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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하는 말

조남주
2019년 05월 21일
   

 

  

'키워드3' 여섯번째 키워드는 'yes'과 'no'입니다.
응답이기도, 태도나 허가이기도 한 두 단어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번째 글은 조남주 소설가가 보내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댓글과 투고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투고하실 분은 이메일 munhak3@munhak3.com으로 A4 3장 이내의 완성된 글을 보내주세요.
한분을 선정해 연재의 마지막 지면과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분 중 한분께는 문학지 8호와 신간을 선물로 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yes-(소설)-no

 


 
내가 속한 창작 모임의 목표는 두가지인데 첫번째는 ‘글로 생계유지하기’이고 두번째는 ‘쓸모 있는 글쓰기’이다. ‘쓸모’라는 것의 정의는 구성원마다 조금씩 다르다. 탐사, 고발, 정보전달, 문제제기, 기록 등 비교적 현실적인 효용까지로 선을 긋는 이도 있고 오락, 감동, 지적 자극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이도 있고 두가지가 결국은 연결되는 것이므로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이도 있다.
 
생각이 중구난방인 것은 구성원이 다양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모임에는 시와 소설을 쓰는 이들도 있고 프리랜서 기자, 다큐멘터리 PD, 예능프로그램 작가와 시나리오공모전을 준비하는 수학교사도 있다. 각자 장르와 성격이 제각각인 글을 쓰지만 그럼에도 같은 그룹으로 모여 함께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 방식이 더 합리적이라거나 유용하다는 생각까지는 아니고 ‘노트북 열어서 자판 치는 건 다 똑같으니까’ 정도의 마음들이다. 기획 단계에서 함께 고민하고 자료 조사와 취재를 돕고 진행 중인 원고를 돌려 읽고 조언한다.
 
2015년 가을, 나는 새로 쓰기 시작한 소설의 첫 챕터, 원고지 30매 분량을 모임 게시판에 올리고 물었다. “이 얘기 계속 써볼까요?”
  
바로 그 주말, 우리는 내 소설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모였다. 나는 어느 평범한 여성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소설을 쓸 예정이라고 말했다. 계층, 지역, 학력 등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여성 문제임을 드러내기 위해 주인공은 비교적 여건이 좋은 인물로 잡았으며, 82년생인 이유는 성감별 낙태, 호주제 폐지, 무상보육 등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스토리에 녹여내기 용이해서고, 가족 구성이나 이름도 비슷한 이유로 설정했다고, 보고서처럼 건조하게 쓸 거라고, 이후에 백번도 넘게 한 설명을 처음으로 한 날이다.
 
중간 중간 통계와 보도자료를 인용하려 한다고 했는데 아무도 소설에 통계나 기사가 들어가는 것이 어색하다고도 혹은 진부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미주가 나을지 각주가 나을지 하는 얘기만 한참 했다. 
  
흔하고 뻔하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에피소드로 채울 거라며 출력해온 자료들을 펼쳐놓았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의 글들, 기사들, 관련 수기집이나 르포를 읽으며 옮겨 적어놓은 것이었다. 조심스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나도 이런 경우 있었다,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사실 더한 일도 겪었다면서 각자가 보고 듣고 경험한 에피소드들을 흥분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메모해두었다가 소설로 써도 되겠느냐고 묻자 당연하다고, 조금만 바꿔 쓰라고 혹은 꼭 적나라하게 써달라고 했다. 모임의 목적은 잊은 지 오래고 다들 자신의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 격앙된 대화를 받아 적으며 나는 왠지 잘될 것 같다는, 그 ‘잘’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의 ‘잘’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다 불쑥 한명이 물었다. “근데 이거 소설이죠? 이렇게 들으니까 긴 기획기사 같아요.”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라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이런 게 팩션이죠” 했다. “팩션은 실존 인물이나 실제 사건에 살을 붙여서 쓰는 거 아닌가요? 역사소설 같은 거요.” “그렇네요. 팩션이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그럼 페이크 다큐?” 이번에는 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했다. “일단 써볼게요. 다 쓰고 나면 뭔지 알 수 있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긴 기획기사처럼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싶었다.
 
정작 소설을 쓰면서는 이게 소설인지 기사인지 에세이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없이 쭉쭉 써나갔다. 구성을 거의 잡아놓은 데다가 에피소드도 대부분 정리된 채로 시작했으므로 큰 고민 없이 계획대로 쓰기만 하면 되었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쓰는 순간에는 소설이면 어떻고 르포면 어떻고 아무것도 아니면 어떤가 하는 마음이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지 ‘무엇인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완성했고 출간했고 예상치 못했던 다양한 반응을 만났다. 과분했고 감사한 순간이 많았다. 반론을 내놓거나 공식적인 조치를 취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아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소설 같지 않다’는 평가들이 있었는데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칭찬의 의미일 때도 있었다.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재현한 덕분에 깊이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는 뜻에서 이건 소설, 그러니까 픽션(fiction)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실제로 소설을 ‘김지영’이라는 사람이 쓴 에세이, 혹은 자전소설로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기자간담회에서 나를 ‘김지영 작가’라고 호명한 기자도 있었고, ‘82년생 공지영 작가님께’라는 인터뷰 요청 문자를 받았을 때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반대의 의미일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소설의 특징, 이를테면 문장이 아름답고 인물이 입체적이고 사건이 극적이고 메시지가 은유적으로 드러나는 등의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소설로서 부족하다, 소설답지 않다,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 일정 부분 쓸모 있는 글일지언정 좋은 소설은 아니라는 뜻인데 이제 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쓸모’를 구현하기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방식을 선택했고,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좋은) 소설이 아닐 때 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한동안 ‘소설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얼마간 위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모임의 멤버들은 내게 그렇게 가라앉아 있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소설의 3요소가 뭐였죠?” “주제, 구성, 문체. 구성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고요.” “역시 주입식 교육 최고네요. 아직도 기억이 나다니.” “스티븐 킹은 서술, 묘사, 대화라고 했어요.” “그럼 우리도 하나 정할까요? 청탁, 마감, 입금 어때요?” 마침 그즈음 어떤 글을 읽고 나도 생각이 바뀌어 내 소설이 (좋은) 소설이 못 될 것도 없다는 조금 뻔뻔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다만 그 시기 우리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창작자들은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데 그 시도와 질문이 어떤 경우에 거절당하고 어떤 경우에 의미를 가지는가. 누구에게 거절당하고 누구에게 의미를 가지는가. 어떤 시대에 거절당하고 어떤 시대에 의미를 가지는가. 그 답은 찾지 못했지만 어느 한 작가 혹은 한 작품이 완성형일 수는 없고 우리는 모두 앞사람의 뒤에, 뒷사람의 앞에 서 있지 않나 하는 대화를 나눴다. 
 
다큐멘터리 PD인 K는 자신이 취재했던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데, 각기 다른 사정으로 고시원에 머무는 20대 네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제 고시생도 있고, 일용직 노동자도 있고, 전 애인의 스토킹을 피해 도망 다니는 여대생과 근처 대학병원의 레지던트도 있다. K는 단순히 이들의 사연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인 맥락을 함께 짚으려는데, 중간 중간 보도와 연구자료를 삽입해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자료가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 네 사람의 이야기는 팩트(fact)이고 근거 자료들이 픽션(fiction)인 셈이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그건 사기 아닌가요? 페이크 다큐 같은 건가요?” K는 “일단 써볼게요. 다 쓰고 나면 소설인지, 페이크 다큐인지, 사기인지 알 수 있겠죠”라고 대답했다. 1200매 가량의 초고 파일을 받았고 다음 주말, 우리는 K의 소설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이 글은 ‘에세이’로 요청받았고 글에 등장하는 ‘나’는 실제의 ‘나’다. 전반적으로는 진심이지만 완전히 정직하게 쓴 것은 아니고 사실을 바탕으로 했으나 허구로 만들어낸 부분도 있다. 쓰다보니 허구의 부분에 내 솔직한 생각과 고민이 담기는 반면 실제 경험을 옮겨 적은 부분이 오히려 기만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당시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의도적이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였던 것 같다. 그 괴리에서 다시 소설의 필요와 쓸모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 글은 소설일까, 아닐까. 
 
 

 
조남주
소설가. 지은 책으로 소설집 『그녀 이름은』, 장편소설 『귀를 기울이면』 『고마네치를 위하여』 『82년생 김지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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