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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셨던 응우옌티탄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시민평화법정이 남긴 것들

임재성
2018년 06월 15일




2018년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마포 문화비축기지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정식 법정이 아니라 시민들의 힘으로 만드는 민간법정이기에 ‘권력’은 없었지만, 그 대신 ‘진실’과 ‘연대’가 담긴 법정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은 80여개 마을에서 9천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평화법정은 그중 1968년 2월경 발생한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과 하미 마을 학살사건을 심리하였다. 각 사건에서 가족을 잃고 본인 역시 큰 상해를 입은 두명의 베트남 학살 생존자가 시민평화법정의 원고로서 참석했고, 최선을 다해 50년 전 사건과 그후의 고통을 증언했다.
 
증언을 마치면서 원고들은 “지금까지 제가 드린 모든 말씀은 진실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이 서럽게 느껴졌다. 가장 고통 받았던 이들이 당대의 역사에서 배제되어왔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놓을 기회를 갖지만, 그 순간에도 의심의 눈초리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민평화법정은 원고의 증언이 끝날 때마다 긴 시간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원고에게, 아니 생존자들에게 시민평화법정이 심판의 자리가 아닌 연대의 자리이길 바랐다.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는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에게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했다.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구성된, 전문성과 사회적 신망이 높은 재판부가 내린 역사적인 판결이었지만, 50년간 침묵해온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주류 사회’가 이 판결 하나로 태도를 쉽게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평화법정은 최소한 그것을 준비한 우리를 바꾸어놓았다. 이 글은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법률가, 연구자, 활동가 들이 일년여의 준비과정 동안 어떤 고민과 대면하였는지를 기록하는 글이다. 사회의 변화란 결국 사람들의 변화에서 시작되고, 변화의 기록은 더 큰 변화를 만드는 출발이다.
 
 
시민평화법정 원고 대리인의 소장 진술(이하 모든 사진은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제공)
 
 
원고들의 증언에 박수를 치는 방청객들
 
 
 
폭력의 이분법을 넘어 참전군인을 대면하기
 
흔히 ‘승전국인 베트남은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한국 정부뿐 아니라 베트남 정부도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가 정확한 설명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한국 정부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 문제를 오랜 기간 억압·회피했던 것과 같은 형국이다.1) 따라서 한국 정부는 물론 베트남 정부에 의해서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에 대한 온전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수정 박사와 고경태 기자를 비롯한 일부 연구자와 언론인 들의 헌신으로 이 문제가 그나마 지금의 수준까지 밝혀질 수 있었지만, 법정이라는 형식을 통해 학살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했다. 시민평화법정은 민간법정이었지만 입증의 수준은 실제 사법절차와 동일한 수준으로 맞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로 모인 법률가와 연구자 들이 가장 먼저 고민했던 것은 증거의 확보였다.
 
여러 증거 중에서 우리2)는 참전군인의 증언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내가 쐈다’라는 자백의 증명력은 다른 무엇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참전군인들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연락을 취했지만, 대부분 ‘너희들은 결국 내가 아무리 긴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딱 하나의 사실에만 관심을 가질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20대를 이국땅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 보내야 했던 자신의 경험과 감정은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는 말. 우리는 쉽게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흔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서자’고 한다. 우리 역시 시민평화법정이 그 이분법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발견했다. 이분법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폭력의 방향’으로만 설명한다. 방향의 시작점과 끝점에 놓인 가해자와 피해자는 그 선을 벗어나는 말을 할 수 없다. 다행히 피해자의 존재와 위치에 대한 성찰은 어느정도 쌓여왔다. ‘양민학살’에서 ‘민간인학살’로 용어가 바뀐 것이 이러한 성찰의 중요한 성과였다. 폭력이 향하는 끝점(대상)으로서 고정된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피해자상은 당대의 역사를 왜곡할 뿐 아니라 폭력의 맥락까지 가린다. 폭력이 탈맥락적으로 허공에 매달리고, 그 폭력을 손쉽게 야유하는 구호만이 외쳐질 때 폭력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이러한 반성 속에서 많은 연구와 운동은 피해자를 탈색된 폭력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와 구조의 주체로서 다루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가해자의 경우 여전히 처벌의 논리에 갇혀 있다. 이분법 속에서 가해자는 자백의 도구이고 처벌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는 준비를 시작하면서 시민평화법정이 처벌의 장소가 아닌 참전군인들과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여야 한다는 생각을 나눴지만, 정작 가해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법정에 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가 듣고자 한 참전군인의 이야기 역시 1968년 2월 퐁니·퐁넛과 하미 마을에서 당신의 방아쇠는 누구를 향해 있었는지, 당신은 그 방아쇠를 당겼는지에 머물렀다.
 
그 과정에서 R을 만나게 되었다. R은 법정에서 다룬 두 사건 중 하나인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사병이었다. 32만명의 참전군인 중 1968년 2월 12일 오전 퐁니·퐁넛 마을에서 작전을 수행한 이를 찾은 것이다. 그는 첫번째 만남에서 모든 사실관계를 말해주었다. 그날 오전 민간인들만 있었던 퐁니·퐁넛마을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었으며, 그럼에도 자신이 속한 청룡부대 제1대대 제1중대는 노약자와 여성이 대다수였던 마을 주민 상당수를 학살했다는 증언이었다. 다 말했으니 더 볼일은 없겠다는 R에게 다시 만나자고 청했던 것은, 시민평화법정에 직접 서서 증언해달라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수차례 만남을 이어갔음에도 공개 증언을 설득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우리는 ‘참전군인’이라는 집합명사로서 수렴될 수 없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퐁니·퐁넛 사건과 같이 안 좋은 일이 있은 날 저녁에는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조심스레 물어본 질문에 R는 담담하게 말했다. “살았다는 안도감, 안도감이 크지. 고향에 돌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확인해봐. 사실 무언가 생각할 시간이 길지 않아. 피곤에 절어 금세 잠들 수밖에 없거든.” 죄책감도 복수나 승전의 기쁨도 아닌 생존의 안도와 피곤함. 그는 자신의 경험을 미화하지 않았다. 상이군인, 국가유공자, 무공훈장 수여자라는 규정을 불편해하며 “괜히 남의 나라 통일 전쟁에 끼어들어서 훼방이나 놨지. 그냥 거기서 재수가 없어서 다친 거야”라고 했다. 전쟁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서도, 그는 전쟁에서 자신이 한 행위를 인정하는 데서 말을 시작했다. 자신을 기꺼이 가해자의 위치에 세우면서도, 그 위치를 만들어낸 전쟁의 구조를 설명하는 R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우리는 법정에 R이 온전히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R의 동의를 받아, 법정에서 그의 증언 영상을 얼굴과 이름을 가린 채 상영했다. 채 20분이 안되는 영상은 학살 전후에 대한 증언이 대부분이었다. R의 영상은 퐁니·퐁넛 사건을 입증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17년 만에 퐁니·퐁넛 사건을 증언하는 참전군인이 등장했다고 평가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법정에 담기지 못했던 R의 감정과 경험, 태도에 어떤 가능성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의 십자군’도 ‘잔인한 학살자’도 아닌, 살아남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베트남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던 가난한 20대 청년의 감정이야말로 폭력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법정의 일부이면서도 법정의 형식(심리와 판결)을 따르지 않는 학술행사(‘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 베트남전쟁에 연루된 우리’, 2018.4.20)를 열고, R과 오랜 기간 만나온 이들의 글을 통해 법정에 담기지 못한 R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우리는 그 글에서 “법정에서도 심지어 전우회에서도 말해지지 못하는 그의 말들은 어떤 발화의 장(場)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젠가 그와 함께 그러한 장을 만들 수 있을까?”3)라며 현재의 부족함은 인정하면서, 다른 장소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을 놓지 않았다.
 
법정은 끝났지만 우리는 이후에도 R을 만나고 R의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한다. R를 통해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방법과 질문으로 다른 참전군인들의 이야기도 듣고 말해보고자 한다.
 
시민평화법정에서 상영된 R의 영상증언
 
 
시민평화법정 국제학술대회
 
두 응우옌티탄과의 연대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원고로 참여한 학살 생존자들이 이 법정을 온전히 자신의 ‘운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여부였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은 2000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과거사 문제 해결방식으로 익숙한 것이 되었지만, 베트남에서는 여전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급진적인 방식이다. 가상의 소송이라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에서, 그것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자는 제안의 부담은 클 수밖에 없었다. 연대란 옆에서 같이 걷는 과정인데, 우리가 너무 앞서서 손을 당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한 법률가들은 2017년 6월과 2018년 2월 두차례 베트남에 가서 생존자들을 만나 시민평화법정을 차분히 설명하고 원고로서 참여해줄 것을 제안했고, 명시적인 동의를 얻었다. 이후 구수정 박사를 비롯한 한베평화재단 활동가들이 원고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가면서 한국 방문을 함께 준비해주었다. 그러나 법정이 가까워질수록 전해지는 원고들의 소식에 걱정이 커졌다. 원고들의 가족이 한국 방문을 반대한다는 소식, 원고들조차 법정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떨려한다는 이야기, 그 스트레스로 인해 그들의 건강상태까지 안 좋아지고 있다는 말에 우리조차 ‘누구를 위한 법정인지’를 자문하게 되었다. 61세의 하미 마을 응우옌티탄의 경우 생애 첫 해외 방문이었고, 58세의 퐁니 마을 응우옌티탄(두 원고는 이름이 같다. 이하 마을 이름을 붙여 구별) 역시 2015년 한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호소했기에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상황을 열어두고, 원고들이 오지 못할 수도 있으며, 올 경우에도 법정의 최우선순위를 원고의 상태에 두기로 했다. 그들이 피로를 호소하거나 퇴정을 원할 경우 즉각 그에 따른 조치를 하기로 하였다.
 
2018년 4월 18일 새벽 인천공항 입국장으로 두 원고가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으며 나오던 모습을 보면서,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미 응우옌티탄의 손을 잡은 퐁니 응우옌티탄은 밝으면서도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2015년에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하루도 잠을 자지 못했다. 나를 반대하던 참천군인들의 모습에 슬펐고, 많은 카메라에 놀랐다. 한국 친구들에게 폐를 많이 끼쳤다. 하지만 지금은 두번째 방문이다. 경험이 있는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하미 응우옌티탄을 챙겨야 한다.” 퐁니 응우옌티탄은 그렇게 더 큰 용기를 보여주었고, 그 용기에 하미 응우옌티탄도 힘을 낼 수 있었다.
 
원고들은 법정이 열린 이틀간 총 13시간에 달했던 변론 시간 중 재판부가 정한 휴정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한국의 젊은 법률가들에게도 고된 일정이었다. 재판이 한국어로 이루어져서 통역을 통해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겪으면서도, 원고들은 모든 과정에 함께했다. 두 응우옌티탄은 서로의 증언을 지켜보면서 응원해주었고, 한국 변호사들의 순서가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들은 50년 전 자신이 겪었던 사건을 증언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현재 자신의 요구와 욕망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퐁니 응우옌티탄은 참전군인과 대한민국의 사과를, 그리고 그에 따른 합당한 배상을 요구했다. 하미 응우옌티탄은 하미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의 비문이 2000년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의 압력에 의해 덮어진 것을 언급하며, 그 비문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원고들은 법정 증언에서 자신들이 느꼈던 두려움도 숨기지 않았다. 시민평화법정에 서기까지 많은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1968년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죽은 영혼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퐁니·퐁넛의 74명과 하미의 135명을 대신했기에 지금과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영혼들 중에는 원고들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법정에서 원고들은 당당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법정이라는 권위적 공간에 놓이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수백명의 방청객이 앉아 있는 시민평화법정의 무대였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고들은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고, 울음 속에서 말을 이어가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 어떤 리허설도 그 어떤 대본도 없었기에 당당함은 더욱 빛났다.
 
우리는 그들의 당당함과 최선을 다해 집중하며 법정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스스로도 ‘무기력한 피해자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돌아보았다. 언어적, 물리적 거리로 인해 충분히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한계에서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운동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지로서 연대하기보다는 피해자와 그의 권리를 대신 요구하는 대리인의 관계 위에서 시민평화법정의 준비가 이루어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민평화법정이라는 ‘사건’을 통과하면서 원고들과 우리는 감히 ‘동지’라고 부를 수 있을 연대를 나누었다고 믿는다. 원고들은 학살의 증거를 넘어 권리를 요구하는 주체로서 눈부셨다. 이 연대를 바탕으로 두 응우옌티탄과 우리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의 진실과 책임을 어떻게 계속 이야기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할 것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원고들
 
최후진술하는 퐁니 응우옌티탄
 
증언하는 하미 응우옌티탄
 
 
피고 대한민국을 위한 법정
 
판결선고 후, 원고들은 ‘우리가 이겼다’며 번쩍 손을 들었다. 온몸이 떨릴 만큼 좋다고 했다. 죽기 전에 이런 재판을 다시 받아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이 소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생생히 전하겠다고 했다.
 
시민평화법정은 직접적으로는 두명의 원고를 위한 재판이었다. 이들에게 직접 가해진 한국군의 불법행위를 증거를 통해 면밀히 심리하고,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을 판단했다. 좀더 넓게 본다면 두명으로 대표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희생자들과 그 유족 전체를 위한 재판이기도 했다. 재판부는 두건의 사건을 통해 다른 사건들의 존재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며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지역에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인권침해 사건 전체를 조사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더해 우리는 시민평화법정이, 나아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평화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시민평화법정은 원고들을 위한 법정인 동시에 피고 대한민국을 위한 법정이기도 한 것이다. 해를 당한 경험만을 기억하는 사회는 늘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두고 더 많은 힘을 갈구하며 결국 폭주하게 된다. 2001년 9·11테러 이후 피해의 공포에 압도되어 그 어떤 합리적 반론도 거부한 채 광란의 전쟁으로 치달았던 미국이 대표적이다. 반면 가해의 역사를 성찰하는 사회는 지금의 폭력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힘을 가진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또렷하게 기억해내는 독일에서, (징병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병역거부 사유로 가장 많이 접수된 것은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신념을 가진 독일 젊은이들은 총을 내리고,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해왔다. 만약 독일이 다시 전쟁의 길로 나아가려 할 때, 그들의 신념이 독일을 멈춰세울 것이다. 이것이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가진 사회의 평화력(平和力)이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의 진실이 규명되는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는 가해자로서의 기억과 자리를 튼튼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역사교과서에서 베트남전 파병은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되고 있다.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전쟁특수’를 중요한 성취인 양 말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최소한 그 전쟁특수가 사실이라면 지금 한국 사회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에 퐁니·퐁넛 마을의 74명, 하미 마을의 135명의 억울한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의 자리에 설 때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그 부끄러움 위에서 피고 대한민국의 평화력이 생겨날 수 있다. 시민평화법정을 통해 우리가 조금 더 부끄러워졌기를,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쉽게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시민평화법정 판결선고
 
 
판결선고 후 원고들과 변호사들
 
 
시민평화법정 판결 선고 이후
 

 


1) 구수정은 『한겨레21』(2000.5.4)에 기고한 「베트남의 진심은 무엇일까」라는 칼럼에서 민간인학살 문제에 소극적인 베트남 정부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한국군인 미운 게 하나라면, 우리 정부 미운 건 열!’ 정부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원망이다.”

2) 준비위원회 실무진은 변호사들이 중심이었던 법률팀과 연구자들이 중심인 조사팀, 그리고 실무책임을 담당하였던 집행위원회로 크게 구성되었다. 준비과정에서 각 팀별 역할과 활동, 고민에 차이가 있었기에 이를 ‘우리’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내부의 차이보다는 사건에 집중하면서, 그 사건들을 경험한 이들을 ‘우리’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3) 심아정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참전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2018, 65면.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 변호사.
2004년 평화주의 신념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택한 이후 평화운동과 평화연구를 해오면서 베트남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 민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TF 간사, 한베평화재단 이사,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군사주의에 갇힌 헌법재판소」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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