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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가

임동근
2018년 10월 02일

주목: 사는 곳과 사는 법


 
그림: Ivan Yermenyov, The Singing Beggars, 1775.
출처: http://www.belygorod.ru/img2/1000_rushud/Used/0Ermenev_NischieGRM.jpg
 

“사람들은 (…) 길을 떠나 어디건 일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들 중 다수가 실패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영원히 길을 떠나 프랑스의 부유인구로서 부랑자가 되어 떠돌아다녔으며, 1780년대에 이러한 절박한 영혼은 수백만에 달했다.”
—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조한욱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6, 48면.

 
20대의 도시, 서울
 
지난 20년간 324만명의 20대가 서울로 들어오고 305만명이 서울을 나갔다. 서울에서 20대는 해마다 거의 2만명씩 늘어간다. 3년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20대들로 작은 도시 하나씩 늘어나는 규모다. 남녀를 불문하고 대학을 졸업한 많은 젊은이들이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서울로 올라오고, 또 사연을 갖고 서울을 나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서울은 20대를 성공적으로 끌어올 수 있는 유일한 도시다.
 
청년들이 서울로 오는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일자리 때문이다. 젊은 노동자들을 만들었던 제조업 도시들은 경제구조가 달라지면서 더이상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화라고 말하든 4차 산업혁명이라고 말하든, 오늘날 공장은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물건을 생산한다. 젊은 노동자들이 결합했던 기계장치들은 이제 사람이 아닌 다른 장치와 결합되거나 더 복잡한 장치로 대체된다. 제조업은 기계와 함께 진화할 수 있어서 살아남은 소수의 숙련노동자와 결합된, 고가의 장치들이 서로 경쟁하는 장이다.
 
이렇듯 제조업 지역의 중심은 로봇 관리자들의 중소도시로 변하고,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장소에 고정된다. 금융, 고급 서비스업 등 지난 20년 동안 새로운 성장동력이라 불리던 경제행위들은 자본이 사람 편으로 흘러들어가는 세계적 대도시 네트워크에서 발생하고, 대도시들은 자본을 움직여줄 젊은이를 찾는다. 장사도 젊은 사람이 하는 거라 했던가. 재화가 아닌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과연 서비스도 생산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경제학이 가치를 발생시킨다고 말하는 재화와 서비스 중 서비스가 지배하는 도시는 20대 젊은 층을 필요로 한다.
 
젊은이들이 도시를 찾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2차대전 이후 몇몇 나라에서 특정한 정치·경제적 조건으로 이 현상이 잠시 멈춰 있었을 뿐이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일일지 모른다. 부모의 기술과 생산수단을 상속받아 한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던 시대는 사회, 경제, 인구구조가 신비롭게 균형을 잡고 있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새로운 일자리는 대항해의 시대엔 바다에,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던 19세기말에는 길 위에, 20세기 국민국가에선 대공장이 몰리는 도시에 있었고, 이제는 서비스업 중심지인 거대 세계도시에 있다.
 
여기에 우리 역사가 가진 독특함이 결합된다. 지난 50년간 국토균형발전, 수도권 인구집중 방지 정책이 유지되었던 유일한 부문은 대학이었고, 돈, 사람, 문화시설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수도권이 2/3 이상을 가져가는 현실에서 비수도권의 대학은 전체 대학의 60%를 차지한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지방에 잠겨 있던 대학생들이 다양한 지방 경험을 갖고 서울로 올라와 풍부한 지방색 혼합 문화를 만든다. 잔인한 생태학이다. 서울로 올라올 사람들은 이미 다 올라왔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재 지방에 있는 10대들도 선배들의 길을 따라 20대가 되면 서울로 올 것이다.
 
 
 
도시는 잔인한 장치다
 
도시는 자신이 먹을 것을 생산하지 않는 사람들, 즉 비농인구(非農人口)가 모여 사는 곳이다. 도시의 발전은 논외로 하고, 도시가 지속한다는 그 자체가 어디선가 도시 사람들을 위한 식량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한꺼번에 많은 것들을 공급할 수도 없는데, 도시엔 1~2년 치 식량과 에너지를 보관할 창고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즉, 도시는 언제나 꾸준하게 끊임없이 일정량의 식량이 흘러오고, 매일 처리해야 할 폐기물들을 내보내는, 흐름의 안정성 위에서만 존재한다. 한달이라도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채소나 육류가 들어오지 않으면, 석유와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도시는 어떻게 되는가? 폐기물 처리가 파업 등으로 한달만이라도 멈춰버리면 도시는 얼마나 심각해지는가? 도시의 일상은 매일 ‘새로고침’이 일어나는 흐름 위에서 반복된다.
 
물자를 도시로 안정되게 이동시키기 위한 장치(dispositif)는 다양하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시장’이다. 지방의 농부는 같은 물건이라도 더 큰 도시로 보낼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받는 도시는 각 지방에서 올라온 물건들의 가치를 매긴다. 도시에 물건을 공급하는 모든 지방이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의 시장이 판단한 가치에 따라 몇몇 지방은 인근 동네에서 물건을 팔 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간다. 이 과정에서 지방은 자신과 주변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며, 심지어 교역을 위해 필요 없는 것들을 키운다. 시장 메커니즘은 도시에 필요한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들을 끌어오고, 가격과 경쟁을 통해 어떤 작물을 얼마나 많이 생산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과, 그 책임을 지방으로 돌린다. 이런 시장기능 없이 인구 천만의 도시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캠프와 권력체는 존재하기 힘들다.
 
비단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 또한 동일한 흐름의 메커니즘에 놓인다. 도시의 생산성 증가는 장치와 사람이 결합되어 일어난다. 서울이 성장하고 있다는 말은 서울의 장치가 좋아지고 여기에 결합된 사람들의 생산성이 향상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도시공간의 변화이다. 보다 좋은 대중교통, 늘어나는 편의시설, 공원과 문화시설의 증가, 이 모든 것들은 장치의 측면에서 도시의 성장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람의 측면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교육을 통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과 여기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갖는 사람들을 다른 곳에서 데리고 오는 방법이 있다. 물건의 끊임없는 공급이 도시의 존재 그 자체라면, 물자의 공급은 이를 소비하고 그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생산력 있는 사람들의 공급에 달려 있다.
 
20세기말까지 현지의 출산, 교육을 통해 새로운 인적자원을 형성했던 국가 시스템이 있었다면, 우리가 사는 오늘날은 외부의 생산성 높은 인재들을 데려올 수 있는 금권의 시대이다. 우리는 청년수당, 신혼주택 등 젊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 서비스에 어느순간 익숙해졌다. 국가 안에서 서울이 그렇고, 국제적으로 기존 제국의 중심들이 그렇다. 이렇게 다른 곳에서 교육받은 젊은 노동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경쟁의 뒷면에서, 그곳에 살던 생산성 낮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사라져간다. ‘살아 있게 하기, 죽게 놔두기’라는 통치성 속에서, 이 풍경은 감춰져 있다.
 
 
 
서로 배치(背馳)되는 도시와 사람의 안정성
 
도시와 사람의 안정성 추구는 서로 상충한다. 도시에서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로 도시 인구가 성장할 때조차도 도시는 외부에서 노동력을 부르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합계출산율 1.5 미만으로 인구의 현상 유지도 불가능하다. 이 상황에서 로봇의 도시가 아닌 이상 수위도시의 성장은 주변과 하위도시에서 사람을 흡수해야만 가능하다. 도시에는 많은 장치들이 누적되고, 이 장치와 결합할 사람과 물건이 오가는 역동 속에서 도시가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만 있으면 도시는 늙어가고, 생산의 중심이 아닌 자산의 중심인 부촌이 되든가, 아니면 활기 없는 도시로 축소된다.
 
이 과정에서 도시에 남을 수 있는 사람들은 사회가 결정한다. 이념형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주거권을 보장할 수도 있다. 한번 이주하면 죽기 전까지 머물 수 있는 권리를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것을 ‘도시권’ 혹은 ‘주거권’으로 부른다. 이는 인권에 기초한 ‘사람답게 살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이 권리는 역설적으로 1980년대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변화와 함께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면서, 즉 주거권이 약화되면서 등장했다. 보편성이 깨지면서 인권, 노동권 등 ‘권리’라는 ‘말’이 생기는 법이다.
 
장소에 고정된 장치와 이 장치에 결합될 사람을 생애주기를 고려해 안정적으로 배치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인류 역사에서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국가의 힘은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국민을 생산현장에 얼마나 잘 배치할 수 있는지, 국민이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일자리와 집을 얼마나 잘 공급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행복추구권 등 국민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규정되고, 이와 함께 국방의 의무 등 국민이 해야 할 일들이 명시됨으로써, 국가·국경·인구의 안정성이 국토 단위로 확보되는 시기를 겪었다. 국가발전계획, 국토종합계획, 경제개발계획 등 명칭을 달리하는 많은 계획들이 세계 곳곳에서 행해지고, 이를 통해 하나의 국토라는 틀에서 생산장치와 노동력을 교육, 훈련, 배치시키는 전략들이 나타났다. 1980년대는 세계도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면서 기존 국가—국토—국민의 안정성을 깨뜨리고 국가 단위를 초월한 세계 자본의 흐름이 등장한 시기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주거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하지만 주거권이 거론되는 지금 상황은 예전보다 살림살이가 나아져서 기준이 올라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전부터 주거난은 심각했지만 살기 위해 움직일 수는 있었다. 도시에는 소득이 적은 사람을 수용(收容)할 작은 마을이 있었고, 집을 나눠 쓰고 적은 돈을 빌려주는 관습이 행해졌다. 정부 또한 국토균형발전, 도시낙후지역 개선 등 도시빈민을 내쫓고 수용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살 수 있는 서식지를 찾는 일, 특히 도시에서 찾는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오롯이 개인의 일이거나 국가의 일이 되었다. 빈민을 수용할 ‘사회’는 희박해졌고, ‘주거권’과 ‘도시권’이란 말은 더 강해졌다.
 
 
 
도시인간과 경제인간
 
경제인간(Homo Economicus)만큼 도시인간(Homo Urbanus)은 인간과학의 주요 화두이다. 도시를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는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고 삶의 방식을 만드는 필수조건이 되고 있다. 도시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지만 결코 도시를 벗어날 수 없는 삶이 늘어간다. 하지만 도시의 장치들은 도시인간이 아닌 경제인간에 토대를 둔다. 이 엇갈림에서 ‘주거권’과 ‘도시권’이란 말이 작동한다. 보다 깔끔한 외관과 편리한 시설들이 나날이 늘어나며 생산성 높고 활발한 모습으로 변태하는 도시의 광장은, 도시의 오가는 사람과 물자들, 도시 서비스들의 공간적 집중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하는 일군의 무주택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몇십년 동안 시설을 손보지 않았던 낙후지역은 지금까지 저소득자의 도시생활을 보장했지만, 이제 그곳은 보다 생산성 높고 자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기존 거주자들은 쫓겨난다.
 
경제인간과 도시인간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이들이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한국어판 유강은 옮김, 그린비 2010)에서 나온 ‘다양성’ 개념에 주목했다. 제이콥스에게 도시빈민촌은 도시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혁신이 탄생하는 인큐베이터이다. 20세기초 시카고학파의 도시학이 파악했던 것처럼, 쫓겨난 사람들은 그들을 쫓아낸 곳의 가치체계와 다를 뿐 생산성이 없다고 결정된 자들이 아니다. 제이콥스는 자산 가치에 따라, 혹은 사회문화적 자본에 따라 섣불리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저렴한 공간들을 보존하는 것, 또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다양한’ 공간의 존재가 미래의 혁신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즉, 사람들에게 도시에 머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일, ‘도시인간’에 바탕을 둔 사회적 합의는 미래 도시의 ‘경제인간’을 키운다.
 
이미 반세기 전에 그녀가 말했던 ‘다양성’이 보장되는 도시 이야기는 많은 인도적 계획가, 정책담당자에 의해 회자되었지만 우리는 늘 그 반대의 측면을 보아왔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굳이 여기서 미래의 자원이 될 만한 사람을 키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든 도시는 더 높은 임금, 더 높은 대우를 제시하며 어디선가 혁신을 일으켰던,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올 수 있다는 믿음에 빠진다. 지역의 수재가 서울로 가고, 서울의 엘리트가 해외로 나간다. 도시의 값싼 노동력 또한 임금이 더 싼 지역의 노동자들을 수입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늘어간다. 1980년대 이후 국제이주가 활발해지며, 도시는 미래를 자신의 인큐베이터가 아니라 다른 도시의 중심에서 찾는다. 다양성이 사라져 대도시는 죽어간다던 제이콥스의 생각과 반대로, 대도시는 살고 그나마 다양성을 보장했던 더 작은 도시들은 죽는다. 
 
또한 혁신을 보장한다던 빈민촌은 새로운 인구를 탄생시키는 곳이 아니라, 기존 국가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아주 작은 복지로 연명하는 고령자 마을이 되어갔다. 도시 사회에서 생산력이라는 잣대로 하나의 범주가 되어버린 이주자, 장애인 등 도시약자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자산 없는 젊은이들이 공생이 아닌 ‘공존’, 그저 함께 있을 뿐이다. 이들 집단은 공간을 공유하며 삶의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집주인—세입자 관계처럼 포식관계에 놓이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마저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2015년 제이콥스가 미래도시의 인큐베이터라 말했을 법한 도시 빌라(다세대, 다가구 주택)의 반지하는 2010년에 비해 30%에 가까운 15만4천 가구가 감소해, 전체 가구의 약 1.9%인 36만4천 가구에 불과하다. 옥탑방은 0.3%인 5만4천 가구이다. 서울에서 한달에 주거비 50만원을 낼 수 없는 경제인간은 그가 도시인간이라면 중심에서 밀려나 다른 도시를 찾아봐야 한다.
 
 
 
부유하는 중산층의 세상
 
IMF 금융 위기 이후 ‘중산층의 위기와 몰락’은 논문과 언론에 종종 등장하는 문구였다. 정말 몰락했을까? 당시의 중산층 중 많은 이들은 그동안 누리던 삶의 환경을 잃었고, 생존의 위기까지 겪었다. 그렇게 중산층이 망해갔지만, 지금 서울 곳곳의 소비문화에는 중산층이 없다면 불가능한 장면이 펼쳐진다. 도시는 또다른 중산층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중산층이라는 범주가 망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중산층이 망했을 뿐, 도시는 중간계급들의 노동과 소비로 움직인다. 이 유동성이 서울을 발전시켰고,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성장했던 방식이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에서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는 대도시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세습이었다. 전근대의 신분이 세습되듯이 부유층의 자녀들이 부유층이 되지만, 중간계급은 사회변화에 따라 그 지위의 세습을 보장받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도시는 새로운 중간계급을 창출하며 활력을 받고, 그래서 오히려 중산층의 세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중산층의 위치는 이 도시에서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도시 외부의 능력 있는 사람들의 몫이거나 혹 능력을 발휘할지 모르는 더 젊은 사람들의 미래이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식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존 중산층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있을’ 빈민의 유능한 자식들이 끊임없이 유입되면 될수록 도시의 생산성은 높아진다. 그렇기에 어제의 중산층이 망하고, 오늘의 중산층이 위기이지만, 도시의 중산층은 늘어나고 도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더 상승한다.
 
중산층을 위한 주택, 중산층이 소비하는 상가, 중산층이 누릴 수 있는 문화시설 등등, 도시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 및 공간계획은 점점 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다. 도시 공공성 확보를 위한 빈민정책, 사회정책, 보건정책과 도시의 경제적 이익동맹과 같은 상인정책은 힘이 약해지고, 도시의 소비문화를 위한 스펙터클은 강화된다. 세계도시의 경제에서 관광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다. 한 도시의 중산층이 소비하는 공간들은 도시의 역사에 따라 장소적 특수성을 갖고 있지만, 소비하는 방식은 다른 도시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어느 도시의 중산층에게도 낯설지 않다. 이는 20세기말부터 ‘도시풍경학’이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수천년간 다른 특징들을 쌓아온 도시가 어떻게 동일한 풍경이 되어가는가?’
 
제3세계부터 선진국까지 대도시 풍경이 비슷해지고, 세계도시 네트워크를 따라 사람과 물건 들이 움직인다. 1년 이상의 거주를 기준으로 판단하던 국제이주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관광, 교육, 일자리 등을 나누어 판단하던 국경 통제는 곤란해지거나 국가연합에 의해 스스로 포기했다. 유럽연합은 센겐조약을 통해 국가간 교육과 노동의 경계를 없앴고, 이로 인해 유럽 대도시간 흐름은 폭발했다. 이와 함께 유럽 중산층은 더욱더 수위도시로 이동하면서 도시의 풍경을 동질화시켰다. 오늘날 유럽에서 중산층을 대상으로 움직이던 흐름에 생존 공동체인 난민이 등장하면서 심각해진 유럽 국경 문제를 보더라도, 세계 대도시는 교환가능하고 대체가능한 유동적인 중산층을 위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자의 이동 또한 도시간 네트워크를 따라 증가한다. 국제교역의 대부분은 농촌과 도시가 아니라 도시와 도시 사이에 이뤄지며, 세계 수위도시들 간의 교역 비중이 커진다. 규모가 작은 도시는 망으로 연결된, 자신보다 더 큰 도시에 종속되고, 규모가 큰 도시끼리는 사람과 물건의 흐름을 순환시키는 공생관계를 구축한다. 토오꾜오, 상하이, 베이징, 서울 등 대도시의 소비공간을 채우는 물건들은 하나의 흐름 속에서 움직이며, 이를 매개하는 사람들 또한 흘러다닌다. 주변을 돌아보면 언제부터인가 주변 세계도시를 유랑하듯 노동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다른 도시에 살던 사람이 바로 내 이웃이 된다. 중산층의 세상이 된 도시에서 불안정한 중산층은 고정된 자본을 갖고 정착하는 자산가가 되거나 세계 어디로나 이동할 수 있는 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물건들의 가치
 
화물 수송과 항공 여객의 폭증. 대도시가 특정 물품을 원하면 전세계 물류 시스템이 이에 맞춰 반응한다. 우리가 먹는 농산물, 축산물 들은 가격 급등을 방치할 틈도 없이 먼 거리를 이동한 물품들로 채워진다. 그중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것은 움직이기 힘든 것들이다. 즉,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의 가격은 낮아지고, 움직임에 저항하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은 가치를 보존한다. 대도시의 물가 중 움직임이 불가능한 집값, 땅값, 문화재와 결부된 상품들의 가격은 급등하고, 언제나 이동시킬 수 있는 공산품의 가격은 폭락한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다국적 기업 CEO 1명을 다른 대륙으로 보내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 해외수당, 자녀교육비, 의료보험, 교통비 지원 등은 점점 더 높아져 작은 생산라인에 결합한 노동자들 전체 인건비에 버금간다. 도시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은 이주 문제를 피하는 국제 노동력 송출회사 네트워크에 따라 캠프 형태인 패키지로 공급되고, 그들은 자신이 노동한 도시의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다. 반면 중산층은 기술자격과 경력 등, 장치와 결합할 능력을 증명함으로써 예전보다 쉽게 도시를 이동할 수 있으며, 임금은 그 이동 가능성에 따라 결정된다.
 
고정된 건물, 집의 가치가 폭등하는 것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도시 기반시설의 가치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독점지대를 전유하는 부동산 임대료 시장은 기존 도시들이 발전한 궤적을 따른다. 중산층으로 도시를 떠도는 사람들, 일시적인 관광이든 아니면 중장기 노동이주이든, 이들은 자신이 머무는 곳의 자산을 획득할 수 있는 사회자본이 빈곤한 사람들이다. 한 도시에 여러 세대가 머물며 축적한 자산을 세대를 거쳐 전달받은 도시의 상속자들은 새로 방문한 중산층으로부터 공간 사용료를 받으며 자산가가 된다.
 
노동이 지리적으로 긴 시간 동안 안정되었던 이전 시기, 젊은 노동력은 미래의 노동력을 담보로 국가로부터 주택을 제공받았고, 대기업에서 중소기업까지 규모를 기준으로 수립한 장기적인 산업정책에 맞춤하여 도시계획의 틀이 세워지고, 공장과 사무용 건물 들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았던 1970~80년대의 젊은 노동자들이 임노동관계가 확정되는 순간 누렸던 이 혜택을 오늘날 우리는 기대할 수 없다. 부모가 한 세대 동안 모았던 자산이 있는 곳이 나의 노동 공간과 멀어지면서, 그곳의 집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임대하거나 매각해야 할 자산이 되었으며, 그때 나는 앞으로 노동할 공간인 보다 큰 규모의 대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더 높은 가격으로 자산을 다루게 될 것을 욕망한다. 반대로 중소도시에서 대도시로, 세계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수위도시의 상속자들에게 높은 임대료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도시의 자산은 에어비앤비 등을 통해 노동시장의 리듬에 따르지 않고 일단위로 쪼개진 활용 시간표를 갖는다. 초단기부터 장기까지 대도시 부동산의 자산활용은 점점 고도화되고 일자리를 위해 이주하는 사람들은 일단위로 계산되는 임대시장에서 장기적인 주거 안정성을 구매해야 한다. 이때 독점공간 상속과 이동하는 노동 간의 긴장은 노동력 확보에 오히려 방해가 되며, 도시정부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역설에 빠진다.
 
주거비 폭등에 따른 도시 자산가치 확대는 한편으로는 도시로 유입되는 자본 증가를 의미하고, 이는 세수 증대로 이어진다. 기존에는 지하철 건설, 공원 조성 등 기반시설 확충을 통해야만 했던 도시자산 확대가 사람의 이동량 증가와 상속자들의 자산 카르텔로 이제는 정부의 신규투자 없이 가능해진다. 또한 관광 등 상행위의 발전으로 개별자들의 이익추구 행위가 도시공간의 위생과 치안을 정부 투자 없이 해결해버린다. 반면 외부의 노동력을 유입하는 기준이 되는 최저임금의 상승은 기준 이하의 임금을 줄 수밖에 없는 일자리들을 빠른 속도로 감소시키며 서비스 산업을 고도화시키지만, 동시에 이 과정에서 양산된 저임 노동력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와 얽힌 사회문제를 떠안는다.
 
 
 
우리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가
 
100년 전 시카고대학의 일군의 사회학자들이 제시한 도시생태학의 출발은 시카고로 이주한 폴란드 농민들에 대한 연구였다. 그들은 왜 미국으로 왔을까. 조사와 관찰을 통해 연구자들이 제시한 명제는 폴란드에 남은 자와 떠난 자는 점점 다른 태도를 가지며, 그 이유는 떠난 자의 가치정향이 이주해 온 시카고 마을의 경제생태계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고향에 두고 온 친척들보다 현재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삶이 결정된다. 현 거주지에서의 갈등, 위기는 새로운 곳으로 이주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이동하고 정착하면서 구축되는 생태계는 기존 질서를 바꾸며 새로운 장소를 만든다. 그리고 새로웠던 생태계는 지배적 생태계로 촘촘해지고 이에 적응할 수 없는 또다른 이주민을 낳는다.
 
시카고학파에서 출발한 오늘날의 사회학, 지리학, 도시학의 ‘근린’ ‘마을’ 개념은 이렇게 등장했다. 근린은 단순히 이웃에 인접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정착한 이곳에서 삶을 이어나갈 에너지의 순환고리인 생태계다. 앞서 언급한 제이콥스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며, 우리의 달동네를 슬럼과 구별하며 삶이 살아 있고 미래를 위한 현재의 고된 서식처로 논하는 감상도 동일한 토대를 갖는다.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이주민인 도시에서 시카고학파의 관점은 ‘사회’를 탄생시키는 훌륭한 관찰지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시카고의 도시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자산 상속자들의 공간인 유럽도시에서 주목받기 힘들었다.
 
10여년 전부터 회자되는 ‘마을 만들기’ 등 근린의 강조, 도시에서 떠날 수 없지만 쫓겨나야 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도시권과 주거권 운동은 기존에 새로운 벌판에 모여들어 도시가 성장한 과정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갖는다. 현재 40대인 1970년대생 다수는 안정된 주거를 위해 교외 신도시와 그 인근으로 이주했지만, 그 자식들이 인근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 더 확장해서 기존 도심에서 일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안정된 거주를 찾아 외곽을 찾아 새로운 ‘근린’을 만들었으나, 그 자산은 미래 세계 어느 도시인가를 떠돌며 노동해야 할 자식들에겐 자기 삶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터전이 아니라 교환가치에 따라 비싸게 활용해야 할 자산일 뿐이다.
 
반면 도시 내부에 빠르게 자산을 획득한 세대들의 자손, 지방에서 부를 획득했지만 그 부의 전부 혹은 일부를 수위도시로 이전한 세대들은 자산규모에 따라 떠돌지 않아도 되는, 혹은 보다 쉽게 떠돌며 이 자산을 경제가치로만 환산할 상속자들을 만든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고 비슷한 지역에서 일하며 도시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질적인 동시대 도시인은 드물어진다. ‘지금’ 주변의 동료들이 보는 ‘지금 이 공간’의 경험은 상이하다. 도시 생태계를 만들며 함께 장소를 공유한 기억들이 시간이 흐르며 축적되어야 하지만, 도시는 빠르게 변하고 시간이 흐르며 생태계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바뀐다. 동질적인 도시의 기억은 동네 해설가 등 관광 가이드의 말과 다큐멘터리에서나 만들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의 공존법인지도 모른다.
 

 

남는 질문들


3  도시 안에서 (주로 ‘마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사람이 늘어난 지난 몇년의 흐름을 생각한다면 꽤 비관적으로 읽힌다. 이런 소규모의 운동들이 앞으로 도시의 풍경을 바꾸기는 어려울까?
 
임동근  우리는 ‘비관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도시를 읽어야 한다. 마치 노동운동이 ‘선한 약자’의 운동이 아닌 것처럼 도시 운동은 ‘좋은 삶’이란 규범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공동체’는 선악, 진리/거짓 중 좋은 것만을 담고 있는 ‘빛’이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수식하는 ‘바람직한’ 혹은 ‘좋은’이란 형용사를 감추며 ‘공동체’를 말하지만, 이 형용사는 들뢰즈의 말대로 ‘악마’이다. 그 누구도 ‘공동체는 바람직하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지만, ‘(바람직한) 공동체’는 규범처럼 떠돌아다닌다. ‘숨겨진 말들’로 작동하는 운동은 망할 수밖에 없으며, 망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폭력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도시는 ‘자신의 먹거리’를 돈 주고 외부에 의존하는,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집합이고, 이 안에서의 운동은 이 의존성을 깨는 순환을 상상하지 못하면 언제든 국가 내부 아니면 외부에 있는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는 시스템에 포함된다. 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도시에서 빠듯한 돈을 받는 나는 먹을 것과 물건 들을 나에게 더 싸게 제공해줄 사람이 있어야 생존한다.
 
도시의 이런 현실 속에서 ‘다르게 사는 운동’은 생존의 생태계를 어떻게 구축하는지에 달려 있다. 물론 이는 어느순간 작품처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자, 의료인, 농업종사자 들을 먹여 살리는 교육, 의료, 식량 등 다양한 부문의 생태계가 있으며, 이들 간의 느슨한 연결도 본다. 이 네트워크는 도시의 풍경을 바꿀 수는 없어도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
 
3  세계도시의 관광 수입이 증대하는 것과 그 도시들의 풍경이 닮아간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어딜 가나 비슷하다면 관광하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싶다.
 
임동근  인류학적인 질문이다. 아직까지 하나의 답은 없다. 왜 유럽에서 한국에도 있는 스타벅스엘 가고, 여기서도 살 수 있는 브랜드의 옷과 화장품을 구매하는가? 여행은 장소의 특수성을 소비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구별짓기, 또래집단의 동질성 확인 등 다양한 이유를 갖는다. 하지만 현재의 대도시 관광 흐름이 동질성 위에서 작동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에어비앤비, 연결된 스마트폰 등 도시간 동질성이 커질수록 흐름도 늘어난다.
 
3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의 공존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하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소개해줄 수 있을까?
 
임동근  1950년대 우리나라에서 인구 센서스를 할 당시 20대였던 이들은 갑오경장, 동학농민운동을 목격한 사람들과 함께 살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80~90대인 이 사람들과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이 함께 산다. 도시의 경제활동 인구는 세대폭이 매우 좁아서 실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긴 시간대를 갖고 움직이는지 쉽게 느끼질 못한다. 도시는 언제나 젊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장치이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그렇다. 현재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10년 전에는 어디서 일했는지,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보면 우리는 정말 넓은 지역의 경험들을 서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기서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 같지만 실제 노동환경에선 점점 더 공간 경험의 다양성이 늘어간다. 이런 맥락에서 특정 가치를 따르고, 인식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운동이 한정된 공간을 가진다면, 이미 다른 요소들을 배척할 수 있는 권력관계가 구축되었을 때다. 따라서 근린을 중심으로, 정주성을 바탕으로 하는 운동들은 다양성을 수용하기 힘들 수도 있다. 대신 공간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운동, 특정한 시간, 특정한 공간을 자신들의 운동으로 점유하고, 이후 곧 자신과는 다른 이들을 위해 시공간을 넘겨주는 운동들을 상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봐온 지속되는 운동은 이와 어느정도 유사한 성격을 가졌다. 용산철거민 사망 이후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하나의 동질성을 파악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었고, 몇년 전 대통령 탄핵 전후의 군중은 서로 배척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주장을 펼쳤다. ‘인간’ 자체를 ‘동지’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파악하지 않는 이런 운동들이 도시에서 펼쳐진다.
 


임동근
정치지리학 연구자. 지은 책으로 『서울에서 유목하기』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공저), 『한국현대 생활문화사』(공저), 옮긴 책으로 『관찰자의 기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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