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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검열은 검열이 아니다

황인찬
2019년 05월 07일
 

 

  

'키워드3' 여섯번째 키워드는 'yes'과 'no'입니다.
응답이기도, 태도나 허가이기도 한 두 단어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글은 황인찬 시인이 보내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댓글과 투고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투고하실 분은 이메일 munhak3@munhak3.com으로 A4 3장 이내의 완성된 글을 보내주세요.
한분을 선정해 연재의 마지막 지면과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분 중 한분께는 문학지 8호와 신간을 선물로 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yes-(자기검열)-no

 


 
원래 인간은 자기를 검열한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말이 몇년째 들려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 때쯤, 듀나 게시판에서 처음으로 본 말인 것 같은데, 요 몇년간은 세상 모든 것을 다 두들기고 보는 지젝마저 두들기고 있는 상황이니 그 개념이 환기하던 신선함도 상당히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까지 사회인이 아니었던 터라 요새는 어떻게 분위기가 돌아가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2017년 즈음까지는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이후 두드러진, 문학에 대한 어떤 기대 혹은 기대 없음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문학의 메시지가 지나치게 앞으로 드러날 때, 작품이 갖는 효과는 오히려 약화된다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의식이 만들어내는 충돌 없는 문학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문학의 역량을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거나, 정치적 올바름을 소비하길 원하는 윤리적 소비 풍조가 결국 ‘여혐 작품 안 사요’라는 일축으로 끝나고 더이상의 논의를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도 있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작금의 현실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으며, 문학과 삶의 접점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그런 이야기. 아마 여기서 무슨 결론이 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논의를 계속하기에는 텍스트가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나 역시 받고 있었으니까. 

다만 이제는 실천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굳이 내게 yes-(문학)-no를 주제로 하는 글을 써달라고 한 것을 봐도 그렇고, 근래 여기저기서 듣게 되는 하소연, “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들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얼마 전에는 무슨 인터뷰에서 문학에서의 윤리적 올바름이 자기검열을 초래한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문학적 실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윤리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한껏 높아진 지금, 창작하는 이들 역시 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정치적 올바름과 그것이 야기하는 일종의 자기검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원래 창작은 자기검열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술 행위란 우리 사회 안에서 잠정적으로 결정된 이성적이며 감성적인 여러 문화 규범들에 대한 반응이기에, 그 모든 규범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다. 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일정한 사회의 자장 안에서 그 의미와 상태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서로 길항하는 동시에 상보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에 놓여 있으니까. 창작을 하는 매 순간 미적 규범들을 따르거나 어기며 그것과 대결할 때, 윤리적 규범들과의 대결 또한 동시에 수행될 수밖에 없다. 모든 대결의 순간, 작가는 자신의 언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망설임은 창작의 과정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유독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친 자기검열을 초래한다거나 하는 말이 내게는 이상하게 들린다. 

외모에 대한 농담, 인종이나 성별 등 생래적 요인에 대한 농담 등은 점차 우리의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물론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그것이 더이상 재미있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재미있지 않기 때문에, 창작자들은 그러한 농담을 쉽게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기검열인가? 재미가 없으니 더이상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이? 물론 누군가는 그러한 변화가 제도와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제도와 교육을 통해 차별적 표현이 불쾌함을 초래하는 것으로, 재미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면, 그것을 문제 삼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이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검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평평한 세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당신에게 지젝 스티커를 붙여주고 싶다.) 

작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쓰는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인데, 그것이 현 시점에서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미적 판단은 윤리적 판단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미적 판단과 마찬가지로 윤리적 판단 역시 우리의 삶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해나간다. 

정치적 올바름이 강하게 주장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고? 그러한 부담이 자기검열로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아니다. 작가가 부담을 느끼는 부분은 자신의 작품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빠르게 변화해가고 있기에, 당대에 어울리는 적절한 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이 작가에게 부담을 줄 뿐이다. 

그것은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세월호 이후 작가들이 글쓰기에 부담을 느끼게 된 것을 두고 자기검열을 들먹이며 문제 삼는 이가 있었던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제목에 달아버렸고, 그것을 굳이 한번 더 반복해 말하게 되었지만, 굳이 말해야겠다. 자기검열은 검열이 아니다.


작가는 아무것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위의 이야기는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내용인지라, 사람들이 정말로 걱정하는 부분에 대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 자체가, 혹은 그것이 자아내는 사회적 반향 자체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자기검열이라는 말로 우회적으로 드러났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불편하고 무엇이 걱정된다는 것일까?

정치적 올바름은 신자유주의적 기율을 주체에 내재화하는 사악한 기획이며, 결국 전체주의에 도달할 위험성을 내포한 문화 운동이므로 미적이며 윤리적인 모험을 벌이는 진정한 작가라면 그러한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한다는 것인가? 

혹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고자 마찰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매끄럽게만 만드는 작품은 예술의 진정한 가치인 불온성과 전복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체제에 순응하고 오히려 폭력을 은폐하는 데 이바지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것인가?

그래, 이 모든 걱정을 받아들인다고 치자. 그런데 정말로 지금의 문학장이 신자유주의적 기율 아래 모든 것이 그저 매끈해지기만 한 무엇인가로 느껴지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정말로 세상이 그렇게까지 변했나? 어떤 작품이 보여주는 상냥함이나 조심스러움을 정치적 올바름에 순응하는 것으로 읽어버린 것은 아닌가? 새로운 작품들을 알고 있는 개념에 끼워 맞춘 것은 아닌가? 현상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같은 현상을 원인에 두고 있다는 까닭으로 같은 취급을 한 것은 아닌가? 정치적 올바름의 과도한 요구에 대한 저항감이 작품 읽기에 반영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여기까지 불만을 털어놓고 보니, 내가 다른 이들의 선의를 곡해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어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해지기도 한다. 다만 작가란 끝없는 부담과 제약 속에 놓여 있는 존재라는 점만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문학은 아무것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문학은 제약 안에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살 수 있다. 문학은 제약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증오하지만, 동시에 제약과 함께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제약과 함께 간다. 제약이란 작가가 살아 숨 쉬는 시대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문학에 요구되는 새로운 기대를 PC경찰 운운이나 윤리소비 문화 같은 것으로 곧장 치환하는 것이 내게는 정말 이상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문학을 생산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다소 얄궂게 느껴질 수도, 혹은 일종의 제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러한 압력 자체가 작가의 창작을 방해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시대의 요구가 분명하게 지시하는 변화를 모르는 척하는 것은 작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요구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요구가 생겼음을 의식하는 것이 창작과정에서는 당연한 일이라는 뜻이다. 만약 그것이 어떤 억압으로 느껴진다면, 그 억압 역시 고려할 대상, 즉 대결할 대상에 두면 그만이다. 자기검열, 아니 자기검토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학이, 새로운 소통이 가능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지금 생산되는 많은 작품들은 이미 새로운 소통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새로운 소통들에 대한 섬세한 독해가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작금의 윤리적 요구에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해나가는 작품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소설은 조금씩 독해의 방향이 생겨가는 것 같은데, 시는 조금 갈 길이 먼 것 같아, 시인으로서 걱정이다. (그러나 시에도 분명 모종의 경향성이 신인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덧붙여두고 싶다.) 섬세한 독해만으로 무슨 일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섬세한 독해를 경유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삶의 독해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황인찬
시인.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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