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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그려요

이주혜
2019년 02월 18일


소년의 집 벽에 또 붉은 글씨가 나타났다. 사탄은 물러가라! 붉은 스프레이 물감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소년의 집 전면 벽을 가로질렀다. 벌써 몇번째인지 모른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글씨를 발견하고 마루 밑에 넣어둔 시너 통을 꺼냈다. 익숙한 동작으로 천 장갑 위에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시너를 묻혀 글씨를 벅벅 문질렀다. 염병할 것들. 할머니는 간간이 욕을 뱉으며 글씨를 지웠다. 호랑이가 씹어갈 것들. 글씨가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할머니의 욕도 거칠어졌다. 썩어 문드러질 것들. 붉은 물감은 시너에 녹아 지워졌지만 흉한 얼룩을 남겼다. 소년의 집 벽은 지워진 글씨가 남긴 흔적으로 얼룩덜룩했다. 사탄. 물러. 괴물. 꺼져. 몇걸음 뒤로 물러나서 살펴보면 그동안 어떤 글씨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년이 보기엔 차라리 지우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게 오히려 더 깔끔할 것 같았지만, 할머니는 붉은 글씨가 보이는 족족 기를 쓰고 지웠다. 골목에 매캐한 시너 냄새가 배었다. 

글씨는 한 사람의 짓은 아닌 것 같았다. 스프레이 물감을 휘둘러 쓴 글씨로는 필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글씨 주인이 한명 이상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일단 ‘범인’은 동네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적어도 소년이 연루된 일년 전의 사건과 관련된 사람, 혹은 적어도 그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의 짓일 것이다. 할머니는 가장 먼저 그 사건 ‘피해자’의 가족을 의심했다. 소년과 파란대문집 아이 하람, 둘 중 한 사람이 던진 돌에 뒤통수를 맞고 넘어져 이마에 큰 출혈을 입고 아직도 중환자실에 있는 남자의 가족 말이다. 또 할머니는 파란대문집 부부의 개척교회가 급히 문을 닫고 동네를 떠나게 된 것에 앙심을 품은 열혈신도의 짓일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 특히 ‘사탄’이라는 말을 쓰는 걸 보면 예수쟁이가 틀림없다고 했다. 

하람이 동네를 떠나고 소년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중학교 교복은 고스란히 옷장에 처박혔다. 뒤통수에 돌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여태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한달에 한번 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갔다. 중환자실 입구에서 접수를 하고 병원에서 주는 파란색 옷을 걸치고 손 소독까지 마치고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맨 구석 침대에 남자가 누워 있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산소호흡기를 낀 남자는 평소 동네에서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소년의 가녀린 뒷목을 낚아채고 귓바퀴에 불쾌한 입김을 불어넣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긴 팔을 늘어뜨려 소년의 바지 앞섶을 주무르던 모습도 지워지고 없었다. 그저 퉁퉁 불은 살덩어리가 침대 위에 함부로 널부러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소년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침대 옆에 고개를 돌리고 앉은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할 수 있었다. 너 같은 새끼 한입 거리지,라는 비아냥을 들을 걱정 없이 살덩어리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여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 남자가 평소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년을 괴롭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면, 그 탁한 눈을 뜨고 소년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웃기라도 했다면,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는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병원에 가는 날이면 상추와 콩나물과 수세미를 팔아 번 천원짜리를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려 봉투에 넣었다. 소년이 중환자실에서 남자와 남자의 엄마에게 몇번이고 허리를 숙여 절을 하고 나면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남자의 엄마에게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단 한번도 그 봉투를 거절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꼬깃하고 더러운 천원짜리를 다리미로 다릴 때마다 소년은 그 다리미를 빼앗아 자신의 허벅지에 대고 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건이 일어나고 수사가 끝나고 하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동네를 떠나고 난 다음부터 소년의 집에 붉은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하람네처럼 소년과 할머니도 동네를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남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할머니는 끝까지 버텼다.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수군대고 등 뒤에서 손가락질을 해대도 할머니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평생 이 집에서 살다 죽는 게 이제 하나 남은 목표라고 소년에게 자못 비장하게 말했다. 버티는 할머니처럼 붉은 글씨도 끈질기게 나타났다. 

사탄아, 썩 물러가라!

괴물은 동네를 떠나라!

살인자!

붉은 글씨를 보이는 대로 지웠다. 집 외관은 점점 흉해졌다. 동네가 벽화마을이 되어 담장마다 꽃이 피고 새가 나는데도 소년의 집은 흉가 같아졌다. 

할머니가 ‘사탄’의 ‘탄’ 자를 지우고 있을 때 주황머리 여자가 나타났다. 

지우지 말고 칠하지 그래요?

처음 보는 여자가 불쑥 말을 걸었다. 

지울수록 힘만 들고 얼룩이 남아 흉해지잖아요. 차라리 다른 색으로 덮어버려요.

여자는 한낮의 태양처럼 환한 주황색 머리를 하고 큼직한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동네에 벽화를 그리러 오는 자원봉사자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할머니가 손을 멈추고 여자를 돌아보자 여자는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열었다. 가방이 반으로 갈라지며 열리자 그 안에 가지런히 정리된 온갖 색깔의 스프레이 물감통이 보였다. 할머니는 미심쩍은 얼굴로 여자와 물감을 한참이나 번갈아 보더니 웬일로 여자에게 집 벽을 내주었다. 

할머니는 장사를 나가면서 소년에게 여자를 단단히 지켜보라고 일렀다. 젊은이들이 동네에 나타나 담장이며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꽃송이가 화사하게 피어난 담장도 생기고 천사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 벽도 생겼다. 알록달록한 그림이 늘어나자 곧 무기처럼 묵직한 카메라를 목에 건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꽃 그림 옆에서 브이 자를 그리며, 천사의 날개 앞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사진을 찍어댔다. 

우리 집에는 모란을 그려요. 동백도 좋고. 할머니는 여자에게 당부했다. 이왕 그릴 거면 빨갛고 예쁜 꽃으로 그려요. 짐승은 그리지 마. 꿈자리 사나우니까. 
할머니는 긴 담장에 얼룩말, 사자, 기린이 그려진 계단 아래 37번지 집주인 할머니가 불쌍하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담장에 짐승이 그려진 다음부터 늘 꿈자리가 사나워 베개 밑에 부엌칼을 넣어두고 잠이 든다고 했다.

아유, 짐승은 싫어. 사람도 지긋지긋한데. 꼭 꽃을 그려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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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머리 여자가 스프레이 물감을 휘둘러 창문 둘레에 노란 타원부터 그렸다. 검정 쇠창살을 두른 작은 창문은 곧바로 부릅뜬 눈동자로 변했다. 또 한번의 동작으로 반대편 창문도 눈동자가 되었다. 소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여자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할머니는 여자를 감시하라 했지만, 여자는 꽃을 그릴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노란색 눈동자를 다 그린 여자가 검은색 물감을 꺼냈다. 원래 색이 어땠는지 짐작조차 안 가는 창문 아래 벽에 검은색이 쓱쓱 지나갔다. 여자의 거침없는 손짓이 소년의 집을 바꿔나갔다. 붉은 글씨를 지우느라 생긴 얼룩도 사라져갔다. 소년은 여자가 할머니의 당부를 잊은 것 같아 걱정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후련해졌다. 여자의 거침없는 몸짓과 손놀림이 시원시원했고, 점점 무시무시해지는 그림은 통쾌했다.

여자가 한참 만에 물감을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여자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소년 옆에 쭈그려앉았다. 그리고 소년에게도 담배 한대를 내밀었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가 꽃을 그리라고 했잖아요.

왜?

꽃이 예뻐야 사람들이 오니까.

사람들이 오면 뭐하게?

집 앞에 앉아 장사할 수 있으니까.

소년은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놀랐다. 할머니는 한번도 사람들이 집 앞으로 찾아오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집이 다른 집들처럼 예뻐져서 사람들이 구경을 오면 할머니가 집 앞에서 편안하게 장사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방금 떠오른 것이었다. 사실 소년은 집에 그림이 그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화사한 꽃이며 천사의 날개가 그려진 담벼락을 지날 때마다 저 너머에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수챗구멍이 사시사철 입을 벌리고 있고 부슬부슬 시멘트가 떨어져내리는 안쪽 벽에 잿빛 그리마가 기어다니는 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구경꾼들은 제대로 알기나 할까, 이런 생각을 훨씬 많이 했더랬다. 여자가 피식 웃었다.

너 그거 아냐? 가난은 팔수록 가난해진다.

소년은 여자가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가난이 뭔지도 모르면서. 

할머니는 가난을 파는 게 아니에요. 상추랑 콩나물이랑 수세미를 팔아요.

여자는 소년의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 일어났다. 여자가 소년의 손에 스프레이 물감을 하나 쥐여주었다. 

난 그릴 테니까 넌 지워라.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여자가 턱 끝으로 집 벽 어딘가를 가리켰다. 붉은 기운은 빠졌지만 물이 스민 것처럼 구불구불한 글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탄. 물러. 꺼져. 괴물. 

여자가 검은 얼굴의 오른쪽 뺨에 생채기를 그려넣었다. 소년은 검은 얼굴의 왼쪽 뺨을 마주하고 섰다. 소년이 학원에서 돌아오는 하람을 기다리며 쭈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자리였다. 할머니가 가래침을 돋우던 자리이기도 했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남자가 소년의 입을 틀어막던 자리이기도 했다. 소년은 여자가 쥐여준 대로 물감을 휘둘렀다. 소년의 뒤통수가 닿았던 자리가 지워졌다. 실지렁이 같은 글씨 자국이 지워졌다. 지워지면서 동시에 색깔이 채워졌다. 지웠다. 그렸다. 지웠다. 그렸다.

여자가 알루미늄 섀시로 틀을 두른 출입문 둘레에 분주히 뭔가를 그려 넣었다. 소년은 뒤로 몇걸음 물러나 여자의 그림을 보았다. 노란 눈을 부릅뜬 검은 얼굴이 출입문 주변으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끔찍한 비명 같기도 했고 성난 아우성 같기도 했다. 소년의 집 전면이 커다란 얼굴이 되어 외치고 있었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여자가 그런 소년의 손을 잡아뗐다. 

물 한잔만 줄래?

역광을 받은 여자의 주황색 머리카락이 석양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허술하게 덜렁거리는 섀시 문을 열었다. 소년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고 여자가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흡사 짐승의 아가리 속으로 거침없이 쳐들어가는 전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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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동굴 같네.

오주는 소년의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소년의 방은 바로 뒤에 언덕이 있어서 해가 잘 들지 않고 축축한 습기가 떠돌았다. 모서리를 따라 검푸른 곰팡이 자국이 줄지어 있었다. 

소년은 냉장고에 넣어두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을 한컵 가득 따라주었다. 오주는 물을 달게 마셨다. 소년의 방에는 그림이나 사진 한장 걸려 있지 않았다. 방 벽지는 잿빛으로 바래져 있었다. 처음 색깔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벽지였다. 한칸짜리 작은 옷장과 3단 서랍장, 그리고 앉은뱅이책상이 전부였다. 책상에 책은 없었다. 단출한 가구는 천장부터 쏟아지는 그늘에 짓눌려 있었다. 당장 방바닥에 이끼가 돋아나고 천장에서 종유석이 내려와도 전혀 신기할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동굴 같아. 

동굴,이라는 둥글고 깊은 발음이 입 밖으로 굴러가자마자 오주의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동굴 안에 붉은 조명이 탁! 켜진 것 같았다. 오주는 스마트폰을 꺼내 이미지를 검색해서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오주가 내민 이미지를 보고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돌벽 가득 수백개의 붉은 손자국이 찍힌 이미지였다. 간혹 흰색도 섞여 포개진 무수한 손자국이 마치 수천마리 그리마가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것처럼 동굴 안쪽 벽을 타고 어디론가 다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맹수에게 쫓기는 초식동물 떼의 피난 행렬 같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진격하는 적군의 집요함 같기도 한 이 사진은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오주는 이 이미지를 좋아했다. ‘손의 동굴’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띠나 빠따고니아 지역의 선사시대 동굴벽화였다. 붉은색 안료를 이용해 사람의 손자국을 스텐실 기법으로 무수하게 찍어놓은 벽화였다. 그러니까 선사시대 동굴생활자의 진짜 손자국이다. 오주는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꼭 아르헨띠나에 가서 이 동굴벽화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혈거인의 손자국에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맞대어보고 싶기도 했다. 오주는 ‘손의 동굴’ 벽화를 혼자 ‘손의 아우성’이라고 불렀다. 그 앞에 가서 서면 손들이 우우우우 아우성치는 소리가 귀를 때릴 것만 같았다. 

죽이지?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피예요?

오주는 토끼 눈을 하고 놀라는 소년이 귀여웠다.

꼭 피 같지? 나도 처음 봤을 땐 핏자국인 줄 알았어. 원시인이 짐승을 사냥하고 나온 피를 손바닥에 찍어 발랐나? 사냥 인증 같은 건가? 근데 진짜 피는 아니고 붉은색 안료래. 물감.

오주는 처음 이 이미지를 봤을 때 커다란 들소의 배를 가르고 흥건하게 쏟아져나오는 뜨거운 피에 환호하는 태고의 사냥꾼들을 떠올렸다. 뜨거운 피웅덩이를 양손으로 휘적거리며 승리의 휘파람을 불었을까? 오주의 손바닥에 피에 닿은 듯 뜨뜻한 감각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어서 콧속 깊이 훅 끼쳐오는 쇠 비린내. 속이 울렁거렸다. 

재미있는 놀이가 생각났어.

오주는 물감통을 열고 빨간색 스프레이 물감을 꺼내왔다. 화구통에서 도화지도 한장 꺼냈다. 소년의 방바닥에 새하얀 도화지가 놓였다. 오주가 소년의 오른손을 잡아당겨 도화지 위에 놓았다. 소년의 손은 뜨거웠다. 오주는 소년의 손에서 두뼘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빨간색 스프레이 물감을 분사했다. 소년의 손등과 그 주위에 붉은 점이 뿌려졌다. 

옛날에는 이런 스프레이가 없었으니 입에 물감을 물고 빨대로 훅 뿜어냈대. 빨대도 요즘 같은 플라스틱 빨대는 없었으니까, 짐승의 뼈를 이용했겠지. 그렇게 원시인의 입으로 불어낸 물감이 원시인의 손에 뿌려져 이런 모양을 만든 거야.

오주는 소년의 손을 도화지에서 걷어냈다. 소년의 손 윤곽이 점점이 뿌려진 붉은 물감을 배경으로 하얗게 도드라졌다. 손의 동굴에 찍힌 손자국과 같았다.

네 손은 검지와 약지의 길이가 똑같구나. 

오주가 자기 손을 쭉 펴서 소년의 눈앞에 내밀었다. 오주의 손은 약지가 검지보다 한마디 더 길었다. 

너도 한번 해봐.

오주는 빈 도화지 한쪽에 왼손을 쫙 펴서 얹었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스프레이 물감통을 들었다. 오주보다는 서툰 솜씨로 붉은 물감을 오주의 손에 뿌렸다. 오주의 손등에 붉은 점이 뿌려졌다. 소년의 손자국 옆에 오주의 손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오주의 손이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길었다. 지문처럼 표정처럼 서로 다른 두 손자국을 두 사람이 나란히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자신이 찍은 오주의 손자국보다 오주가 찍어준 자신의 손자국이 더 선명하다고 생각했다. 길쭉한 가운뎃손가락을 중심으로 검지와 약지가 공평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손. 아직 아무도 해치지 않은 손. 누구의 입도 막아본 적 없는 착한 손. 그러나 따뜻한 피의 온도를 기억하는 손.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손님처럼 소년이 왈칵 토했다. 토사물이 손자국 두개를 덮어버렸다. 오주는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토사물을 닦기 시작했다. 

-
 
망할 년.

귀선은 한참이나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집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은근히 기대감이 차올라 장사도 평소보다 일찍 접고 언덕을 올라왔다. 그런데 세상에. 귀선의 집이 거무튀튀하고 요란하고 흉악하게 변해버렸다.

허름한 동네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목에 깊숙이 숨은 볼품없는 집이었지만 귀선은 이 집을 아꼈다. 70년 넘게 살면서 귀선이 온전히 소유한 유일한 재산이었다. 이 집 한채를 가지기 위해 귀선은 수십년간 관절이 닳도록 노동해왔다. 그 집이 흉악한 괴물로 변해버렸다. 귀선은 넓지 않은 집 벽면에 붉은 모란 한송이가 큼지막하게 피어 있기를 내심 바랐다. 꽃잎이 창문과 출입문의 제약을 넘어서서 집이 아닌 곳까지 뻗어갈 기세로 속 시원하게 펴 있기를 기대했다. 집 전체가 함지박보다 큰 붉은 꽃으로 변해 향기를 풀풀 날리고 있기를 원했다. 그러면 밤을 틈타 집 벽에 ‘사탄은 물러가라’ ‘괴물은 꺼져라’ 같이 흉한 낙서를 휘갈기러 온 사람들도 어여쁜 꽃을 보고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그런데 세상에, 꽃은커녕 집이 괴물로 변해 있었다. 여길 보라고, 이 집에 정말로 괴물이 살고 있다고, 집 전면이 괴물의 얼굴이 되어 세상을 향해 아가리를 힘껏 벌리고 있었다. 

손자는 귀선의 방 아랫목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체기가 있는지 안 그래도 희끄무레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할머니.

응. 

집에 그림 그린 거 봤지?

응.

무섭지?

흉하더라.

응. 흉하지?

그래, 그애 어디 갔냐. 잡히기만 해봐라. 아주 그냥.

나는 좋아.

손자의 대답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나는 좋아, 할머니. 나는 흉악하고 무서워서 좋아. 

손자가 벌떡 일어나 귀선의 팔을 붙잡았다. 

지우지 말자, 할머니. 괴물 지우지 말자. 

왜? 흉하고 무서운 게 뭐가 좋아서?

그럼 사람들이 안 올 거 아니야. 우리 집 흉하고 무서워서 도망갈 거 아니야.

손자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원래 말이 없는 아이였지만 사건 이후로 더욱 말수가 줄었던 터였다. 귀선은 대답 없이 소년의 방을 나갔다. 그리고 다시 집 밖으로 나가 변해버린 집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가리를 한껏 벌린 모습은 어디 공격할 테면 해봐라,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는 것 같기도 했고 무서우니까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뺨에 묻은 검은 얼룩은 귀선의 검버섯과 비슷해 보였다. 덥수룩한 머리털은 손자와 비슷해 보였다. 귀선은 한발 더 뒤로 물러나 집을 다시 보았다. 온통 검게 칠한 괴물의 아가리 속에서 오동나무를 깎아 만든 문패만, 귀선의 이름 석자가 정갈하게 새겨진 그 문패만 홀로 하얗게 빛나 보였다. 문패는 괴물의 송곳니가 있을 법한 자리에 날카롭게 박혀 있었다. 귀선은 이를 악물었다. 새로 송곳니가 돋아날 듯 늙은 잇몸이 찌릿하고 울었다.
 


이주혜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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