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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을 만지고 잇는 노동자의 손”

최형섭
2019년 04월 26일
  

 

* '한번 더 주목'은 문학지 발간 후 이전호 '주목'란의 주제를 한번 더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2019년 1월에 발간된 문학지 7호의 주제, "뉴미디어와 읽고 쓰기"에 대한 글을 최형섭 님이 보내주셨습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미디어를 가능하게 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판 인쇄술은 똑같은 종이책의 대량생산으로 이어져 지식이 효과적으로 축적되고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 전기의 특성을 이용한 각종 테크놀로지들은 전신과 전화, 무선통신 등을 통해 지구 반대편까지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후 디지털 방식으로 부호화된 신호는 해마다 성능이 높아지는 컴퓨터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여러 통신 기술들이 결합된 스마트폰이라는 플랫폼에 도달했고, 이 플랫폼을 손에 쥔 젊은이들은 점점 빨라지는 광대역 통신망 덕에 활자보다 동영상을 통한 소통에 더욱 익숙해져가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사람들이 소통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야기했고, 그에 따라 때로는 거대한 사회 변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미디어 이론과 엘리자베스 아이젠슈타인(Elizabeth Eisenstein)의 근대 초기 유럽 사회의 변동에 대한 연구에서 잘 볼 수 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출현이 사회 변동으로 이어진다는 이들의 주장은 ‘기술결정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금속 활판 인쇄술이 유럽 사회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아이젠슈타인은 그의 책 『근대 유럽의 인쇄 미디어 혁명』(커뮤니케이션북스 2008)에서 자신은 인쇄술이 “변화의 하나의 동인(an agent of change)”일 뿐 “변화의 유일한 동인(the agent of change)”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기술결정론자라는 비판에 대한 일종의 선긋기였다. 하지만 어쩌랴! 때로는 기술 변화가 사회 변화를 이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바뀔 수는 없다. 이는 놀라운 사실도 아니고, 그 자체로 비판받을 만한 주장도 아니다.
 
모든 기술 변화는 현상(現狀, status quo)에 모종의 변동을 일으킨다. 때로는 그 변동이 미미해 그에 대해 특별한 논평을 가하는 것이 무의미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변화의 파고(波高)가 이어지는 사회 현상을 모조리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테크놀로지는 인간 사회와 유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사회를 이루는 여타의 요소들과 다른 층위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법률과 제도, 정치와 문화, 지식과 기술의 변화는 모두 인간 생활에 유사한 방식으로 변동을 야기한다. 법조항의 작은 변화가 어떤 변화로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처럼, 거실에 놓인 소파 하나를 바꾸었을 때 가정생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사전에 예측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이젠슈타인의 변명은 인쇄술이 근대 유럽의 탄생으로 이어질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미디어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른 사회적 변동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 대서양 횡단 전신망 가설로 지구 반대편까지 시차 없는 즉각적 통신이 가능해지자 많은 지식인들은 새로운 통신망이 국가 사이의 오해를 불식시켜 전쟁이 없는 상태, 즉 세계평화로 이어지리라고 기대했다. 이러한 기대감은 20세기 후반에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대중화는 온라인상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도구로 간주되었다. 200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인터넷은 기존의 거대 언론사를 우회해 대중의 의사를 널리 전파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새로운 미디어는 현상에 변동을 일으킴으로써 기존의 이해관계를 뒤흔드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변동의 결과가 항상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사가 잘 보여주듯이 전신과 무선전신은 세계평화는커녕 끊임없이 이어진 크고 작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서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인터넷 역시 초창기의 기대와는 달리 불과 10여년 만에 정치적 입장에 따라 소위 ‘댓글 전쟁’을 벌이는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시민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었으나, 그 목소리는 수많은 웅성거림 속에 파묻혀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기획된 ‘여론’이 담론장을 주도하게 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20세기 초반 전신이 더이상 세계평화를 불러올 수 없게 된 것처럼, 2010년대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은 이미 민주주의적 기술이 아니게 되었다.
 
이렇듯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둘러싼 기대감과 실망의 사이클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의 특수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미국의 IT 컨설팅 업체인 가트너 그룹(Gartner Group)에서는 매년 새로운 기술들이 ‘과장 광고 사이클’(hype cycle)상에서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분석하는 그래프를 발표한다. 이 사이클에 따르면 많은 신기술들이 초기 급격한 기대를 모으게 되는 “과장된 기대감의 최고조” 단계에 접어든다. 하지만 곧 몇몇 실패 사례가 알려지면서 “환멸의 골짜기”로 빠져든다. 이후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면서 “계몽의 산비탈”을 오르고, 마지막에 “생산성의 고원”에 이르게 된다. 물론 모든 신기술이 마지막 단계까지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환멸의 골짜기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잊혀지는 기술도 많을 것이다. 이렇듯 예측하기 어려운 기술 변화에 대응해 삶을 영위해나가야 하는 것이 현대 기술사회를 살아가는 자들의 숙명일 것이다.
 
〔문학3〕 2019년 1호 ‘주목’란에 실린 네편의 글들은 새로운 미디어의 예측 불가능한 효과들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몇가지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자로서 메타적인 논의를 소개하고 있는 심혜련의 글을 제외한 나머지 세편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콘텐츠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매개자(mediator)의 입장을 대변한다.
 
소설가 정세랑은 콘텐츠 생산자로서, 편집자 박혜강은 작가들이 생산해내는 콘텐츠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자로서 변화하는 환경에 맞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는 데 적극적인 생산자에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은 폭넓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매클루언이 지적하듯, 새로운 매체는 똑같은 콘텐츠를 단지 새로운 도구로 전파하는 데 있지 않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책상에 앉아 종이책을 읽는 독자와 “점심시간에 쌘드위치를 먹으며 모니터”나 스마트폰으로 읽는 독자는 다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종류의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단지 콘텐츠를 전달하는 미디어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글의 “본질적”인 성격까지 달라진다. 이렇듯 모바일 웹 시대의 창작자과 편집자들은 자신의 작업이 어떤 기술적 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지, 그리고 그에 맞춰 콘텐츠의 형식과 내용을 바꿔나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아가 미디어의 변화는 읽기와 쓰기라는 기본적인 행위 자체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둘러싼 경제구조도 뒤흔든다. 사회적 자원이 종이출판에서 웹 기반 업계로 서서히 빠져나는 것처럼, 콘텐츠 생산자와 매개자의 경제적 기반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예측불가능하게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필자들처럼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지 않고 유연한 태도를 갖는 것이 아닐까.
 
정의석의 글은 약간은 예외적인 콘텐츠 소비자의 목소리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특히 소중하다. 그는 1980년대에 점자로 글을 읽기 시작했고, 비장애인 대상으로 출판된 책을 점자 프린터기로 출력하여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이후 정의석의 독서 편력은 스크린리더 프로그램, 광학 문자 판독기(OCR), 점자 정보 단말기 등 여러 디지털 기기와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읽기란 항상 미디어란 테크놀로지로 매개되기 마련이지만, 시각장애인의 시각에서 그 사실을 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디어 변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높은 민감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최근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정의석에 따르면 스마트폰 환경은 대체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격차를 줄이는 데에 상당히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격차를 결정적으로 줄이기 위해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개발자들의 보다 깊은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앞으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점점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임을 생각해보았을 때, 예기치 않았던 혹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세심하게 고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소수자들이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이 기존에 겪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서 겪게 되는 문제”라는 그의 지적은 기술의 변화가 모든 사람들의 편의를 증진시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번호 ‘주목’란의 ‘기획의 말’은 작년 11월 아현동 KT 통신구 화재 사건으로 글을 열고 있다. 기획위원들은 우리가 현재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가 “비물질적”인 것이라거나, “가상”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현동 화재 사건과 이어진 통신 불통 현상은 우리가 공기처럼 받아들이는 초고속 인터넷이라는 이기(利器)의 배면에 가려져 있었던 “숱한 노동과 수많은 물질”을 전면으로 부각시켰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마포구의 특정 건물에 불이 나면 인터넷에 문제가 생기다니! 인터넷을 공기처럼 받아들이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나의 단말기(컴퓨터, 스마트폰, 신용카드 결제기기 등)로 정보를 주고받는 일이 다분히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의 기획 의도와는 달리, ‘주목’란에 실린 네편의 글들이 이 주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점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 새로운 미디어의 물성과 노동에 주목한다면 어떤 주제로 글을 청탁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전선을 만지고 잇는 노동자의 손”에 주목한다는 것은 우리의 읽기와 쓰기에 어떤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있을까? 정세랑의 글이 잘 보여주듯이 최근의 창작자는 웹 소설, 블로그, 웹툰, 영상 시나리오, 심지어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각 장르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콘텐츠가 소비자들에게 전달될 때까지 “전선을 만지고 잇는” 수많은 “노동자의 손”이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종이출판 모델에서는 작가와 편집자(경우에 따라서는 교열자)가 핵심이었다면,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는 그 관계망이 웹 에디터, 프로그래머, 게임 기획자 등으로 확장되어 훨씬 복잡해졌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또다른 예로, 이북(e-book) 리더라는 새로운 미디어로 인해 쓰기, 읽기, ‘책’ 만들기, ‘책’ 팔기 작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는 것은 어떤가? 즉, 현재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다양한 미디어를 거친 콘텐츠들을 우리 눈앞으로 가져다놓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전모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기술사(技術史)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보 기술의 숨은 노동에 대한 관심은 오래된 일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기술사학자 그레그 다우니(Greg Downey)는 이미 이십년 전에 인터넷이란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가 두둥실 떠다니는 가상공간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전기를 소모하는 서버 팜(server farm)과 지구를 휘감고 있는 전선 다발이며,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독하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 유지·보수 작업을 하는 수많은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미국 전신망이 작동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전신 배달부 소년(telegraph messenger boys)과 텔레비전 통신의 중요한 한 부분인 영상물 자막을 제작하는 속기사(stenographer)의 노동에 주목했다. 한국 사회에서 쓰기와 읽기라는 핵심적인 문화적 활동의 변동을 보다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분석의 틀에 ‘노동’이 빠져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볼 때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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