있을까요.’라고 웃으며 넘어갔을 터인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문자로 ‘버럭’ 하고 말았다. “그만 좀 하세요. 저 연애 안하는 지금 상태가 편하고, 연애 특별히 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나의 이런 반응에 당황한 그녀는 “니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부터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증거”라고 대답했고 여기에 나는 “아니요, 저한테 연애 좀 하라고 하는 사람 팀장님밖에 없고 자꾸 그러시는 게 제게는 폭력이에요.”라고 질러버렸다. 직후 우리 사이엔 잠깐의 공백이 있었고 나는 바로 후회했다. 아뿔싸, 참을걸. 어렵게 이어온 관계가 망가지게 왜 속마음을 드러내고 말았을까. 평소 같은 농담 패턴에 ‘폭력’까지 운운한 내가 진지충으로 보일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녀는 ‘아, 미안해.’라고 답했고 우리는 다시 다른 소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용기를 내어 ‘진지충’이 되어도 좋다. 진지하게 굴어서 끊어질 관계라면 그냥 끊어내도 좋으며 내가 불편한 지점을 발화했다 하여 ‘에이~~진지충이래여~’라고 놀리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라면 그냥 박차고 일어나도 괜찮다. 그런 관계를 이어가봤자 계속 사회적 억압에 익숙해질 뿐이고 나 역시 타인의 지적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꼰대가 되어갈 뿐이다. 진지충-프로불편러-씹선비-꼰대, 이 말들을 가르는 맥락은 더 세밀해져야 하며 올바른 자기 생각과 불편함을 지적하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는 달리 생겨야 할 것이다. 여기에 여러분들의 추천을 받아보고 싶다. ‘진지충’을 대신할 긍정적 의미의 단어를 추천해달라. 용자, 용사님, 바른말쟁이, 진지신, 진지먹고맴맴…… 네, 여러분 저는 또 아무말대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더 어색해지기 전에 이쯤에서 줄여야겠다.





김송희
『캠퍼스 씨네21』 기자. 『미운 청년 새끼』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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