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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일

송민우
2018년 04월 24일

 

  

※ 키워드3 '예술-(   )-기본소득'에 문학평론가 송민우 님께서 투고해주셨습니다.
    투고해주신 송민우 님께 감사드리며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투고하실 분은 이메일 munhak3@munhak3.com으로 A4 3장 이내의 완성된 글을 보내주십시오.
    활발한 토론이 이어지길 기대합
니다.


예술-기본소득-(분배)

 

 
1. 등단이라니, 어쩌려고 대체
 
올해 신춘문예 평론 부문을 통해 덜컥 등단하고 말았다. 나를 두고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민망했다. 내가 이렇게 갑자기 선생님이라고 불려도 좋은지 의문이 들어서 민망했고,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선생님이라 또 민망했다. 나는 선생님이 아니라 ‘신인’ 문학평론가일 뿐이다. 사실 영업사원이 된 것만 같다. 문학평론가가 첫 평론집을 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주 드문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평론집이 많이 팔리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 아무래도 책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순진한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겠다.
 
나는 ‘예술’과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를 접하자마자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술가도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도 밥을 먹어야 하고, 옷을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그래야 산다. 등단을 하고 난 이후 조금 기묘한 경험을 했다. 누군가는 당선 소식을 듣고 축하를 아끼지 않았고, 다른 누군가는 당선 소식을 듣고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당선된 이후 내가 가장 많이 한 일 중 하나는 문화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일이었다. 문학평론 분야에 대한 지원 사업은 소설 부문과 시 부문보다 훨씬 미비한 것 같았다. 신춘문예 소설 부문이나 시 부문으로 등단한 사람들은 ‘신춘문예 당선집’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기라도 하는데, 평론 부문으로 등단한 사람들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책의 형태로 독자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성동혁 시인이 이런 글을 썼다. “출판사는 편당 15만원, 10만원, 혹은 5만원으로 시의 가치를 책정했다.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존칭을 쓰지만 그들이 나의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1) 당시 그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글쓰기를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원고료 책정은 누가 하는 것일까? 최저임금은 해가 바뀔 때마다 오르는데 왜 원고료 책정은 제자리걸음일까?’ 글쓰기가 얼마나 힘들고 지루한 일인지 새삼 강조하고 싶어졌다. 예술가에 대한 적개심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예술가의 가난은 당연하다’는 말이 한국에선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것 같아 화가 난다. ‘예술가에게도 기본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말을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이것은 분배와 구조 문제일 것이다.
 
 
2.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이랑과 김사과의 퍼포먼스
 
나는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작년 초,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가수 이랑이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받았다. 나는 이랑의 팬이라 그 수상 소식을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랑은 그 자리에서 트로피를 경매에 붙였다. 경매를 시작한 가격은 50만원이었고, 낙찰가도 50만원이었다. 그 금액은 이랑이 밝혔듯 자신의 월세액과 같았다. 이랑은, 그해 1월에는 전체 수입으로 42만원을 벌었다고 했고, 2월에는 감사하게도 96만원을 벌었다고 했다. 이랑은 최우수 포크 노래상은 받았지만 상금이 없었기 때문에 트로피를 판 것이다. 이랑은 확실히 위트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슬펐다. 이랑처럼 뛰어난 예술가도 월세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수입 보장이 안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예술가에게 ‘수입’이 보장될 경우 어떤 변화가 오는지를 상세히 쓴 바 있다.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2) 버지니아 울프는 이 ‘픽션’에서 화자 ‘나’에게 매년 500파운드의 수입이 상속되도록 설정해뒀다. 500파운드가 현재 기준으로는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하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정수입에 의해 한 사람의 감정과 태도에 극적인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점이다. 500파운드라는 고정수입이 생기기 전까지 ‘나’의 내부에는 증오와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고정수입이 생긴 이후부터 그것들은 연민과 관용으로 바뀌게 되고, 심지어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3)까지 생긴다. 이 변화가 ‘고작’ 고정수입 하나 때문에 찾아왔다는 점 때문에 나는 또 슬펐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 안에 있는 증오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예전에 처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서,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운 것만 같아 좋았다. 내 내부에 자리 잡은 부정적인 감정과 태도의 원인이 사실은 불안정한 수입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감정과 태도가 왜 생겨났는지 타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인을 알게 됐다 한들 고정수입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은 또 어떻게 찾아야만 할지 몰라 금방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혹시 다른 예술가는 해결책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봤다.
 
나는 오래전 온라인상에서 ‘예술가의 생존권’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을 당시부터 소설가 김사과를 주의 깊게 봐왔다. 김사과의 사회에 대한 관찰과 판단에 대한 신뢰가 컸던 터라 최근에 출간된 소설집 『더 나쁜 쪽으로』(문학동네 2017)를 기대하며 읽었다. 김사과의 이번 소설집은 확실히 이랑처럼 위트 있었다. 그런데, 이랑과 김사과, 이 두 예술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는 유사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소설과 마주했다. “우리에게는 어떤 대항수단도 없다/당신들에게 대적할 아무런 의지가 없다/힘도 없다/항복한다”4) 한면이 채 안되는 이 짧은 소설에서 김사과는 철저한 무력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 짧은 소설에 담긴 ‘항복 퍼포먼스’를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이랑의 트로피 경매도 사실은 위트로 포장된 항복 퍼포먼스였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한국을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위기가 온 건지도 모른다고. 나는 한국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예술가들의 공통감각을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3. 소규모 문학 공동체를 제안함
 
원고 청탁이 들어오지 않으면 백수나 다름없는 나는 불안하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등단 이후 첫해를 잘 보내야 한다고. 그 한 해 동안 내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잊히게 될 것이라고. 주목을 받는 신인과 소외되는 신인이 있다. 등단은 했지만 앞으로도 당연히 경쟁해야만 한다. 모두가 웃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경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신인들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하자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보완되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낮은 원고료도 문제지만 그 원고료조차 받을 기회를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절망스럽다. 더이상 생활이 어려워져선 안 된다.
 
의문이 있다. 문예지는 어떤 기준으로 원고 청탁을 하는 것일까. 모른다. 내게는 객관적 근거라고 할 만한 자료가 없다. 물론 그것과 관련해 들은 얘기는 많다. 그렇다고 해서 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내세울 순 없다. 비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해볼 수 있겠다. 문예지 발간을 위한 재원은 한정적일 것이다. 유명 작가들은 높은 원고료를 받고 문예지에 글을 게재한다. 시장에서 이미 독자들에게 그 상품성을 인정받은 작가들이 왜 반드시 문예지를 통해서 글을 게재한 뒤에 단행본 출간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유명 작가들에게 지출된 원고료가 클수록 신인들에게 분배될 원고 기회는 실질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동안 그 많던 신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그간 ‘능력주의’에 의존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한국사회의 과도한 경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문단이라는 작은 사회마저도 과도한 경쟁이 지니는 문제를 내버려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하지 말자. 그건 가혹하고 무책임한 말이다. 문예지들의 지면 분배가 어떤 기준에 의해 이루어지는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이 그걸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 아닐까.
 
나뿐 아니라 모든 문학 지망생을 위한 물질적 보상과 심리적 보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글쓰기가 아닌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에 많은 사람들이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제도와 의식의 변화에 대한 논의를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실험을 한번 해보자. 먼저, 제도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자면, 예술인들을 위한 기본소득제의 도입과 예술계 신인들을 대상으로 한 고정적인 기회 부여가 이루어지는 가상의 공동체를 한시적 기간 동안만이라도 형성해보자. 단, 특정한 기준을 만들어 국가기관이 이 공동체의 운영 방식에 억압을 주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즉,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예술인에 대한 기본소득제의 전면적 도입이 사회적 비용과 시민사회의 합의의 문제와 부딪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 그 절충안으로 소규모 문학 공동체 실험을 통해 그 과정과 결과를 실제로 겪어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다음, 의식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자면, 만약 이 실험이 실제 실행된다면 그 실험에 참여할 대상자들을 비도덕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프레임을 씌우지 않아야 한다. 흔히 생산자에겐 도덕적이고 생산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수혜자들에겐 그와 반대되는 수식어를 붙이곤 하는데,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특정 제도와 규칙의 도입에 대한 과정과 결과를 추측을 통해 미리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소규모 문학 공동체의 실험이 실제로 실행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그 과정 속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함께 해보는 건 어떨까.
 

 


1) 성동혁 「부럽지도 부끄럽지도 않게」,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7년 여름호 10면.

2)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이미애 옮김, 민음사 2016, 64면.

3) 버지니아 울프, 같은 책 65면.

4) 김사과 「apoetryvendingmachine」, 『더 나쁜 쪽으로』, 문학동네 2017, 205면.
 

 
송민우
문학평론가.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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