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SHARE
2

남쪽과 북쪽, 그리고 디아스포라

박대우
2018년 11월 30일

 

  

'키워드3' 다섯번째 키워드는 '남'과 '북'입니다.
올 한해 굵직한 일이 많았던 남북 이슈를 개별 시민의 시선으로 만나보려고 합니다.

1회: 이원하 「문은 문이라서 열린다」

댓글과 투고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투고하실 분은 12월 31일까지 이메일 munhak3@munhak3.com으로 A4용지 3장 이내의 완성된 글을 보내주세요.
한분을 선정해 연재의 마지막 지면과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한분께는 신간 『한반도 특강』을 선물로 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남북 화해국면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활발한 토론을 
기다립니다.


남-(디아스포라)-북

 


 
1. 남쪽
 
“훈장을 받고 아야진 바닷가에서 철없이 장난으로 바라보던 한가위의 교교한 달.”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전방의 전투를 마치고 고성 아야진 바다를 들렀던 일을 회고록 『역정: 나의 청년시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과연 이곳 아야진의 보름달은 썩 맑고 밝아서 해변에서 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노라면 묘한 상념에 사로잡힌다. 지난여름 어느날에도 그렇게 해변에 앉아 멍 때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남들은 다 나와 있는데 너는 뭐 바쁘다고 안 나오네?”
 
“대장님, 정말 왜 그러세요. 제가 집에서 노는 게 아니라고 매번 말씀드리잖아요. 예?”
 
작년 여름 경기도 일산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오면서 가급적 사회활동을 자제하자고 마음먹었으나, 이렇게 결심한 나도 정작 피해가지 못한 게 하나 있다. 바로 이곳 마을의 의용소방대 일이다. 산불이 잦은 지역인데다 인구수 비례로 소방서도 몇군데 안되는 곳이라 마을에 청년들이 들어오면 어떻게든 가입이 불가피한 것이다.
 
문제는 소방대 일은 시시때때로 생겨나고, 나는 마을 어른들이 부르기 딱 좋은 재택노동자라는 점이다. 그날 소방대장 어른이 전화를 걸더니 다짜고짜 저렇게 소리 지르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무렴, 창창대해를 논밭 삼아 제 힘으로 고기를 길어올리는 어부가 보기에는 나 같은 2차산업(제조업) 종사자는 그저 일하지 않는 자일 수도 있겠다. 다만 나도 어떻게든 그게 아니라고 말씀드려야 이곳에서 편히 지낼 것 같아 저렇게 맥없는 대꾸를 던져보는 것이다.
 
실은 소방대장이자 영전호(가칭) 선장이신 이 어르신께는 몇번이나 “소방대 일, 이제 못하겠다”라고 말씀드린 터였다. 정기모임에 나가 얼굴을 비치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 출석률이 또 모임의 월별 지원금을 책임져주니 아무리 바빠도 출석은 하려고 한다. 다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건 제복과 제식. 어느날엔가 행사에 불려갔다가 수많은 어른들이 잔뜩 얼어붙은 모습으로 경례를 붙이고 여러 다양한 제식을 끝까지 치르는 것을 보며 나는 그만 아찔해진 것이다.
 
 
2. 북쪽
 
한달 전 정기모임, 그날도 단단히 마음먹고 ‘그만둔다고 언제 말씀드리나’ 생각하며 자리를 보전하며 앉아 있는데 어느새 술판이 벌어졌다. 근 며칠간 비가 내려서 다들 뱃일도 논일도 못 나가는 때였고 그러다보니 간만에 술자리가 반가우셨던 것 같다. 금세 만취해서는 어릴 적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바다 옆에 살았으니 마을 선배들의 수영 실력은 굳이 말할 것 없겠다. 다들 하나씩 무용담을 꺼내놓는데 그게 진실이냐고 되묻는 내게, 아주 세세하게 물속의 지형을 이야기해준다. ‘흠, 이건 뭐 완전히, 용궁에 다녀왔다는 건데……’ 생각하며 사실관계와 출처를 따져묻다가 어느덧 나도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말인즉슨 이 자리에 없는 ‘만철이 형님’이 수영에선 첫손에 꼽히는데, 그분의 실력을 말할 것 같으면 “너, 저기 돌섬 알지? 거기까지 가서 이만한(손가락 끝부터 팔꿈치까지를 가리키며) 섭(홍합)을 캐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거품이 끼었든 아니든 그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건, 허구 속에 잠시 끼어드는 고백들 덕분이다. ‘그때 실은 내가 고기 다 훔쳐갔다’ ‘그걸 이십년이 지난 지금 이야기하느냐’ 등등, 어느새 이런 케케묵고 훈훈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제 못하겠다’는 말이 쏙 들어가버렸다. 그날도 내 배알 없음을 탓하며 집으로 혼자 걸어오면서는, 이 사람들에게서 들을 이야기가 좀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긴 하다. 그들이 어릴 적 바다에서 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집에 돌아가 어른들에게 전해 들었을 세상 이야기, 스쳐 지나며 보았을 이곳의 풍경, 바로 그들 이주 역사의 단편이다.
 
이곳 아야진은 속초의 아바이마을 못지않게, 1945년 해방 이후 북으로부터 이주한 인구 비중이 높은 곳이다. 여러 지리지마다 말은 다르지만 적게 잡아도 마을 인구의 70%가 함경도와 강원도 이북 지역을 고향으로 두었다. 그들은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에는 인제와 설악산에 진지를 구축한 미군의 동해안 진격 루트를 안내하는 일을 맡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해안가 땅에 촘촘히 터를 잡고 어업에 종사해왔다. 그러고는 이곳의 항구를 명실상부한 동해의 대표적 명태잡이항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마을 의용소방대 사무실로 가는 길은 두갈래다. 하나는 한적한 해변을 따라 걷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7번 국도를 끼고 걷는 길이다. 7번 국도를 따라 걷다보면 한눈에 봐도 버려진 듯한, 하지만 그 위용 면에서 심상찮아 보이는 비석이 하나 있다.
 
해독이 불가한 그 비석의 유래를 찾고자 동네 도서관에서 고성군의 인문지리지를 뒤져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 해답을 찾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구글에서였다. 그 자료에 따르면 이 비석은 조선시대 이 지역 유지였던 아무개 씨가 흉년 때에 마을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준 선행을 기리는 불망비(不忘碑)다.
 
구글의 자료 「고성군의 문화유적」은 어느 대백과사전의 일부를 공개한 자료인 듯한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효심 깊은 며느리나 지역 유지의 선행 등을 기리는 공덕비의 숫자가 다른 유적의 그것에 비해 많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시 국가(조선)가 산맥 넘어 이 지역을 관할하기가에 꽤 어렵기에 더더욱 국가철학(유교)을 심어주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남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대개의 유적이 해안도로 안쪽 깊숙한 육지 쪽에 자리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북 실향민들이 대거 이 고장으로 자릴 잡게 된 이유를 넌지시 일러준다. 다시 말해 바닷가 땅은 본래부터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다는 것이고, 정확하게는 본래의 토착민들은 대개 설악산 쪽의 비옥한 논밭을 가꾸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북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자 본래 이곳에 살던 이들이 순순히 해안가 땅을 내줄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으리라.
 
전쟁 이후에도 어선을 비롯한 대개의 어획도구들이 낙후하여 바다에 나가면 난파되는 경우도 잦았고 어획량도 많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곳 아야진은 이주자가 새로 일군 개척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 어업이 기계화되면서 해안가 사람들이 부를 축적했고 급기야 기존 내륙 지역과 이곳의 인구밀도를 역전시켜버린 것이다.
 
 
3. 디아스포라
 
이곳에 와서 살면서 마을 분들에게 고향을 여쭤본 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그분들이 내게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경우도 드물다. 간혹 묻더라도 대개는 ‘여긴 할 일이 없는데 젊은 사람이 여기 뭐 하려고 왔어’라는 염려 투다. 그분들의 거리두기가 어쩌면 그들 또한 수십년 전 이곳으로 이주해왔던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나 생각해본 적도 있다. 본인들이 이방인이었기에 누군가의 출신을 묻는 질문이 곧 자신에게 되돌아오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간파한 것 아닐까.
 
어느 집단의 이주가 하나의 문화 이식을 전제한다면, 아야진의 새로운 이주자들은 무엇을 이식했을까. 이런 거창한 질문에 어울리는 그럴듯한 답변은 없다. 다만 한가지, 그들의 질문 없음, 거리두기가 하나의 불문율이 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타의 엄격한 구분이 어떤 현대적 제스처가 아니라, 고래부터 전해내려온 디아스포라인들의 환대 방식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공상까지 해보게 된다.
 
『동해안 납북어부의 삶과 진실』(엄경선·장재환 지음, 설악신문사 2008)은 이런 공상에 한가지 어두운 진실을 덧붙인다.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들이 간첩으로 몰려 실형을 살고 나와 수십년이 지난 근래에 이르러서야 그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들은 적 있을 것이다. 북한과의 접경지역인 고성은 그 피해가 막심했다. 2008년 속초 경실련이 주최한 ‘납북피해자(어민) 피해보상신청 설명회’에는 당시 아야진에서 한분이 참석하여 “아야진에서 납북되었다 돌아온 사람이 모두 21명”이며 “당시 반공법, 수산법으로 처벌받고 4, 5년 뒤 사망한 분도 있다”고 발언했다.
 
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서 십수년을 지내다 나온 사람들. “만약 피해위로금을 받으면 정부에서 납북자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피해위로금 신청을 주저하게 된다”는 분들. 그들을 아직까지는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내가 매일 산책 삼아 휘젓고 다니는 이 마을에서 그분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설레게도 무겁게도 한다.
 
 
 
간혹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 문밖을 나설 때가 있다. 아주 어둑한 새벽, 전날 저녁부터 내내 바다에 있던 배들이 한꺼번에 항구로 들어와 그물을 풀어놓는 광경은 그런 모습에 익숙지 않은 내겐 별천지다. 항구 촘촘히 구획을 나눈 각 어판장에 불이 환하게 켜지고 배들이 들어오는 즉시 숨 가쁘게 그물이 펼쳐진다. 말없이 익숙하게 그물을 터는 이들 중에는 이주노동자들도 눈에 띈다.
 
이곳을 구경하러 오는 이들도 제법 있다. 대개는 말쑥한 차림으로 스포츠유틸리티 차량을 몰고 온 도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물에서 막 떼어져 어판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생선들의 이름을 용케 알아맞히며 그것의 가격을 묻고 흥정을 시작한다. 그들의 가격 흥정을 지켜보며 나 또한 그게 비싼 건지 싼 건지 머릿속으로 셈하고 있던 어느날 영전호 선장께서 나를 불러 세운다.
 
“어이, 만화가, 너가 여기 왠일인데?”(아무리 출판사 일을 설명해드려도 돌아서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만화가다.) “네? 저 그냥 구경 나왔는데요.” 그물을 내리자마자 벌써 술을 한잔하셨는지 이미 불콰해진 얼굴로 인사를 건네시는데 덥석 쥐어주는 검은 비닐봉지 가득 뭔가가 들어 있다. “가져가서 데쳐먹어. 오징어보다 맛있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본래 돈이 들어 있지도 않은 주머니를 괜히 뒤적거리다가 어어, 쫓겨나다시피 뒷걸음친다.
 
가족들은 여전히 잠든 때, 어쩌면 어제는 이북 오늘은 이남에서 유영하고 다녔을 저 꼴뚜기들을 부엌에서 조용히 다듬으면서 몇몇 장면들을 떠올린다. 영전호 선장께서 얼어붙은 얼굴로 경례 붙이는 모습, 빠지지 말고 꼭 나오라고 고함치는 모습. 그러곤 생각한다. 과연 이분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의 디아스포라에서 어떤 존재일까.
 

 
박대우
온다프레스 대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