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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동방: 단동의 매력

금희
2018년 12월 18일
 

 

  

'키워드3' 다섯번째 키워드는 '남'과 '북'입니다.
올 한해 굵직한 일이 많았던 남북 이슈를 개별 시민의 시선으로 만나보려고 합니다.
여섯명의 필자가 글을 준비했습니다.
세번째는 소설가 금희의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댓글과 투고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투고하실 분은 이메일 munhak3@munhak3.com으로 A4 3장 이내의 완성된 글을 보내주세요.
한분을 선정해 연재의 마지막 지면과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한분께는 신간 『한반도 특강』을 선물로 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남북 화해국면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활발한 토론을 
기다립니다.


남-(대화)-북

 


 
가을 초, 수년간 방치했던 시골집을 둘러보고 돌아온 남편의 말이었다.
 
ㅡ거기, 지금 난리도 아니더라. 시내는 말할 것도 없고, 다 찌그러져가는 농촌집도 강변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 됐어.
 
남편이 말한 '거기'란 단동(丹东)이였다. 북으론 본계(本溪), 서남으론 대련(大连), 안산(鞍山)과 인접한 요녕성의 중형도시. 남편은 그곳 시세가 올 들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5월에는 이틀 만에 무려 57%의 오름세를 보였다는 골목뉴스의 분위기를 직접 체감한 셈이다. 황해와 잇닿은 압록강 하류를 따라 그 동편으로 길게 건설된 단동은, 중국 내 가장 큰 대조선무역도시로서 근간에 보여진 조선정부의 파격적인 행보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년 전 아이의 교육문제로 고민하다가 우리 가족의 새 정착지로 진지하게 검토했던 후보지 중 하나가 단동이었다. 삼림피복율이 높고 기온도 맞춤한데다가 수질 좋은 압록강 덕분에 수산물이 풍부하여 우선 갑갑하지 않은 환경이었고, 걱정하던 민족교육이라면 12년제로 고등부까지 설치된 조선족중학교의 유구한 역사에 마음이 쏠렸었다. 240만 인구 중 당연히 한족(汉族), 만족(满族)이 가장 많고 그뒤를 몽골족(蒙古族)과 회족(回族)이 잇고 있다지만 조선족도 1만6천여명으로 비율이 꽤 높은 곳이다. 대조선무역도시답게 장단기적으로 단동에 머무는 조선인이 만여명을 넘는다는 추정이 있었고,* 한국인도 이젠 4000~5000명 안팎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일각에 있었다.
 
단동에 머무는 동안 나와 남편은 조선족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들었고, 어찌하여 한국인 식당사장 부부와 안면을 트게 되여 함께 강변의 여러 북한식당을 돌았다. 그곳의 여종업원들은 타도시의 북한식당 직원들에 비해 더 개방적이었고 스스럼없었다. 반대로 한인식당에서는 배지를 단 정장 차림의 조선인 손님들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었다. 한국상품과 조선상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동시에 존재했고 인공기와 태극기가 걸린 식당을 한 구역에서 볼 수 있었다. 실제로 그 도시에는 무역업, 제조업에 종사하는 조선인, 한국인, 중국 조선족이 상당히 많았고 3자간의 교류는 중국 어느 도시보다 일상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참, 여기는 우리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겠네요,라고 단순한 일차적인 느낌을 그대로 말하자, 민박집 아주머니가 웃으며 '제일 조심해야 될 사람이 그, 말이 통하는 사람이랍니다'라는 농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얘기는 일면 세 그룹 간의 입지의 부동(不同)함과 이익추구 과정에서의 갈등, 그리고 얽히고설킨 여러 관계의 혼잡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른 일면에서는 그들 간의 경제활동이 그만큼 활약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세 그룹이라 하지만 사실상 개인으로서는 그의 정체성이 한 그룹에 종속되어 있지만은 않은 경우도 퍽 많았다. 남이나 북에 살던 이가 전쟁시기 중국으로 흘러들어 조선족이 되였고, 그의 아들은 조선전쟁(한국전쟁―편집자) 또는 문혁시기 월강(越江)하여 조선인으로 살아가는가 하면, 그의 딸들 중 어떤 이는 지금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인 신분으로 단동에서 가게를 차릴 수도 있었고, 한편 북에서 살던 아들의 자녀는 단동 외곽에 새로 생긴 공장으로 취직해 왔을 수도 있었다. 때로 이 세 그룹은 서로에게 터무니없이 기대를 걸거나 서운해하기도 하고 필요 이상으로 상대의 결점을 부각하여 내리깎거나 행여 차별시한 대우를 받지 않을까 신경을 쓰기도 했다. 서로 간의 거래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부득불 교제를 하지만 그만큼 신뢰를 못하기도 하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런 기대와 낙담과 서운함과 관심이 꾸준히 현재 진행중이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단동과 같은 '실험장'의 가장 큰 의의란 그곳에서 남북의 상인들이 현실을 배제한 공상 속에서 화해와 통합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이고도 구체적인 흥정과 거래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비폭력과 존중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상생의 원리를 몸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난 뒤에는, 더 건강하고 열린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분위기가 그동안 형성이 된다면, 그곳은 과연 어떻게 변할까. 남과 북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하는 대화는 어떤 내용의 것이 되며 그 표정들은 어느 만큼 닮아 있을까.
 
그래서 단동은 내게 묘한 매력이 있는 곳, 재미있는 상상력을 부추기는 곳이 되었다.
 
 
 
끊어진 다리와 그 다리 너머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
 
 
단동에는 '압록강단교(鸭绿江断桥)'라 불리는 조선전쟁의 유적지가 있다. 1909년 일본이 식민지건설을 위해 중축을 시작했던 것으로서 1950년 11월 미군의 폭격으로 훼손된 다리다. 한반도에서 중국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국제 철도노선의 한 구간으로 설계되었다 한다. 한때는 다리 위 철로를 통해 물자운송이 활발히 이뤄졌고 연간 보도통행자만도 260만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중조간의 물자운송을 담당하는 교량으로는 그곳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건설된 철도와 도로 양용의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가 있다. 매일마다 내부를 볼 수 없는 화물차들이 각양의 짐을 싣고 그 다리 위를 왕래하고 있었다.
 
단교에는 유람객들이 끊이지 않았고 강변도로는 국경이라는 분위기를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단교에 올라 철제 난간을 따라 무너진 곳ㅡ압록강 중심부까지 걸어가면 강 저편의 풍경이 멀리 시야에 들어온다. 관목 숲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허름한 공장과 낡은 창고 같은 단층건물들, 무언가를 지고 메고 천천히 이동하는 사람 두어명. 강 하나를 사이두었을 뿐인데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 사는 듯 그쪽 시간은 훨씬 더디 지나는 것 같다. 강변에 서면 매양 볼 수 있는 그 건물들도 수십년간 아무 변화 없었다고 들었다. 저녁이면 강을 사이둔 양측 땅은 더욱 심한 대조를 연출했다. 한쪽은 나날이 높아지는 고층건물과 단교 위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한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했고, 반대편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한점의 빛 없이 고요하고 어두웠다.
 
그래서 중국인들도 한국인들도 이곳에 오면 신비의 베일에 싸인 조선땅에 최대한 가까이 가보기를 원한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을 거닐다가 그편 사람들을 향해 단마디 환성쯤 질러보는 것은 그런 식으로라도 그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다. 어떤 이는 더 가까이 가보기 위해 어부의 배를 삯 내어 어둔 밤을 틈타 강 저편 기슭까지 아슬아슬 가보는 모험을 한다. 어부에게서 주워 들은 대로 담배나 술, 다른 먹거리들을 선물로 챙겨 들고서. 운이 좋으면 마음이 어느정도 열린 사람을 만나 같이 술도 한잔 기울일 수 있고 더 내밀한 대화를 길게 나눌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곳을 한낱 색다른 풍경쯤으로 생각하는 여행자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다리는 이미 끊어졌고 자의든 타의든 그 너머에는 오랜 시일 '외계'와 매우 한정적인 왕래만 해온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고립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마음을 닫아건 사람과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 편하고 즐겁게 여겨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효과적인 대화가 중요해진 시기라 생각한다.
 
오랜 시간 끊겨진 다리 너머에서 살던 사람과의 대화는 필경 '일상적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와는 다른 구석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외부세계'. '일반세계'에서는 대체적으로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룰이나 가치관, 세계관이 그 부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보편성과 합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혹간 있을 수 있다. '당연히'라는 말은 언제나 전복될 수 있으며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또는 그 일 자체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의 마음자세로라면 대화 중에 훨씬 심각한 당혹감과 불편을 겪을 것은 오히려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만큼 대화의 출발점이 예상보다 더 먼 지점에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대화란 언제든지 끊기기도 하고 빗나가기도 하며 때로는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 그럼에도 대화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빗나감을 통해서라도 획득하게 되는 소중한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며 대화라는 방식이 아마도 서로 간의 막연한 바람을 최소한의 진통으로 구체적 현실화시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 반대의 경우 치르게 될 더 끔찍한 댓가 및 남기게 될 상처 때문이 아니겠는가. 끊어지면 다시 잇고, 빗나갔으면 되돌아오고, 다툼은 해결하면서 또다시 시도하는 의지를 가지는 것이 화자들의 바람직한 자세일 것이다.
 
냉전체계의 전형적인 후유증으로 남은 남과 북,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는 거대국가들의 힘겨루기가 자체 수습이 어수선한 지역들을 발판 삼아 진행되고 있는 상황, 현실은 항상 약한 자들에게 냉정하고 버겁고 잔인한데다가 긴박하다. 그러나 무화과 나뭇가지에 물은 이미 올랐고, 소리 없이 계절은 바뀌고 있는 중, 새봄에는 좀더 성공적인 대화가 남과 북, 그리고 주변세계에서도 이뤄지기를 내심.기대해본다. 
 
 
*강주원 「한국어를 공유하는 네 집단의 국민. 민족 정체성의 지형」 참고.
 
 

 
금희
소설가. 중국 지린성 주타이시에서 출생해 장춘시에 거주하고 있다.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 『세상에 없는 나의 집』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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