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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시 중계)

문학3
2018년 02월 14일
 

3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시를 읽고 같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오늘은 함께 시를 공부하시는 분들을 모셨습니다. 저는 진행에 집중할 예정이니 참가자들께서 편하게 의견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송자현 혹시 괜찮다면 오늘 다룰 작품을 같이 낭독하고 나서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3 아, 네.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돌아가면서 두 작품씩 읽고 시작할까요?

 

(시를 낭독한다.)

 

3 신선한 시작이네요. 색다른 기분으로 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한분씩 작품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을 말씀해주실까요? 낭독해보니 어떠신가요? 자기소개도 부탁드립니다.

 

이희형 안녕하세요? 시를 쓰는 이희형이라고 합니다. 시가 귀로 들어오니까 읽기만 했을 때 질감을 느낄 수 없었던 문장들이 제 속에서 걸리는 게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신재욱 안녕하세요?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라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신재욱이라고 합니다. 김언희의 「The 18th letter」는 눈으로 읽을 때보다 소리 내서 읽으니까 훨씬 좋더라고요.

 

이여경 안녕하세요? 저는 여경이라고 합니다. 간헐적으로 시를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The 18th letter」는 처음 받아 읽었을 때, 분명 눈으로 읽고 있는데 입에 먼저 달라붙는 느낌이 있었어요. 라킴이라는 래퍼에 대해서 모르고 읽었는데 찾아보니 힙합의 대부 같은 뮤지션이라고 하더라고요. 머리보다 몸이 반응하게 되는 힙합 내지는 랩의 정서를 이 시가 이어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뭐랄까 압도적인 리듬이라고 느껴졌어요. 이번에 읽은 시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

 

이희형 시를 흔히 장면을 보여주는 장르라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김언희 시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역시 시는 ‘말’이구나 하는 점이었고요, 힙합과 랩의 느낌이 시에 서려 있는데, 그럼에도 시에 기울어 있잖아요. 시로 읽힐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협곡에서」를 봤을 때는, 이렇게 붙여 쓴 걸 보고 저는 이상(李箱)이 생각나더라고요. 어떤 말을 하고 싶을 때 이목을 끌기 위해 취하는 방식이 ‘형식’이잖아요. 그때 말을 붙여놓는다는 건 읽는 사람이 힘들 수 있지만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뜻도 되잖아요. 그렇게 멀리서 푸념하듯 하는 말투가 이 시의 상황과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송자현 안녕하세요? 고양이들과 함께 겨울을 나고 있는 송자현입니다. 희형씨가 말하는 ‘랩보다 시에 기울어 있다’는 게 어떤 뜻인가요?

 

이희형 그러니까 랩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쏘는’ 거잖아요. 그런데 시에서 그런 방식은 감상적이고 피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데, 처음엔 김언희 시인이 오래 작품을 써온 분이고 해서 이런 새로운 시도를 한 건가 싶었어요. 그런데 읽으면서는 오히려 그런 생각이 사라진 것이, 말의 효과를 내는 문장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어요. 랩에서 어떤 말은 흘려듣게 되기도 하잖아요. 힙합은 잘 모르긴 하지만요.

 

송자현 질문을 드린 이유는 제가 느끼기엔 힙합의 정서가 아니라 태도만을 전략적으로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처음에는 형식이 좀 당혹스러웠어요. 어떤 호흡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사전 정보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각주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검색해 라킴 곡을 들어보기도 했는데 박자 정도를 감각할 수 있었을 뿐 시를 읽는 데 그외의 도움이 되지는 않았어요. 저는 가볍고 빠르게 마치 말을 던지듯이 시가 전개되는 것이 내용의 무게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어요. 여성으로 사는 것에서 비롯하는 어떤 무기력감, 재단당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게 시로 들어오면 너무 무겁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이야기가 될 수 있어서 힙합의 태도를 가지고 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일반적인 형식이었다면 문장 하나하나에 더 오래 머물렀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탁탁 끊어지는 형식을 활용하는 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실 아무거야’라는 걸 전달하는 매우 전략적인 방법 같았어요.

 

이희형 우리가 기존의 작품이나 다른 장르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을 하다보면 좋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둘 중 하나의 장르로 함몰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The 18th letter」은 그런 점이 없어서 재미있습니다.

 

이여경 저는 화자를 여성으로 읽지는 못했어요. 어쩌면 남성에 가깝거나, 성이 없는 존재? 자신의 성 혹은 젠더를 삭제한 채로 무지막지하게 살아가는, 인간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그로떼스끄한 존재가 그려졌어요. 그러나 그 그로떼스끄함이 주는 불쾌가 시를 다 읽었을 때는 저의 불안으로 옮아오는 면이 분명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는 여성의 삶에 대입해서 읽을 만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송자현 만약 화자가 여성이라면, 여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그로떼스끄한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그런 괴물적인 젠더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로 느껴져요. 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어떤 시선으로 재단되는지 계속 보여주면서요.

 

이여경 맞아요. 불안하지만 사실 좋았어요. 지저분하고 폭력적인 세계에 내던져진 처지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은……

 

송자현 이 시는 선동을 하지 않아서 좋은 것 같아요. 독자를 한쪽에만 세워놓고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어떤 처지를 보여주는 정도로 말하고 있어서요.

 

이희형 몸에서 시작하는 시가 마지막에 몸을 떠나버리는 것 같았어요. 한 시인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볼 수 있었는데, 요즘 많이 언급되는 젠더 관점에서도 읽게 됐습니다.

 

이여경 「The 18th letter」도 그렇고 「협곡에서」도 확실히 이상 생각이 많이 나기는 했어요. 형식이나 말투뿐 아니라 뭔가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는 느낌? 그런 불안한 풍경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상이 떠올랐습니다. 두편의 시가 어쩌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체적인 감각으로 육박해온다는 점에서 「협곡에서」보다는 「The 18th letter」가 더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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