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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곳과 사는 법' 기획의 말

문학3
2018년 10월 02일
 



‘우리(나)는 무엇(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오랫동안 문학의 과제였다. 문학은 그 답을 단정하여 말하는 대신 희로애락 속에 명멸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그럼 앞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말하자면 문학은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제시하는 것으로 그 답을 대신한다. 그러나 저 문답이 썩 친절한 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체로 그 내용 속에 다른 요소들이 녹아 있기 때문이지만, 통상적인 육하원칙을 따르더라도 ‘언제’와 ‘어디서’ 등이 빠져 있다. 여기서 시공간(언제와 어디서)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방법(어떻게)을 결정하는 구조에 가까울 것이다. 어떤 질문은 그것을 뒤집어놓았을 때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물론 이런 유(類)의 물음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품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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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곳과 사는 법’이라는 주제에 주목한 것은 ‘삶의 공간’, 곧 ‘거주’와 그것을 둘러싼 ‘욕망’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한편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감각’이 무엇인지 모색하기 위해서다. 거주지 또는 거주형태에 따른 격차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배제와 배척의 ‘사건’들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사회적 취약 계층과 청년들의 주거 사정과 무관하게 부동산 가격 하락이나 임대 수입 감소를 이유로 임대주택 건설은 물론 대학 기숙사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우리는 자주 본다). 또한 일상의 내부에서 이웃의 삶에 관여하며 정상가족 프레임을 통해 약자와 소수자를 규정함으로써 가해지는 폭력들은 이제 익숙한 공포가 되었다. ‘소유’를 둘러싼 부조리에 분노하면서도 내밀하게는 그것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모순까지 생각하다보면, 아무래도 우리는 함께 사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닌지 되묻게 된다.

알다시피 저 욕망이 처음부터 우리의 욕망이었던 것은 아니다. 욕망은 종종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그 욕망을 부추긴다는 내적 결핍은 자주 기획되곤 한다. 우리의 삶이 자본의 숙주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과한 표현일지라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감각’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본의 침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소한’을 통해 ‘최대한’의 ‘우리’를 발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이 또한 문학의 일이니까 말이다. 그 욕망과 감각의 무늬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새겨져 있다는 문제의식을 통해, ‘도시분포’ ‘거주방식’과 더불어 ‘가족구성’을 둘러싼 갈등과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이번 주목에서 언급되는 문제들이 ‘지금/이곳’을 건너가는 또다른 시도이자 시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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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도시의 발전 과정과 형태, 그것이 반영하는 욕망의 본질에 대한 점검이 필요했다. 임동근은 ‘생산 집중력’을 통해 자본과 물질의 흐름도 속에서 도시의 역사를 파악하고 그로부터 드러나는 특징들을 차분하게 되짚는다. 생산성이 축적된 도시의 공간적 지위를 독점하는 정주자들과 생계를 위해 끝없이 유동하는 이주자들이 도시 생태계를 형성하며 ‘장소’의 가치와 ‘생산성’을 끝없이 교환하는 과정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의 공존법”이라는 말은, 한 장소를 인식하고 전유하는 방법의 차이가 각자의 삶을 고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처럼 들리기도 한다. 인아영은 황정은 권여선 김혜진 최정화 구병모 김의경 이유 등의 소설을 폭넓게 다루면서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공간과 거주의 양상을 살핀다. 그에 따르면 최근 소설 속의 공간은 ‘차단’과 ‘연결’의 연속성 속에 놓여 있는데, 이때 차단은 타의적인 단절보다는 자의적인 권리에 가깝고 연결은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하는 소통의 과정보다는 공포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어려움은 비단 계급(취약계층)의 문제일 뿐 아니라 여성의 문제이며, 나아가 소수자와 그들의 정체성 문제로 귀결된다. 박세미는 시인이자 건축전문 기자로 일한 경험을 살려 가구수 또는 가구에 대한 인식과 구성원 변화에 따른 구축 형태의 변화와 그 사례들을 조목조목 가져온다. 좀더 나은 삶과 사람 간의 소통이 건축가의 세심한 설계에 의해서도 기획된다는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실체로 말해왔던 ‘구조’의 또다른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 흥미롭다. 예술과 건축의 만남, 그들이 기획하고자 하는 ‘공동체’(이 글에서는 ‘지역사회권’ 등)의 행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는 장소, 삶, 기억이 어떻게 구성되고 또 비록 참담하나마 빛을 발하는지를 섬세한 문장으로 되살려낸다. (앞선 필자들의 말처럼) 그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신뢰와 공존의 공동체가 환상의 영역으로 사라지고 다만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말하는 쓸쓸함과 허허로움에 기대어 우리는 그 안에서 그 너머의 의미와 뭔가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무언가를 ‘사유’할 수 없으며, 영영 찾을 수 없는 해답을 찾아 헤매는 것이 또한 ‘언어’의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문학의 방법이란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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