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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동물(11회)

박솔뫼
2019년 04월 23일
           


한참을 걸은 길을 반복하려고 마음먹으면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을까. 귤껍질과 사탕껍질과 원두가 든 커피필터를 버리고 물티슈로 닦은 테이블에 친구가 앉았다. 나는 오랜만에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다. 친구는 여름에 베를린에 간다고 말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여행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읽고 있고 나는 7년 전에 갔던 베를린의 공원을 반복하려고 하였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길을 걷고 눈을 감고 구두를 샀던 신발가게를 지나고 늘 구경만 하던 배낭과 등산용품을 파는 가게와 그 옆 레코드가게를 지나고 매일같이 가던 까페와 그렇다면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려는데 내가 자주 앉던 자리는 가장 안쪽 소파인데 주문을 하고 커피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가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나를 앉혀두고 계속 걸었다. 나는 진한 커피를 두잔 마실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삶인지 가볍게 의심할 것이다. 다양한 향신료를 파는 마트를 지나 마트 뒤쪽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팔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는 벤치가 있었고 벤치를 등지고 왼쪽으로 가면 묘지가 나왔고 오른쪽으로 가면.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공원에 갔더라 가방에 담요를 넣고 요거트를 사서 걷던 길과 아이스크림 가게 앞 벤치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우리가 갔던 길들이 몇개의 지구들로 뛰어가고 있었다. 벤치에서 공원으로 공원에서 어쩐지 이곳은 쌘프란시스코에서 들렀던 공원 같네. 쌘프란시스코에 갔던 것은 거기서 10년 전의 일로 그곳의 약도는 대부분 사라져 공간들이 떠다녔다. 공원과 5층짜리 레코드가게와 나에게 욕을 하던 거지와 서점과 숙소와 친구가 살던 낡은 호텔.
 
사건 7.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탐정은 새벽까지 경찰서에 있었다. 사무실에 나오지 않을 계획이었으나 습관처럼 나와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우고 편의점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먹고 신문을 다시 읽었다. 신문을 두번째 읽었을 때 그는 7년 전, 아니 8년 전인가 자신에게 아들의 경호를 맡아달라고 한 자산가의 이름을 발견하였다. 아들의 경호가 진짜 의뢰는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의뢰인은 아들과 재산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들도 빌딩도 문제가 아니었고 그 자신의 이름이 여당 의원의 뇌물 수수 관련 보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8년 전, 사건이 해결된 이후 의뢰인의 막내아들은 탐정이 되겠다고 하였다. 투자에 능한 혹은 투기라고 해야 할지 그 둘의 차이를 의뢰인이라면 정확히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 탐정은 구별하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투기와 투자에 능한 의뢰인이 50이 넘어 얻은 막내아들은 어딘지 딱딱하고 아버지를 닮은 얼굴을 하고 있던 형들과는 달리 물론 형들이라고는 해도 나이가 스무살은 차이났지만 아무도 닮지 않은 얼굴에 활발한 아이였다. 모두가 자신을 좋아해줄 것이라 믿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 아이는 옆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잘못 들어선 길을 끝까지 여러번 반복해서 가는 아이였는데 음감이 뛰어난 것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 숫자를 금세 외우는 것처럼 길을 잘 찾는 것도 충분히 구별 가능한 종류의 재능이었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세상일지 모르겠지만 길을 못 찾는 탐정은. 그때 그는 아버지에게 물어보라며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아이는 손을 흔들며 나이든 아버지를 향해 뛰어갔다. 그 아이가 제대로 자랐다면 올해 대학에 입학할 즈음의 나이일 것이다. 
 
길을 헤매는 탐정이라. 
 
어떤 비유가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단지 자신이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이라서일지 어이가 없는 내용이라서인지 아무튼 이런 건 뭐랄까 화를 참을 수 없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공중전화에서 주소를 물어보며 어느 사거리에서 무슨 타워 방향으로 가다가 몇번째 블록에서 꺾다가 이런 식으로 길을 설명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탐정이라는 일도 직업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가능할지 점점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탐정은 문득 오래전 읽은 아베 코오보오의 소설 『불타버린 지도』를 떠올렸다. 탐정이 주인공인 소설인데 이 탐정은 한심하게도 언젠가부터 길을 잃어버린다. 결국 길을 잃다 자신마저 잃어버려 실종이 되어버린 혹은 실종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탐정의 마지막에서 소설은 끝난다. 한심하다고 할 수는 없겠군. 소설 속 탐정이 의뢰받은 사건은 실종된 남편을 찾아달라는 의뢰였다. 남편을 잃어버린 여자가 사무실로 찾아갔던가 아니면 어디선가 다른 곳에서 의뢰를 받았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의뢰인인 여자의 집으로 갔을 때 딱히 남편을 찾으려는 의지가 강해 보이지도 않고 어딘가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여자가 풍기던 분위기가 기억이 났다. 새벽까지 거의 밤을 샜음에도 왠지 신경이 예민해져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눈은 쌓이지 않고 얇게 흩날리고 있었고 눈구경을 하기 힘든 해였다고 생각하며 환기할 겸 창문을 열었다.
 
─ 길치는 탐정이 못 되나요?
 
─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넌 아직 운전도 못하지 않나?
 
─ 절 기억하시는군요.
 
탐정은 아버지의 이름이 뉴스에 오르내리는 일을 겪고 있을 십대 후반 어쩌면 이제는 성인이 되었을 청년의 불안한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릴 적 끝없는 낙관의 표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탐정은 아버지의 이름을 오늘 신문에서 봐서 기억이 났을 뿐이라고 짧게 말했다.
 
─ 길치여도 사건의뢰는 할 수 있겠죠.
 
─ 아니. 아버지 일에 관련해서 내가 알 수 있거나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 숨겨진 일이 있어도요?
 
─ 그 일을 가장 잘할 사람들은 아마 지금 잠도 안자고 네 아버지에 관해 조사하고 있을 거야.
 
청년은 그렇다면 이 부탁이라도 들어달라는 듯, 이곳에서 자고 가면 안되냐고 물었고 탐정은 창가로 가 건물 아래 청년을 쫓아온 남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어떻게 건물 뒷문으로 빠져나가는지를 알려주었다. 청년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표정으로 나갔다. 그 이후 사무실을 찾아온 사람들은 다음과 같았다. 일간지 기자 한명, 주간지 기자 두명, 그리고 사무실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건물을 훑어보고 간 남자 두명. 길을 헤매는 청년이 점점 더 사람을 몰고 올 것 같아 일어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재떨이를 손님용 의자에 두고 외투를 꺼내들었을 때 바닥에 검정 가방이 보였다. 가방 안에는 청년의 아버지이자 8년 전 의뢰인의 이름과 뉴스에 오르내리는 정치인의 이름과 숫자들이 적힌 서류가 들어 있었다. 일부러 놓고 간 것이었다. 탐정은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하기 전에 아니 처리도 아닌 시작조차 하지 않고 없던 일로 되돌리기 위해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고 잠시 후 재떨이에 손을 뻗었을 때 회색 코트와 회색 담뱃재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바라보는 턱시도 고양이는 발톱이 지면에 닿는 가벼운 소리 외에는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며 그를 지나 그의 의자로 가볍게 올라가 앉았다. 탐정의 의자에 앉아 먀 하고 소리를 낸 고양이는 이제부터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듯이 다시 가볍게 책상 위로 올라가 그를 바라보았다.
 
─ 그래, 적어도 길치는 아니겠지.
 
그는 히터를 켜고 외투를 입지 않은 채 주차장까지 가는 일, 집 근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다시 집까지 걸어가는 일, 고양이를 두고 사무실을 떠나는 일 그리고 청년이 두고 간 가방과 아마도 사무실을 여전히 감시하고 있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사무실 구석에 접어둔 소파식 침대를 펴고 먼지 냄새가 나는 담요를 꺼내왔다. 고양이는 이제 탐정 업무는 끝났다는 듯이 다시 메오 하고 울더니 가볍게 내려와 침대로 올라왔다. 그의 사무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미 탐정인 고양이가 나타났다. 고양이가 길을 잃을 리는 없을 것이다. 탐정이 못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 담요를 덮었다. 눈을 뜨면 사우나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솔뫼
소설가.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 장편소설 『을』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가 있다.
 


최종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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