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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동물(9회)

박솔뫼
2019년 04월 09일
         

선생님이 맡긴 원고는 새롭게 사건을 의뢰한 탐정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열차의 짐칸과 식당의 의자>는 가벼운 인문서였다. 가볍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학술서는 아니라는 뜻으로 쓴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일부만 남아 있는 원고들, 혹은 이런 이런 내용으로 알려졌고 실물이 한때는 존재했음이 분명하지만 현재는 사라진 책과 원고들, 마지막 챕터는 애서가이자 다독가로 유명한 저자를 포함해 여러 주변 독서인들에게 맡긴 페이지로, ‘세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책들을 막연하게 써보자/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있었던 책들/있을 법하고 그럴 듯하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 존재여부는 알 수 없는 책들’에 관한 글로 이루어져 있었다. 책들은 혹은 찰나의 생각들은 열차의 짐칸이나 식당의 의자에 놓고 오게 되니까. 그래서 이런 제목인가? 제목에 대한 설명은 원고에 없었다. 
 
내가 읽은 부분은 유명 시인의 일기에서 후에 발견된 탐정소설의 시작부분이었다. 아직까지 소설의 뒷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시인이 탐정소설을 시도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혹은 다른 이름으로 발표하고 있었으나 생전에는 이를 밝히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내 의견은 어쩌면 이것은 시인이 쓴 것이 아니라 그냥 읽던 책을 베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탐정소설이 전혀 유명하지 않고 알려지지도 않아서 시인이 썼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간단한데 이 소설의 다음 부분은 궁금하지만 시인의 시는 좋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존재하고 또 일부가 존재하고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남고 또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사라지고 또 생각지 못한 이유로 발견되는 건가. 시간이 좀더 흐른다면 시인의 시들은 사라지고 당시에는 전혀 유명하지 않았던 탐정소설의 작가는 새롭게 발견될지도 모른다. 이 원고가 책으로 나올 수 있을까. 나와도 재미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어쩌면 이 원고는 이 원고가 할애하고 있는 내용처럼 ‘책이 되는 것’과 ‘책이 될 뻔한 경우’의 사이에서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되는 중’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될까? ‘책이 되는 것’과 ‘책이 될 뻔한 경우’와 ‘되는 중’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쩌면 고민의 여지없이 완성에서 멀어진 걸까? 멀어진 듯하다가 어렵게 완성이 되는 걸까. 
 
선생님께는 재미있고 책으로 나와 서점에서 만나게 된다면 멈춰서 읽어보거나 사게 될 것 같다고 짧게 메시지를 남겼다. 원고 속 사례의 근거가 확실한지는 왜인지 미심쩍다는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시계를 찾아준 탐정이 의뢰받은 다음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사건 전에 맡은 자산가의 빌딩 경비일은 어땠을까, 오히려 경비 일이 더 신경이 쓰였다. 의뢰인이 자산가이기 때문인지 그에게 커다란 비밀이 있고 탐정의 등장으로 그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의뢰인은 사실 탐정에게 의뢰하기 전부터 남들 모르게 해결하고 싶은 어두움을 스스로 알고 있었겠지. 
 
피에르의 책들이 이 원고에 소개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썼지만 쓰지 않은 책, 간단히 말해 가명으로 낸 책. 하지만 그는 전혀 유명하지 않으니 가명으로 낸다는 것이 어떤 개별적인 의미를 갖는지 자신할 수는 없었다. 이력을 거짓으로 쓴 것은 어느 정도의 잘못이며 어떤 벌을 받는지,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도 아닌 애매한 서술은 또 어떤 잘못인지도 잠깐 생각했다. 앨런 긴즈버그와 잭 케루악이 서로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만든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이 왠지 꿈에서 들은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 있을 법한데 정말로 있어서 신기한 기분이라 내가 그런 꿈을 꾼 것인가? 정말로 그런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맞을까 생각했다. 세상에 있을 법하고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존재여부는 아직 알 수 없는 책 중에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책은 미국감옥에서 복역 중인 아시안 여성들의 인터뷰집이다. 
 
사건 4.
이상한 일은 그가 회색 캐시미어 니트를 입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회색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길고양이에게 평소처럼 말을 걸면 
 
─ 안녕 어디 가니. 이쁜아.
 
─ 캬아아악 
 
꺼지라는 소리를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주치면 사료나 닭가슴살을 챙겨주는 아이들도 회색 캐시미어 니트를 입은 날이면 주춤거리며 경계를 했다. 그 니트를 입지 않은 날에는 벌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왠지 웃음이 나왔고 자신이 알 수는 없으나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생긴 것이 기뻤다.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뭐가 있을까 세상에 그런 일은 잘 없었다. 회색 니트와 관련된 일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고 없었다. 그는 니트를 잘 개어 지퍼백에 담아 서랍에 두었다. 다른 입을 옷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주 아쉽지는 않았다. 옷을 고르다 보면 가끔 서랍 속 니트가 생각났다. 겨울은 늘 길어 끝나지 않을 것 같지만 시간은 그럼에도 흘렀다. 어느새 봄은 찾아왔고 짧은 봄이 지나자 무덥고 긴 터널 같은 여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마다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잠결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고양이들은 그렇게 만들어지기도 사라지기도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어떻게 생겨나느냐면,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잠결에.
 
『풍경 연구』 저자가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을, 그러나 실제 인물과 아주 다르지만은 않은 ‘피에르’라는 인물을 설정해서 책을 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탐정 고양이 차미가 준 힌트 때문이었다. 차미는 가만히 잠을 자거나 종종 사냥놀이를 하자고 제안하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내가 그의 책의 어떤 부분을 읽을 때면 그 책의 모순을 지적하고는 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여러 실내 중에 방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차례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의 모든 부분에서 언뜻 언뜻 방의 그림자를 드러냈을지 모른다. 방은 당신이 돌아가고 당신 자신을 비로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방이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혼자만의 방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당신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더라도 방에는 당신 홀로 존재할 것이다. (혹은 당신이 방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산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드물게 홀로 존재하는 시간을 생각한다.) 당신은 하루를 벗어두고 잠이 들고 어느 순간 잠이 깨어 어렵게 밖으로 나아간다. 뭔가를 챙겨 입고. 당신이 바닥에 누울 때 보이는 침대 밑의 먼지와 잃어버린 물건들. 무언가를 마음먹을 때 나타나는 언제 샀는지 알 수 없는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 방에서만 존재하는 여러 것들에 관해 나는 오래도록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차미야 왜? 무척 평이한 이 부분은 다시 읽어보면 역시 너무 가깝게 느껴져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읽어보면 역시……
 
나는 그가 만든 ANA 항공기 실내를 떠올렸다. 커피포트는 깨끗한 편이었지만 바닥이 아주 약간 눌어 있었다. 우유나 설탕을 원하시나요? 종이컵에 든 진한 커피를 건네는 승무원에게 둘 다 달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오피스텔에 세입자를 들이지 않고 오직 실내만을 실내와 실내만을 만들고 있을지 몰랐다. 아니 사람은 그렇게 책처럼 살 수 없어요. 당신이 본 그 집만 자기가 쓰는 거겠지. 아니 아니지. 그가 빌딩을 몇채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 아니오, 각각 경비도 두고 관리인도 두고 세입자들을 착실히 관리하면서 그 오피스텔만 자기가 쓰는 것일지 모르지. 나는 실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다시 생각하면 풍경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도시는 어떤 식으로 반복되는지, 서울은 어떻게 서울을 찍어내는지 설탕과 우유를 받아도 아주 잠깐 사이 그 모든 것을 잊고 쓰디 쓴 커피를 다 마셔버리고. 컵 안에 뜯지 않은 설탕과 크림을 넣고 다시 찾아온 승무원이 들고 가기를 기다린다. 탐정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대개 문제가 해결되고 탐정은 사무실에 앉아 있다. 아니면 집에 앉아 있다. 익숙한 곳에 앉아 있다. 서 있을 수도 있다. 차미는 차미가 가장 좋아하는 침대 발치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솔뫼
소설가.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 장편소설 『을』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가 있다.
 


10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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