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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계약서는 쓰이나

박진형
2018년 05월 10일

 

  

※ 방송작가들의 노동현실과 개선방안에 대한 방송작가 노동조합의 글을 끝으로 '예술-(   )-기본소득' 연속기획을 마칩니다.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예술-(계약서)-기본소득

 

구두계약을 서면계약으로 바꿨더니
 
최근 지역의 어느 방송사 작가들은 뜻밖의 계약서를 받았다. 수년 동안 일하면서 단 한번도 계약서를 쓴 적이 없는 작가들이었다. 이른바 ‘프리랜서’라 불리는 방송작가의 상당수는 서면계약서 한장 없이 구두계약으로 일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2016년 전국언론노동조합과 방송작가유니온이 함께 설문조사 형태로 실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에 의하면, 조사 대상자 중 서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힌 사람은 6.6%에 불과했다. 반면, 노동조건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만 들은 상태로 ‘구두계약’을 체결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68.8%였다. 심지어 '노동조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일을 시작했다고 답한 사람도 무려 24.6%나 되었다. 실태조사보고서는 이에 대해 "방송사가 아닌 프로그램 담당 PD가 계약주체로서 방송작가를 서면계약 없이 고용하는 현재 방송콘텐츠산업의 고용체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 방송작가들 앞에 방송사가 작성해 내민 계약서였다. 하지만 반갑긴커녕 그 내용이 기가 찼다. 차라리 없으면 그러려니 자포자기했을지 모르지만, 눈앞에 등장한 계약서의 문구는 작가들의 잠자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작가들이 가장 분노한 대목은 방송사가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었다. 방송사는 "원고의 정보 오류 및 구성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등 방송 품질이 미달한 경우” 계약을 해제 또는 해지할 수 있다고 했다. '구성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 ‘현저히’라는 부사를 붙일 수 있을까. 어느날 갑자기 방송사로부터 일방적인 계약해제, 즉 해고를 당하고 그 이유를 따져 물을 때 누군가로부터 “O작가의 대본 구성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이야”라는 초현실적인 답변을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작가들은 분노했다.
 
"작가의 귀책사유로 인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방송심의 지적 또는 방송사의 경고 이상 방송심의 지적을 받은 경우”에 계약해제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작가들을 분기탱천하게 만들었다. 방송프로그램은 철저하게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를 총괄하는 것은 ‘연출자’다. 만에 하나 작가가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의 대본을 썼다 해도, 그 내용이 방송에 나가는 것은 연출자의 최종 책임 하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그런데 정규직인 연출자는 아무 책임을 지지 않거나 가벼운 징계를 받는 데서 그칠 일을 프리랜서 작가에 대해서는 해고까지 할 수 있게 했다. 평소에는 철저하게 ‘을’로 대하면서 책임질 일이 생길 때 그 책임을 ‘을’에게만 덮어씌우겠다는 방송사의 태도에 분노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이밖에도 이 계약서에는 ‘무단으로 1회 이상 방송제작에 참여하지 않은 경우’ ‘질병 등의 사유로 방송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도 포함됐다. 갑작스런 사고로 불가피하게 방송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을 때조차 해고를 걱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작가들은 암담해졌다. 여기에 ‘방송사의 품위 손상을 한 경우’도 해고사유로 포함돼 ‘갑질계약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해당 방송사의 작가들이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를 통해 목소리를 모았다. 방송작가지부는 계약서의 불공정하고 부당한 내용에 대해 다양한 경로로 문제를 지적했고, 방송사측은 방송작가지부와 함께 계약서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일방해고와 계약종료
 
지난 2월말 SBS의 시사프로그램 「뉴스토리」에서 작가들이 계약해지되는 일이 발생했다. 작가들은 ‘일방해고’라고 주장했고, SBS는 계약기간 만료에 따른 ‘계약종료’라고 주장했다. 일방해고든 계약종료든 단초는 계약서에서 비롯됐다.
 
SBS는 1월말에 작가들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 기간은 2018년 1월 29일부터 2018년 3월 30일까지로 한다”고 되어 있는 2개월짜리 계약서를 내밀었다. 개편 가능성이 있어 계약기간을 3월 30일까지로 했다는 게 SBS의 입장이지만, 불과 2개월 계약기간의 계약서를 내밀 수 있는 현실 자체가 거대 방송사와 방송작가 사이의 권력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작가들이 계약종료 즉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은 2월 23일이었다. 2개월짜리 계약서를 쓴 지 1개월도 되지 않았고, 아직 계약기간이 1개월 이상 남았을 때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계약서가 방송작가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보완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연말 문화체육관광부는 ‘방송작가 집필표준계약서’를 제정했다. 집필표준계약서는 "방송프로그램의 방송원고 집필활동 및 사용과 관련된 계약에 적용”되는 것으로 "‘방송사 또는 제작사’와 ‘작가’ 간의 합리적 권리관계를 정하기 위한 표준 집필활동 계약조건을 제시함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구두계약이 관행으로 자리잡은 방송작가의 현실을 바꾸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문체부는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 제정으로 방송작가와 방송사, 제작사 간의 권리관계가 투명해지고, 장기적으로 더 좋은 방송영상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상생 환경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방송사들이 집필표준계약서를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권고했다.
 
SBS 역시 그동안 제대로 된 계약서가 없다가 문체부의 권고 이후 「뉴스토리」 작가계약서 등을 작성하게 됐다. 그런데 계약기간을 2개월로 명기하면서 ‘계약기간 만료’에 따라 ‘(SBS 입장에서) 정당한 해고’가 가능한 근거를 계약서가 마련한 꼴이 됐다. 그뿐 아니라 SBS는 집필표준계약서의 제4조에서 "계약기간은 개편, 편성변경, 원고수정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해 변경할 수 있다”고 정한 부분을 “개편, 편성변경, 프로그램의 폐지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계약만료일 이전이라도 계약이 즉시 종료될 수 있다”고 바꿨다. 집필표준계약서에서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조차 계약기간을 변경할 때는 작가와 방송사가 “합의”해야 한다는 점을 못박아두었지만 SBS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즉시 종료”할 수 있도록, 즉 해고가 가능하도록 수정한 것이다.
 
문체부는 집필표준계약서 해설서에서 계약기간을 규정한 제4조에 대해 "구성·예능 등의 프로그램의 경우 개편, 편성변경 등 발생 시에도 중도에 방송사가 일방적으로 작가를 교체 또는 해고할 수 없으며 반드시 작가와의 합의를 거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뿐 아니라 집필표준계약서 서문에서는 "본 표준계약서는 방송작가 집필활동 계약에 대한 표준을 제시하는 것으로 개별 계약의 특수 사항을 고려하여 당사자 간의 협의를 통해 본 표준계약서를 수정, 추가, 삭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SBS는 작가들과 아무런 협의 없이 제4조를 수정했고, 계약기간 변경을 ‘합의’하도록 한 부분을 삭제했다.
 
「뉴스토리」 작가들이 공개적으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면서 이 사안이 널리 알려졌다. 방송작가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집필표준계약서마저 자의적으로 변경해 악용한 SBS에 거센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자 SBS는 새 계약서를 만들었다. 집필표준계약서 제4조를 그대로 옮겨왔을 뿐 아니라 “프로그램 폐지시 ‘방송사’는 ‘작가’에게 4주전에 반드시 통보하고, 폐지 이유와 배경 등을 충분히 설명한다”는 단서까지 붙였다. 다만 SBS의 변화를 이끌어낸 기존 「뉴스토리」 작가들은 SBS 프로그램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표준계약서와 표준방송작가
 
최근의 이 일들은 관행화된 구두계약이 서면계약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암암리에 벌어지던 일들이 서류 속에서 명문화된 활자를 근거로 좀더 뚜렷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런 일이 몇차례 더 일어나면 계약서는 좀더 체계를 갖추게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갑질문화’에 대해 사회적 분위기가 민감해진 상황에서 최소한 말도 안되는 내용이 계약서에 담길 일은 앞으로 일어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이 아닌 ‘최선’의 계약서를 마련하는 것은 방송작가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방송작가의 전형’이 있다면 ‘표준’을 점차 다듬어가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종다양한 장르와 매체에서 저마다 ‘창작활동’ 또는 ‘노동’을 하는 방송작가를 일반화하여 모범적 전형을 그려내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
 
흔히들 방송작가라고 하면 김수현 김은숙 노희경 홍자매(홍정은 홍미란) 등으로 대표되는 드라마작가와 「무한도전」 「1박2일」 「윤식당」 등 출연자만큼이나 유명한 예능프로그램의 스타작가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틀림없는 방송작가다.
 
그리고 매일같이 지상파에서, 종편에서, 보도채널에서, 지역방송에서, 케이블방송에서, 외주제작사에서, 뉴스에서, 다큐멘터리에서, 라디오에서,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교양정보프로그램에서 일하는 수없이 많은 방송작가들이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그들’과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이들끼리도 여러모로 다르다.
 
문체부가 제정한 ‘방송작가 집필표준계약서’는 주로 드라마 작가와 예능프로그램의 메인작가(한 프로그램에는 여러명의 작가가 있을 수 있고 이들은 메인작가와 서브작가, 막내작가 등으로 역할과 위상과 책임이 구분된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로그램의 ’저작권’과 ‘2차사용’에 대한 부분이다. 집필표준계약서는 집필된 원고와 이에 따라 제작된 프로그램의 저작권을 법률에 따르도록 했고, 특히 해당 프로그램을 2차사용 즉 재방송하거나 판매할 경우의 사용료 지급을 명문화했다. 예를 들어 「무한도전」을 재방송할 때 원고료의 몇 %를 사용료로 지급할지, 재재방송을 할 때는 몇 %로 할지 등을 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저작권을 인정받고 2차사용에 따른 사용료를 받을 수 있는 작가보다 그렇지 못한 작가가 훨씬 많다. 메인작가 중에서도 라디오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에게 저작권이나 2차사용료는 딴 세상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맨 처음 꺼낸 이야기의 주인공인 어느 지역 방송사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겐 당장의 원고료가 훨씬 더 시급하고도 절박한 사안이다. KBS MBC SBS 등 서울에 있는 큰 방송사에서 일하는 작가 중 최저 수준의 원고료가 최저임금에 맞춰진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방송작가지부가 지난 2월 지역방송 작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조사에 응한 작가의 66.7%가 월 200만원이 되지 않는 원고료를 받는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150만원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한번 ‘어느 지역방송사’의 예를 들자면, 경력 18년차 방송작가가 하루 일당 68,750원으로 환산된 원고료를 한 달 방송분 22회로 계산해 1,512,500원을 ‘월급’처럼 받는다고 한다. 방송작가지부는 이 방송사의 문제가 된 계약서를 재검토하며, 계약기간이 종료되어도 프로그램이 계속 방송된다면 계약을 자동갱신하도록 하고, 계약기간 도중 프로그램이 폐지되어도 새 프로그램에서 우선적으로 일할 수 있는 등 고용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방적으로 해고가 가능하도록 했던 독소조항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검토 과정에서 현장의 작가들 몇몇은 ‘사실은 계약서보다 원고료 인상이 더 중한데……’라는 반응을 보였다.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되는 방송작가들은 4대보험의 보장도, 퇴직금도 받지 못한다. 뿐이랴, 모두가 환호하는 가을야구 시즌에 박진감 넘치게도 경기가 연장으로 이어지거나, 축구 ‘국대’팀의 A매치 경기가 연장전에 돌입해 예정된 프로그램이 불방되는 등의 일이 벌어진다면 해당작가는 일을 다 해놓고도 한 푼도 받지 못할 수 있다. 올림픽 시즌에 정규방송이 몇  쉬게 되면 작가는 꼼짝없이 ‘단기실업자’가 되어 버린다. 대부분의 작가들에게는 휴일근무수당도, 야근수당도, 식비도 지급되지 않고, 밤샘작업을 하다 새벽에 퇴근해 택시를 타도 교통비가 없으며, 유급휴가도 없다.
 
과연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최선의 계약서'가 가능할까. 문체부가 ‘표준’ 계약서를 만들었을 때 대부분의 경우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작가들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 기대는 접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구두계약으로 자신의 노동을 제공했던 작가들에게 서면계약은 최대한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표준을 한명 한명의 작가가 기댈 수 있는 ‘하나하나의 계약서’로 만드는 일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한 과정에, 그리고 계약서가 보장할 수 없는 더 많은 현실에 부딪쳐갈 때, 방송작가지부가 작가들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
 
 

 
박진형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언론운동을 했고, 국회에서 방송을 주로 다루는 상임위원회의 보좌진으로도 일했다. 최근에는 2017년 11월 11일에 출범한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의 정책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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