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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답을 준비할 것

이선옥
2018년 02월 28일

 

  

※'키워드3' 네번째 주제는 '예술-(   )-기본소득'입니다. 댓글과 투고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독자 중 한분을 선정해 신간 『불편한 미술관』을 선물로 드립니다.
    투고하실 분은 이메일 munhak3@munhak3.com으로 A4 3장 이내의 완성된 글을 보내주세요.
    선별하여 문학웹에 업로드하고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예술과 기본소득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기다립니다.


예술-(질문)-기본소득

 

 
르뽀는 문학이 아니라고?
 
5년 전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시행하는 예술인복지사업에 신청을 했다. 예술활동 증명을 통해 자격을 부여받으면 몇개월 동안 생활자금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르뽀를 쓰는 나는 매체에 발표한 원고와, 연재중인 원고, 연재를 완료한 원고를 하나하나 복사해 파일로 만들어 제출했다. 심의위원회를 거쳐 돌아온 답변은 첫째, 칼럼 형태의 글은 해당이 안되며, 르뽀는 현행제도에서 지원하는 문학장르에 없고, 연재하는 매체가 공인된 순수문학지여야 한다며 반려했다. 시사월간지는 애초 해당되지 않고, 내가 연재한 문학지는 재단에서 인정하는 잡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문학상을 통해 등단이란 걸 했고, 르뽀작가라는 바이라인으로 여러 매체에 기고와 연재를 했지만 나는 문화예술인에 포함될 수 없었다. 질문과 답변을 두어차례 주고받은 후 담당자와 통화를 요청해 르뽀가 문학장르가 아닌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지만, 현행 제도로는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녀도 난감해했지만 일개 담당자의 힘으로 당장 바꿀 수는 없으므로 결국 지원금 신청을 포기했다. 내 노동이 문화예술에 해당한다는 걸 증명하는 노력을 감수할 만큼 액수도 크지 않았다. 르뽀를 문학의 장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싸움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혼자 하기엔 버겁고, 여럿을 모아서 하기엔 번거로웠다. 그럼 그렇지, 나라 돈 먹기가 쉽나… 이런저런 위원회의 까다로운 절차들을 몇번 경험해본 터라 깨끗하게 포기했다.
 
하지만 한정된 재원 안에서 지원대상자를 선정해야 하는 기관의 고충도 이해가 됐다. 제도를 운영해야 하는 쪽에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적용하기 위해 촘촘하게 자격조건을 둘 수밖에 없다. 이를 보완하려면 나처럼 불합리한 지점을 느낀 사람이 제기해서 고쳐야 하는데 개인이 나서기는 어렵다. 나의 게으름과 포기로 여전히 르뽀가 문학장르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후 예술인복지재단에 들어가본 일이 없어 잘 모르겠다. 내게는 그 지원금이 그림의 떡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유용한 소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인은 지금도 이런 제도를 통해 국민의 세금으로 소득 지원을 받고 있다. 기본소득은 이에서 한발, 아니 대폭 더 나아간 요구를 담은 주장이다.
 
 
빈곤 해결: Yes / 예술가 지원: ?
 
어떤 일을 직업으로 택한 이상 생계를 꾸려갈 책임은 일차로 선택자인 자신에게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생계를 꾸릴 수 없을 때 직업을 바꾸거나, 다른 일을 겸하거나 소득에 맞춰 생활방식을 조정한다. 나는 노동문제에 대해 르뽀를 쓰면서 문화예술인의 범주에 들어갔고, 예술인유니온이 결성되었을 때 공동대표를 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나의 빈곤을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노동이 다른 노동보다 특별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별해서, 고귀해서, 더 중요해서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의 노동에 기대어 살고 그 노동은 다 의미있고 소중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돈을 많이 못 벌어도 하고 있는 것일 뿐, 이 사회를 위해 르뽀를 쓰라고 강제한 게 아닌데 내 생계를 위해 동료 시민들의 세금을 써달라고 할 염치는 없다. 나의 소득 일부를 할애해 사회구성원 중 누군가를 지원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빈곤이 개인의 무능이 아닌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원이 필요하다면 다른 직업군의 빈곤자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지원이 필요하다.
 
생활고로 삶을 마감한 문화예술인의 뉴스가 등장할 때 예술인 지원 여론이 지지받는 이유는 예술이 아닌 빈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선에 놓인 예술가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는 일은 빈곤에 대한 국가의 책임 면에서 타당한 요구이고 사회구성원들이 합의한 원칙이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공적인 기여와 공공재로서 특성으로 넘어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문화예술이 공공재의 지위를 가지는지, 국가가 이를 공급할 책임이 발생하는지는 오랜 논쟁거리다. 어떤 이들은 문화예술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문화예술―고급예술과 대중예술로 또다른 논쟁점이 있으나―없이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왜 예술가에 대해 특수한 지원이 필요한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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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에게 어떤 자격조건도 따지지 않고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돈이다. 이는 보편의 복지 개념이면서 강력한 사회보장 정책이다. 특정 직업 영역에서 이를 도입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온 건 예술인이 처음이다(청년이나 노인은 직업이 아닌 세대다).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 ‘보편성’은 특정한 직업인에 한정하는 순간 선별적인 복지가 된다. 선별복지의 기본은 ‘자격심사’다. 예술가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면 첫째, 예술가의 범위를 규정해야 하고, 둘째, 예술가는 빈곤하다는 것과, 빈곤한 직업군 가운데 특히 예술가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기본소득의 재원은 국민의 세금이다. 유독 예술가에게 공적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면 어떤 이유일 때 정당할 수 있을까?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술인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빈곤에 대한 국가의 책임, 공공재로서 문화예술의 특수성, 문화강국을 지향하는 정부의 의지 같은 이유를 예로 든다. 하지만 가난함 속에서 진정한 예술이 나온다는 주장만큼이나, 가난한 예술가에게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빈곤은 많다. 예를 들어 같은 빈곤자인데 아시바를 설치하는 일용직 노동자는 받지 못하는 지원을, 그 무대에 서는 가난한 예술가는 받아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예술 노동이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이라서? 혹은 사회에 유익해서?
 
흔히 문화예술은 고귀함, 영혼의 풍요로움, 세련됨, 풍부함 같은 요소들 때문에 사회에 특수한 기여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밥만으로 살 수 없으며 정신적인 충족감이 보완되어야 보다 가치있는 삶을 누릴 수 있으므로, 국가는 공적 지원을 통해 이를 보장할 책임이 있다는 논리다. 이 주장은 예술과 사회에 대해 본질적이며 논쟁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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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어떤 것이든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는가?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가난한 청년의 노래를 듣는 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재능이 없는 작가 지망생이 계속 그 일에 몰두하도록 생계비를 지원하는 일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예술에 관심이 없고, 그것이 내 삶에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예술가를 위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온당한가? 절대빈곤층에게 식료품을 지원하는 일보다 오페라 공연에 재원을 투여하는 것은 자원의 합리적인 분배인가? 등산을 즐기는 삷보다 오케스트라를 관람하는 삶이 더 가치있다 할 수 있는가? 더 가치있는 삶은 누가 정의하는가? 예술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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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질문과 더불어 구체적인 질문도 등장한다. 예술인 기본소득은 빈곤한 예술가를 지원하자는 것인가, 모든 예술가에게 해당하는 것인가? 고소득의 예술가에게도 기본소득을 추가로 지급할 것인가? 예술가를 규정할 기준은 가지고 있는가? 지원을 위해 예술인의 자격을 부여하는 일은 누가 할 것인가? 예술가를 지원하면 문화예술이 부흥한다는 논리는 입증이 가능한가? 문화강국 프랑스의 예를 드는데, 프랑스의 예술가들처럼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낼 의향은 있는가? 이 정책의 도입에서 예술가 당사자들은 어떤 책임을 전제하고 있는가?
 
다른 영역의 직업인들, 빈곤한 사람들, 세금을 내는 동료 시민들에게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문화예술 바우처(voucher)는 어떨까?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그의 저서 『원리의 문제』 제11장 「자유주의적 국가는 예술을 지원할 수 있는가?」에서 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라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1) 그는 이 주제에서 항상 대두되는 ‘경제적 접근’과 ‘고귀한(lofty) 접근’이라는 두가지 접근방식의 맹점을 제시한다(이 이슈에 관심있는 사람은 읽어보길 권한다).
 
드워킨은 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특정한 전제 위에서만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지원은 문화가 갖는 다양성과 혁신성의 질, 즉 구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야지, 특별히 어느 한 내용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예술에 대한 국가의 보조는 가치판단을 두지 않고(국가가 특정 가치를 강요하고 간섭하는 것이므로) 무차별적인 형태로 주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예술기관에 국가가 직접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화기관에 내는 기부금에 세금 면제를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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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의견에 동의한다. 예술인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구체성을 가진 것인지, 정책적 완성도를 갖췄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기본소득이라는 제도의 근본 정체성과 예술인 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은 초점이 어긋난다. 오히려 문화예술 바우처가 좀더 공정하고 예술의 구조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정책이 아닐까 관심을 가지고 보는 중이다. 국가(지자체)가 다양한 문화예술을 이용할 수 있는 바우처를 일정 금액씩 국민에게 지급한다면 예술의 보호와 부흥을 이룰 수 있다. 또한 예술가에 대한 지원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부작용인, 예술인의 자격을 심사하고 지원 권한을 대행하는 특정 엘리트와 친정부적인 인사들의 부당한 개입과 불공정 시비를 방지할 수 있다. 문화예술 바우처는 예술에 대해 등급을 매기는 일 없이 구성원 각자가 원하는 예술을 접하게 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해당 예술가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식이다. 당장 많은 예산을 할애하지 않아도 도입할 수 있고, 점차 확대해나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오페라를 접하지 않은 사람은 선호를 판단할 여지가 아예 없지만, 접한 후의 누군가에게서는 선호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다양한 영역의 예술을 접한다면 선호 또한 확장될 것이고, 이는 예술에 대한 지원의 명분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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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뽀는 문학이 아니라는 예술인복지재단의 정의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예술가로서 내 노동이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하는지, 한다면 얼마나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 문제를 권리로 요구하는 일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 윤리성에 어긋난다. 예술가로서 나는 아직 위의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떠한가?
 
권리의 보장을 요구하고 주장하는 일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국가에 대해 모든 구성원은 약자고, 약자성을 가진 존재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는 더욱 자신의 책임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요구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주장자 또한 질문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명분과 책임에 대한 질문이 돌아올 때, 이에 대한 답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느냐에 따라, 동료 시민을 설득하고 결국 원하는 권리도 보장받을 수 있다.


* 일부 내용은 필자가 블로그에 게시한 글 「빈곤과 책임, 문화예술가의 경우」에서 재인용하였다.
 

 


1) Ronald Dworkin, A Matter of Princip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5.

 


 

이선옥

르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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