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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하여: 최근 소설에 나타난 주거와 공존의 문제

인아영
2018년 10월 02일

주목: 사는 곳과 사는 법



마지막 보루
 
얼마 전 완간된 김정연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전2권, 창비 2017~18)의 주인공은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는 20대 여성 ‘이시다’이다. 원룸에 살면서 ‘쥐윤발’이라는 이름의 햄스터와 동거중인 이시다에게서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보다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예민한 인식이다. 고시원에 살 때부터 굳이 비싸도 창문이 있는 방을 욕심냈던 그녀의 꿈은 높은 천장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며, 그래서 그녀는 햄스터인 윤발이가 보이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때 숨을 수 있는 은신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다. 이 만화에서 집 혹은 방은 단순히 의식주를 처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외부의 간섭과 폭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에 가깝다. 한편 주거에 대한 예민한 관심은 최근에 발표되는 소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나는 것 같다. 주거야 문학에서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겠으나, 최근의 소설들은 이웃의 존재에 좀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하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이웃은 더이상 정을 나누거나 서로를 도와주는 친근한 존재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이웃은 자신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보루인 주거공간을 미세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위협하는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특히 최근 1~2년간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꽤나 뚜렷해 보인다.
 

 
‘혼자 사는 여자’와 괴물이 된 이웃들
 
그전에 황정은의 「누가」1)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5년 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이제 우리에게 이웃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섬뜩하게 알려주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 소설에서 ‘나’가 지금 살게 된 집을 선택한 이유는 “조용해서”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는 휴대폰 매장에서 “쿵 칙 쿵 칙 쿵 직 쿵 직 붕 지 붕 지” 하고 틀어대는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기를, 외벽과 내벽을, 집이라는 공간 자체를, 결국엔 몸을 흔들어대는 그 소리 안에 갇혀야 했을 때 ‘나’는 깨닫는다.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란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여기에서 작가는 정확하게 계급의 문제를 겨냥한다. 돈이 많았더라면 이웃의 무자비한 소음과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계급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새집에서도 여전히 이웃의 소음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갑자기 들이닥친 윗집 여자는 그 윗집으로부터 시끄럽다며 한 소리를 듣고 와서는 여기 짖는 개 없느냐고 미친 사람처럼 알아들을 수 없게 따져 묻고,2) ‘나’는 이 광기를 고스란히 흡수하여 다른 이웃에게 똑같이 전달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나’의 집에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는 누군가는 “누구세요”라는 ‘나’의 물음에, 한번 읽으면 누구도 잊지 못할 이 문장을 말한다. “아래층이야 씨발년아.” 작가는 ‘나’가 남성이었더라도 이 마지막 문장은 “씨발놈아,가 아니고 씨발년아”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3) 그 편이 훨씬 무섭고 공격적인 이유라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상대가 여성인 경우, 욕설은 한국사회의 성별 위계와 겹쳐져 훨씬 내뱉기 쉬우면서도 체계적으로 억압적인 말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1~2년의 소설들은 황정은이 이 「누가」의 마지막 문장으로 어렴풋이 드러내었던 여성 문제에 더 직접적으로 부딪친다. 이 소설들은 주거의 문제를 ‘계급’뿐 아니라 ‘계급+여성’이라는 더 구체적인 조건과 단단히 결부하려는 듯하다.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자음과모음』 2018년 여름호)에서도 역시 화자를 괴롭히는 것은 소음이다. 평생을 함께한 동성 연인 디엔과 살던 데런은 디엔이 떠나고 혼자 남은 어느 새벽, 갑작스러운 벨소리를 듣고 깬다. 아래층에 산다는 이웃 남자는 다짜고짜 들이닥쳐 “너무 시끄러워서 누가 살고 있나 알아보러” 왔다면서, “애 키우세요, 애가 있습니까, 애요, 애”라고 미친 듯이 따져 묻는다. 남자가 떠나고 난 뒤 혼자 남겨진 데런이 듣는 환청은 디엔의 목소리다. “그래도 여자 혼자 산다고 말하지 않은 건 잘했어.” 이 목소리에서 부각되는 것은 여자 혼자 산다는 사실이다. 이 조건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협과 공포가 될 수 있는지를 「희박한 마음」은 청각을 통해 충분히 재현해낸다. 옆집에서 들려오는 “컥 끼이이아 흐룹 히이이아” 하는 계량기 소리가 데런에게는 마치 사람의 소리와 다르지 않게 들린다. 이제 소설 속에서 이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같은 소리 또는 ‘혼자 사는 여자’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구체적 위협이라는 형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웃으로부터 받는 위협은 소음과 무차별한 취향,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표적이 되는 공포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김혜진의 「동네 사람」(『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은 이웃이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넘어 정체성을 위협하는 장면까지 그려낸다. 「희박한 마음」의 동성 연인 데런과 디엔이 겪어야 했던 곤경이 여자라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4) 「동네 사람」의 ‘나’와 ‘너’가 경험하는 난관은 주로 레즈비언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서울 시내의 관광객이 많은 동네에서 세 들어 사는 ‘나’와 ‘너’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은, 그들이 이웃으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숨긴 채로 예민하게 살아가야 하는 조건이다. 이 와중에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의 개를 차로 치는 사고를 낸 ‘너’가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동네에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나’가 걱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관심을 끌어 자신들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부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5) “너와 나에 관한 말들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동네를 맴돌 거라는” 사실이 이들에게 그 무엇보다 실질적인 공포이기 때문이다. ‘나’가 과민반응이나 피해망상을 보이는 것처럼 읽힌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일지 모른다. 자신들의 집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물음에 “다 알지. 다 알아. 다 안다고.”라고 대답하는 할머니의 말. 그것은 ‘나’를 오싹하게 하는 이웃의 존재 그 자체다.
 
이웃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닥쳐오는 현상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아주 작은 소음까지 공유하게 만들고, 새벽 언제라도 현관문을 두드릴 수 있게 하며,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정체성을 노출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어쩌면 거리일지 모른다. 최정화의 「잘못 찾아오다」6)는 이웃들의 거리를 바짝 좁혀본다. 이 소설에서는 30대 여성으로 보이는 ‘나’가 새로 이사한 집에서 자꾸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나’와 동시에 도착하여 ‘나’의 집인 105호에 똑같이 이사 왔다고 말하는 또래의 여자, 갑자기 도어록 버튼을 누르고 문고리를 돌리면서 집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알 수 없는 사람,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집 앞에서 머뭇거리는 30대 초반의 여자. 이들은 모두 조금씩 화가 나 있는데, 그 까닭에 대해서 ‘나’는 “내가 이 집에 이사 왔다는 것” 이외의 것을 찾지 못한다. 이 수상쩍은 이들은 모두 이사한 ‘나’의 집에 침입하듯 찾아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듯하다. 이렇게 느닷없이 침범한 타인들은 제 몫의 공간을 온당하게 누리지 못하는 자의 불안정한 거주권, 그리고 언제든지 재침입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환상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묘한 것은 「잘못 찾아오다」에서 침입하는 이웃들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없어지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타자였던 이들과 ‘나’는 하나로 겹쳐진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자신에게 길을 묻는 20대 초반 남자의 집이 어쩌면 자신의 집과 같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경향은 앞서 언급한 황정은과 권여선의 소설에도 있다. 이를 한꺼번에 비교해보자.
 
 
 
“나는 그 노인보다 낫지만 지금의 나하고 그 노인 사이엔 거의 아무것도 없다. (…) 그 거리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돈뿐인데 나는 돈이 없지. 이상하게 지금 돈이 없고 어쩌면 영원히 없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방법이 없는 거야.”7)

“하지만 자꾸 위층에 혼자 살았다던 여자에게 이 소리가 어떻게 들렸을지 상상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면 그 여자의 감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되는 듯했고 그 여자의 불면의 밤을 몇년이 지나 데런 자신이 한층 아래에서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한층 아래에는 자신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자신과 디엔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마저 들었다.”8)

“문득 그가 말하는 제집이라는 것이 어쩌면 내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가 그렇게 선언한 것도 아닌데 무작정 그 집이 내 집이라고, 네 집이 아니라고 우기기도 뭣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앞서 걸을 뿐이다.”9)
 
 
 
「누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사한 노인과 ‘나’가 돈이 없다는 계급적인 이유로 등치되었다면, 「희박한 마음」은 위층 여자와 데런이 혼자 사는 여자로서 느끼는 불안감을 겹쳐놓고, 「잘못 찾아오다」는 자신의 소유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나’와 그의 거주공간을 같은 곳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나’의 집과 ‘너’의 집이 뒤섞이고, 어쩌면 ‘나’의 존재와 ‘너’의 존재도 뒤엉긴다. 어떤 불확실 속에서 이 거주민들은 하나로 포개지는 것이다. 아니, 하나로 뭉개진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이 소설들이 보여주는 것은 서로에게 기괴한 소리나 섬뜩한 불안으로 존재하는 이웃들이 하나로 뭉개졌다는 사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화자 자신도 똑같은 부분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섬뜩한 사실이다. 이 소설들이 그려내는 지도는 아랫집과 ‘나’의 집과 윗집과 그 윗집이 한데 뒤엉겨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지옥도다.
 

 
공동거주 속 뒤틀린 인간관계
 
지금까지 살펴본 소설들에서 이웃이 ‘익명’의 기괴한 위협으로 나타났다면, 이웃에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을 부여하여 나름의 ‘인간관계’를 만들어보려는 소설들도 있다. 구병모가 『네 이웃의 식탁』(민음사 2018)에서 조성한 공동체주택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작가의 끈질긴 문제의식은 산골에서의 육아 문제를 다룬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릿터』 2017년 6·7월호)에서도 인상적으로 드러났으나 이 장편소설에 이르러 더욱 확장된 것 같다. 국가의 저출산 대책으로 마련된 이 주택은 ‘10년 내에 셋 이상의 자녀를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자필 서약서를 쓰는 대신 여러 젊은 부부들과 공동체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공된 거주공간이다.
 
『네 이웃의 식탁』은 서로 이웃인 네쌍의 부부이자 여덟명의 남녀에게 구체적인 이름과 직업을 하나씩 부여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얼굴의 이웃들을 ‘사회적으로 협의된 공간’에서 부딪치게 했을 때 드러나는 것은 세련된 교류 아래 깔려 있는 폭력적인 구조다.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공동체생활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힐난을 받거나, 공동육아라고는 해도 결국에는 육아노동과 가사노동은 여성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상황, 그리고 공동체라는 미명하에 은근한 성추행이 자행되는 모습이 그렇다. 결국 이러한 부조리를 견디다 못한 요진은 공동체주택을 떠나지만 이후에도 입주자들은 계속 채워지고 폭력적인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어쩌면 소설 끝에 명료해지는 것은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 비상식적인 공동체라는 점일지 모른다. 애초에 나이와 가족구성원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네쌍의 부부가 공동체를 꾸려 출퇴근과 식사까지 함께하는 상황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이 소설의 핵심은 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공동체 자체를 기이하고 환상적인 대상으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오늘날 공존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상상적인 실험공간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보다 익숙한 거주공간에서 인간관계를 상상해보는 소설도 있다. 고시원을 배경으로 한 김의경의 「2층 여자들」(『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고시원은 김애란에 의해 한국문학에 처음으로 전면 등장했던 2000년대와는 조금 달라 보인다. 2003년에 발표된 김애란의 등단작 「노크하지 않는 집」(『달려라, 아비』, 창비 2005)이 모두가 똑같이 생긴 좁은 방 안에서 고독하고 공허하게 살아가는 익명의 청년들을 그렸다면, 그로부터 15년 후 김의경은 그들을 고시원의 작은 방 바깥으로 꺼내 관계를 맺어보게 한다. 당연히 이 공동체에도 첨예한 갈등이 있는데, 이 역시 서로를 조금씩 예민하게 만들고 미치게 하는 방식이다. 아무리 고시원 치고 쾌적하다지만 좁은 곳에서 싱크대와 공용냉장고, 세탁기를 공유해야 하는 이 공간에서 싸움은 기어이 벌어진다. 바로 포스트잇을 통해서. 15년 전 김애란에게는 삭막한 소통을 상징했던 포스트잇이 이제는 누군가를 해하는 다툼의 구체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어제 내 우유 먹은 돼지년, 그렇게 살지 마. 한번만 더 먹어봐. 독약 넣을 거니까.”

“너도 참 딱하다. 우유 한 팩에 독약이라니. 넌 인성교육도 못 받았니?”10)



“세탁 끝나면 옷 즉시 가져갑시다. 혼자 쓰는 세탁기 아니잖아요?”

“싫으면 니가 사 쓰세요.”11)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관계가 오로지 갈등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나름의 우정과 친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교성 좋은 총무 덕분에 ‘나’는 2층에 사는 각방 여자들의 신상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고 ‘애매하게’ 알고 있던 그녀들의 이름과 소속과 방을 일치시키게 된다. 심지어 정 많은 총무는 자살한 204호를 위해 눈사람을 만들어두고, 화재사고가 났을 때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지며, ‘나’가 실연당했을 때는 죽을 끓여 방 앞에 놓아두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모두에게 애정을 베풀던 총무는 고시원 게시판에 직무태만으로 고발되면서 쫓겨나게 되는데, 이들이 고시원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맺는 인간관계의 현실은 결국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를 챙겨주다가도 “화장실 바닥에 휴지가 널려 있고 쌀이 떨어진 지도 이틀”째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해고시킬 수도 있는 곳. 김의경이 새삼스럽게 고시원이라는 배경을 가져오면서 보여주는 현실이란 사소한 불쾌감과 몇마디 간단한 말로 쉽게 부서져버리는 얇디얇은 관계들이다.
 
고시원보다 더 극단적인 공간을 설정하면서도 그 안의 얕은 인간관계를 한번 더 비틀고 있는 소설이 이유의 「문을 위한 방」(『21세기문학』 2017년 겨울호)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거주공간은 다소 충격적이다. 비즈니스호텔 4층의 객실. 그 안에 사방의 벽이 미닫이문으로만 이루어진 아홉개의 두평짜리 방이 이어져 있다. 본디 미닫이문 수집을 위한 이 공간에서 ‘나’가 거주하는 방까지 이동하려면 현관에서 여덟개의 문을 거쳐 여덟개의 다른 방을 지나야 한다. 이 기이한 공간에 사는 ‘나’가 옆방에 사는 ‘봉희 씨’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오로지 ‘톡’을 통해서다.
 
 
 
“언니, 저 방에서 나왔어요.

네, 봉희 씨.

이제 들어가요, 언니.

오늘은 왠지 힘이 없네요.

힘들었군요. 쉬세요.

꼭^^ 그러고 싶어요.”12)
 
 
 
이 다정하고 살가운 톡은 기괴하다. 이들은 서로 육성으로 대화하지도, 전화하지도, 제대로 만나지도 않으며 오로지 톡으로만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나’는 이 톡이 친밀한 사이를 연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휴대폰 액정을 보면서 “토 나와”라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앞에서 다루었던 소설들과 다르게 「문을 위한 방」에는 그토록 밀착된 거리의 이웃 사이에도 혐오나 불쾌의 감정이 격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이 이 낯선 소설을 쉽사리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이 소설의 여운은 ‘나’가 이 공허하고 무감각한 대화에서 정말로 위안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에서 온다. 아니, 그보다는 옆방에 산다는 사실 빼고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여자의 톡에라도 기대어보려는 ‘나’의 위태롭고 아픈 마음에서. 아무도 기댈 사람 없는 ‘나’는 병원에서 난소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자신도 모르게 간절한 마음으로 봉희 씨에게 톡을 보내기도 한다. ‘나’가 의지해보는 것은 단지 “한번도 진심인 적이 없었고, 진심이 아닌 적도 없었던 문장”이다. 상대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괜찮다. 지금 ‘나’의 옆에 있어주는 것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아니며, 옆방에 사는 봉희 씨이기 때문이다. 봉희 씨는 부르면 언제나 “거기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까지 이 낯선 이웃의 존재에서 위안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봉희 씨는 그저 “기뻐하지도 실망하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웃는” 이모티콘을 반복해서 보낼 뿐이며 이 웃음은 싸늘한 물과 따뜻한 물이 배합된 듯한 기묘한 온도로 독자들을 섬뜩하게 한다.
 
 
 
이웃이 재현되는 방식
 
지금까지 다룬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자신만의 공간을 온당하게 확보하지 못한 채 인간다운 삶을 침해받는 개인들이다. 최근 1~2년 사이에 잦은 빈도로 형상화되는 이들은, 제집에서조차 공포에 떨어야 하는 여성, 동네 주민들에게 정체성을 숨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성소수자,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돌봄노동에 고통받는 젊은 엄마, 극도로 좁고 폐쇄된 공간 속에서 타인과 부대끼며 생존해야 하는 청년이다.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나름의 인간관계를 실험해보려는 최근 소설들의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가능성을 모색해보려는 부단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재현된 이웃들의 모습은 서로의 안전과 정체성을 위협하거나, 개인적인 공간을 침범하거나, 기괴하고 아이러니한 소통방식으로 맺어진 존재이다. 어쩌면 불안정한 주거조건에서 이웃은 이미 혐오나 불쾌의 덩어리 혹은 위협 그 자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이 소설들은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다시 15년 전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을 생각해보자. 고시원이라는 1인 주거형태가 단절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그 안의 삭막한 인간관계가 충격으로 다루어졌던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서사였다. 최근 소설에서 재현되고 있는 주거공간 자체는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오피스텔처럼 화려해보여도 여전히 비좁고 우울한 고시원(「2층 여자들」), 혹은 모든 벽이 미닫이문으로 이루어진 두평짜리 방(「문을 위한 방」)이 특히 그렇다.13) 그러나 오늘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김애란 소설에서처럼 단절된 것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대신, 도저히 피할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혐오와 불쾌와 위협으로 재현된다. 단절된 인간관계가 자아내던 충격과 씁쓸함은 이제 차라리 순진한 반응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최근의 소설들이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있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유대가 아닌 단절, 친밀감이 아닌 거리감이 더욱 중요해진 오늘날의 현실이다. 가장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주거형태에서 오히려 가장 단절되지 못한 채 이웃과 불쾌하게 뒤엉기는 현실이야말로 진짜 비극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모습도 말이다.
 

 

남는 질문들


3  이렇게 일별해 보니 이웃과의 공존 문제를 다룬 소설이 최근에 정말 많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만큼 오늘날 소설이 우리 사회의 공동체와 공존 문제를 치열하게 묻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언급한 작품 중에서 특히나 현실의 화두와 직접 연결해 생각해볼 만한 작품을 좀더 자세히 소개해줄 수 있을까?
 
인아영  분량 문제로 더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질문해주셔서 감사하다. 마지막에 다룬 이유의 「문을 위한 방」은 특히 자세하게 읽을 필요가 있는 소설이다. 우선 사방의 벽이 미닫이문으로만 이루어진 두평짜리 방이라는 주거형태부터가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오늘날의 주거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재다. 이들이 사는 공간이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거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알아야 할 진실도 아닌”(171면)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도 짚어볼 만하다. 더 주목할 것은 ‘나’와 봉희 씨가 맺는 관계다. 본문에서는 ‘나’가 봉희 씨와의 공허하고 무감각한 대화에서 위로를 찾으려 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위주로 언급했는데, 소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의 관계는 더 미묘하다. 두 사람은 이렇게 톡을 주고받는 것이 우습고 어처구니없는 일인 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관계가 더 깊어지는 상황을 서로 적당히 피한다. 특히 두 사람이 짧은 문자와 이모티콘으로 나누는 톡 대화에 이 미묘함이 현실감 있게 잘 포착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나’가 병원에서 난소에 물혹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봉희 씨에게 연락하는 장면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싶다.

퇴근 때가 되자 그녀는 어김없이 톡을 보내왔다. 바빴어요. 근데 언니 어디 아프세요?

암일지도 모른대요, 문장을 완성했다. 전송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진짜 암이라면…… 암이면. 왜 내가요.

암이요, 암


그녀가 내게 전송해오고 내가 그녀에게 전송한 말들을 확인했다.

어디 아프세요? 암요…^^ 3분이 흘러 도착한 톡. 언니도 참^^ (182면)
 
3  15년 전 김애란 소설의 고시원 속 인물들이 관계를 맺(지 않)는 방식과 최근 문학작품 속 인물의 방식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인아영  본문에서 언급했듯 15년 전 김애란 소설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최근 소설들에서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유대가 아닌 단절, 친밀감이 아닌 거리감이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단절과 거리감에 대한 요구가 거의 절박한 것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과 비교해보자면, 이 소설에서 ‘1번방 아가씨’로 불렸던 ‘나’는 나머지 네 여자들의 방이 징그럽게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자들의 옷, 장신구, 책, 방바닥의 담배빵 자국까지 비슷하다는 사실은 각자의 개성과 취향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일괄적으로 사라지는 상황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초점은 ‘타인의 존재’라기보다는 이러한 구조 내에서 자신이 특별하지 않은 존재라는 ‘자의식’에 더 가깝다. 따라서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타인과 단절되는 상황도 ‘나’의 외로움과 고통을 조명하는 장치가 된다. 반면에 최근에는 이웃과 단절되고 격리된 상황에 대한 충격이나 대단한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1인 가구 증가와 도시 과밀화가 꾸준히 진행된 결과, 오히려 그러한 단절과 격리가 절박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소설에서 격리되어 있는 개인들을 방 바깥으로 꺼내어 인간관계를 맺게 하는 서사가 자주 다뤄지는 이유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자의식보다는 이웃 자체가 주는 불편과 불안이 더욱 가깝고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3  이웃이 “이미 혐오나 불쾌의 덩어리 혹은 위협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해도, 사람들은 당장 자기가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라도 그 안에서 다른 존재방식, 다른 관계를 상상하곤 하지 않나 싶다. 오늘날 소설에서 그런 징후를 논하는 것은 무리일까?
 
인아영  맞다. 예컨대 김의경의 「2층 여자들」에서 이웃 간의 불화와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도 사실 그만큼 어떤 친밀한 관계를 원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김의경의 「2층 여자들」에서 성격이 좋아 고시원 사람들을 잘 챙기는 총무가 그러한 욕구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결국 총무는 그녀의 태업을 비난하는 게시판 익명 글 때문에 해고되는데다 고시원을 떠나기 전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져버린다. 총무가 결국은 우습거나 부정적인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은 소설의 차원에서 이웃 간 좋은 관계에 어떤 의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또 첫번째 질문에서 답했듯이 「문을 위한 방」에서도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톡을 통해 나름의 인간관계를 맺어가려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징후를 더 많이 논할 필요가 있겠다.
 

 


1) 『문예중앙』 2013년 겨울호 발표;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수록.

2) 이때 윗집 여자가 ‘나’에게 반말로 따지는 장면을 잠시 옮겨보자면 이렇다. “그걸 우리 딸한테 따지고 욕하고 어떤 남자랑 싸우면서 윗집에서 우리 애기 불쌍하다 불쌍하다./네?/윗집에서 시끄럽다고 우리 집이./윗집에서 아주머니한테요?/아니 내가./네?”(『아무도 아닌』 117면.) 윗집 여자가 내뱉는 말은 문장 호응도 맞지 않고 그녀는 스스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을 맞대고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이 상황은 공포에 가깝다.

3) 황정은 「작가의 말」, 문학과지성사 ‘이 계절의 소설’ 2014년 3월(www.moonji.com/monthlynovel/8148).

4) 이 소설에는 대학 시절에 ‘여자가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뺨을 맞은 디엔의 모습을 화자 데런이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5) 이를 오정희의 중편소설 『새』(문학과지성사 1996)에 등장하는 동성 부부와 비교해본다면 어떨까. 동성 부부임을 숨기기 위해 남장을 한 여자를 가리키며, 한 이웃은 초등학생 화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얘, 우미야. 솔직히 말해봐라. 저 사람, 남자냐 여자냐?” 『새』에서 동성 커플의 존재를 노출하고 싶어하는 이웃의 호기심은 김혜진의 「동네 사람」에 이르러 짓궂은 질문의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소설에서 재현되는 이웃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의 형태로 두려움을 자극한다.

6) 『21세기문학』 2017년 겨울호 발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문학동네 2018 수록.

7) 황정은 「누가」, 『아무도 아닌』, 134면.

8) 권여선 「희박한 마음」, 66면.

9) 최정화 「잘못 찾아오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83면.

10) 김의경 「2층 여자들」, 109~10면.

11) 같은 글 110면.

12) 이유 「문을 위한 방」, 170면.

13)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지만 장은진의 「외진 곳」(『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도 같은 경향으로 묶일 수 있다. 「외진 곳」의 주인공 ‘나’가 동생과 함께 세 들어 사는 공간은 ‘ㅁ’자 구조에 아홉개의 방이 배치되어 있는 일명 ‘네모집’이다. 1번방부터 9번방으로 불리는 각방의 거주민들은 방에서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공유하며 공동생활을 한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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