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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이, 쓸데없이, 존재할 권리

서영인
2018년 01월 30일

 

  

※'키워드3' 네번째 주제는 '예술-(   )-기본소득'입니다. 댓글과 투고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독자 중 한분을 선정해 신간 『불편한 미술관』을 선물로 드립니다.
    투고하실 분은 이메일 munhak3@munhak3.com으로 A4 3장 이내의 완성된 글을 보내주세요.
    선별하여 문학웹에 업로드하고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예술과 기본소득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기다립니다.


예술-기본소득-(공공성의 상상력)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그녀가 물었다.
“누구요? 저요?”
“예.”
“안합니다…… 저는 퇴직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좌중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루진』
 
 
1. 투르게네프의 『루진』을 읽다가
 
학생들과 『루진』을 읽었다. 특별히 러시아 문학에 조예가 있어 선택한 작품은 아니었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과목이었는데, 러시아 문학을 하나쯤 같이 읽고 싶기는 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알 만한 러시아 문학들은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처럼 길고도 길어 끝없이 장대했고, 그나마 1~2주의 준비기간 내에 읽을 만한 작품이다 싶어 고른 것이 『루진』이었다. 독후감을 나누는 과정에서 ‘루진’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특히 사랑을 고백한 다음 날, 어머니의 반대를 전하는 나딸리야에게 침통하게 이별을 고하는 우유부단에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질색했다. 강의실은 순식간에 ‘고구마 백개ㅋㅋㅋ’의 분위기가 되었다. 교과서적으로 현실적 실천력이 결여된 이상주의의 한계라든가 하는 주제로 이어졌을 법한 대목에서 나는 돌연 ‘루진’을 좀 편들고 싶어졌다. 글쎄, 나딸리야의 불타는 눈길에 대답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장원을 뛰쳐나갔다든가, 혹은 특유의 달변과 현학으로 나딸리야의 어머니 다리야 미하일로브나를 설득했다면 좀 달라졌을라나. 아마도 ‘루진’이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 범주 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라고 묻는 다리야 미하일로브나에게 “안합니다…… 저는 퇴직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부터 ‘루진’은 그가 방문한 세계에 속할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그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존재였다. 어떤 일이라니? 몇몇의 지주들로 이루어진 그 마을의 체계에서 인정받는 일이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관리하거나, 아니면 그 지주들의 체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가정교사이거나 유모이거나 집사이거나 식객 같은) 일만이 직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루진’이 “안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체계 안에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루진’이 전하는 새로운 말에 매혹된 나딸리야와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다리야가 주도하는 지주들의 체계 안에서 전혀 용납될 수 없는 이 사랑을 목격한 순간 ‘루진’은 그 체계 바깥으로 튕겨져 나와 ‘잉여’가 되었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복도 부정도 불가능한 체계 앞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이 된 자신을 갑자기 알아버린 ‘루진’의 무력감과 당혹감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루진’이 ‘루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말하려면 어떤 이야기가 더 필요할까.
 
 
2. 예술가를 향한 적의를 목격하다
 
‘루진’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고 정하고 나서도 마감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전전긍긍하던 중에 포털에서 짧은 기사를 하나 읽었다. 프랑스의 예술가 지원 체계에 대한 기사1)였다. 기사는 너무 간략했고, 그래서 프랑스의 예술지원제도인 ‘앵떼르미땅’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불가능했다.2) 기사의 성실성과 무관하게, 제도를 생각하기 이전에, 무수한 댓글에 깔린 적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같은 선진국과 당장 먹고 살 것 없는 사람이 허다한 이 나라가 비교가 되냐’ ‘프랑스는 세금을 많이 낸다. 증세는 싫다면서 복지만 챙기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내 피 같은 돈으로 낸 세금인데 예술가들에게 퍼주라는 이야기냐’ ‘예술가는 누가 정하는데? 공짜라고 너도나도 예술가 하겠다고 달려들겠지’ 무상급식이나 보육수당 같은 기초 복지에 관한 의제에서 흔히 등장하는 반론들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보태진 것은 예술가들에 대한 적의이다. 댓글의 문맥에는 ‘배고픈 예술가’이지만 ‘저 좋아서 하는 일’이며, 예술가들을 위한 복지는 ‘국민의 세금으로 베푸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거기에는 세금으로 그들을 구제하는 것은 일종의 시혜이며, 시혜를 베풀면 그만큼 돌려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그것은 예술가든 누구든 선택한 일에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논리, 공짜는 없으므로 받은 만큼 갚아야 한다는 교환 논리가 전제된 것이다.
 
사실 나는 이러한 적의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원고는 좀처럼 진전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반박이나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체감의 문제, 예술의 공공성을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상 그 공공성을 체감할 수 없는 시스템 하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예컨대 예술인 단체나 국가기관으로부터 받는 충분하지 않은 예술인 지원이 그렇다. 접수를 하고 계획서를 내고, 심사를 받고 지원 대상자로 결정되는 과정은 사실상 경쟁의 과정이며, 그런 지원을 통해 예술을 하는 일 자체가 각자도생의 범위에 속한다. 지원을 받았으므로 성과를 내놓아야 하며, 유형의 결과물을 산출해서 스스로의 유용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예술가는 어떤 공공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남보다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증명을 해야 하고, 받은 만큼 돌려줄 몫을 상정하는 예술은 경쟁과 차익계산의 시스템 내부에서 그것을 강화시킨다. 누구보다 나은 성과인지, 받은 것을 어디에 돌려줄 것인지를 묻기 전에 우선 이익과 성과를 주장해야 하는 시스템을 받아들일 때, 블랙리스트 같은 웃지 못할 자격심사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 의심해볼 수도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몇몇 예술가에게 존경을 표할 수는 있으나, 예술 전체에 대해서는 적의가 만연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 적의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 예술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쉽지가 않다. ‘일,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혹은,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일입니다,라든가.
 
 
3. 예술하는 인간으로 존재할 자격과 권
 
반대의 상상을 해보자. 내 것이 누구의 것보다 낫다고 증명할 필요가 없고, 내가 받은 것을 정해진 기한 내에 굳이 토해낼 필요가 없는 세계, 그런 곳에서 예술은 어떻게 존재할까. 경쟁은 이미 시장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고, 투자한 만큼 얻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열일’ 하고 있다. 예술‘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나의 노동이 얼마나 잘 계산된 세계 안에 있는지 나는 잘 안다. 원고료든 강의료든, 내가 쓴 원고만큼 내가 강의한 시간만큼 조금의 오차 없이 그 댓가가 계산되는 세계에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왔다. 팔리지 않는 문학에 대한 구박과 동정도, 도무지 생산성이 증명되지 않는 문학에 대한 애매한 묵인도 잘 견디면서 살아왔다. 그래도 사실상 원고 매수와 강의시간으로 계산된 (부정기) 임금을 받으면서 나는 늘 손해 보는 기분이다. 어떤 원고는 단숨에 쓰고 어떤 원고는 길고도 긴 시간을 쪼개가면서 애간장을 태우면서 쓴다. 무능과 게으름을 자책하고, 편집자의 노동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죄책감에 감정노동까지 수행하고 있는데, 그래봐야 내 문학은 잘 쳐줘도 매당 만원 짜리의 문학이다. 그게 매당 이만원이 되고 삼만원이 되면 좀 나아질까. 그래도 만족스러울 것 같지는 않다. 더 비싼 댓가를 받는다고 누그러질 수 없는, 그런 식으로 내 노동의 가치가 책정되는 것 자체에 대한 불만, 혹은 우울. 얼마를 받아도 손해 보는 느낌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책정된 내 노동의 가치를 갖고 싶다. 문학예술을 하며 존재하고 있는 나 자체에 대한 인정과 존중. 예술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내가 생산해내는 이윤만큼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의 가치에 대한 인정과 존중. 기본소득이란 생계가 어려운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지구에서 예술가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자격과 권리를 위해 필요하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언어를 밑천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사람일까. 그럼 그 이윤은 누구에게 귀속될까. 작품을 쓴 작가, 혹은 그것을 책이나 다른 상품으로 만든 출판사, 판매상들일까? 그런 식이라면 문학가의 생계는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으로 무슨 공공성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학의 밑천인 언어는 애초부터 문학가 개인의 것이 아니다. 태고부터 이 언어를 사용해온 사람들이 지키고 늘려온 자산이고, 지금도 누구나 사용할 권리와 자격을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공유재이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3)  유형, 무형의 재화들. 산과 들, 바람과 공기 같은 자연, 우리가 먹고사는 기반이 되는 각종 천연자원, 우리가 사용하는 말, 또는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예술작품들. 모두 과거의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인류에 속하는 한, 우리는 여기 이 시점에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공유재를 사용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공유의 개념은 누군가가 자원을 사용할 권리를 독점하고, 거기서 생산된 이윤을 사유화하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공유의 개념이 상실되면서 생겨나는 문제는 단지 부의 독점에 그치지 않는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간의 삶 자체가 사유의 권한과 이익 안에만 매몰되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의 여러 범위가 사라져버린다.
 
문학(예술)이야말로 사라져가는 공유의 개념을 확산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분야다. 언어는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용한다고 닳아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쓰면 쓸수록 세련되어지고 풍부해지며 기발해지고 흥미로워진다. 일상의 대화, SNS의 ‘아무 말’, 네티즌들이 만드는 신조어, 방송의 유행어, 그리고 무수한 시어와 서사들. 나와 대화하는 당신, 이 글을 읽고 공감하거나 욕을 하는 당신, 온갖 말들을 생산하고 퍼뜨리는 누군가들이 모두 이 자산을 불리고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가들은 이 공유의 자산을 가장 알뜰히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또한 그 공유의 자산을 가장 열심히 확장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공유의 자산을 사용하는 사용료를 낸다(세금이다). 그리고 그 공유의 자산을 불리고 가치있게 만드는 일에 대한 존중으로 공동의 이익 중 일부를 배당받는다(기본소득이다).
 
졸역을 거론하기 민망하지만 일본의 인문학자 쿠리하라 야스시(栗原康)의 『학생에게 임금을』(서유재 2016)을 번역한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내용 중 기억에 남는 일화 하나를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시인 말라르메가 영국의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강연했을 때, 산업도시와 대학도시가 공존하는 광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대학은 석탄과 매연으로 더럽혀진 도시의 풍경을 다른 형상으로 전환시키고 그것으로 다른 삶을 시사하는, 일종의 공유재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답게 말라르메는 이 이미지에 바탕으로 하여 ‘문학의 토지기금’이란 것을 구상했다고 한다. 고전이 된 작품 판매의 일부분으로 시인들의 생활을 지원하자고 하는 아이디어였다.4) 공유 자산을 밑천으로 더 많은 공유 자산을 만들어낼 기반을 만든다. 그 혜택은 자산을 공유한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다. 공공성의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4. 기본소득의 상상력
 
해마다 5월이면 종합소득신고를 한다. 근로소득을 제외한 일반 사업소득 신고 기간이다. 국세청 전산망이 안정되기 전에는 직접 소득신고서를 들고 세무서에 갔다. 내 소득신고서는 정말이지 대한민국에서 받을 수 있는 소득의 종류를 총망라한 호화잡다한 신고서이다. 대학 강의료는 근로소득, 원고료는 사업소득, 심사료나 외부 강연료 같은 것은 기타소득으로 분류된다. 소득의 입금주체가 다 다르므로 증명서는 수십장, 5만원짜리 원고료도, 10만원짜리 강연료도 모두 별지로 발급된다. 소득신고를 도와주던 세무서 직원이 수십장의 신고서를 펄럭이다가 잠시 한숨을 쉬고 묻는다. “도대체 뭐하는 분이세요?” 글쎄, 나도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소득의 명목이 쪼개질수록, 나라는 인간도 낱낱이 쪼개진다. 수십장의 신고서를 챙기면서 나는 10만원, 5만원을 합산하는, 낱낱의 사유화된 소득에 집착하는 지질한 인간이 된다. 수십장의 신고서에 기본소득서가 한장 더 포개진다면, 나는 아마도 온갖 일을 하다가 아무 일도 안하는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는 문학하는 인간으로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은 전체로서의 나를 추정하고 전제하면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안정시킨다. 전체로서의 한 인간 자체를 상정할 수 있는 물적 토대. 혼자서 죽도록 일하고 쥐꼬리만 한 사유재산에 전전긍긍하는 인간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 속에 공존한다는 존재감. 나에게 기본소득의 상상력은 그런 것이다.
 
기본소득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책과 제도를 위한 구체적 고민이 더 필요하겠지만 나는 잘 모른다(끝까지 모른 척할 작정이다). 그냥 이런 상상을 해볼 뿐이다.
“(형편이 좋지 않아 약소하지만) 인류 공동의 자산인 언어를 세심하게 활용하고 발굴하며, 잡다하게 분주한 와중에도 틈틈이 놀고 틈틈이 생각하며 매일매일 잉여의 공공자산을 창출하고 있는 당신에게 공동체의 이름으로 이 증명을 드립니다.” 그런 소득증명, 혹은 자격증명을 갖고 싶다. 그것이 어디 문학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겠는가.
 

 


1) 「생계걱정 NO…‘배고픈 예술가’ 없는 프랑스, 비결은…」, SBS뉴스 2017.12.30.

2) 같은 내용에 대한 더욱 상세한 기사는 「‘배고픈 예술가’ 없는 나라, 프랑스」, 경향신문 2017.12.4. 참조. 

3)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21면.

4) 『학생에게 임금을』 236~37면.

 


 

서영인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타인을 읽는 슬픔』 『문학의 불안』, 옮긴 책으로 『학생에게 임금을』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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