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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1회)

강화길
2019년 06월 04일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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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니꼴라 유치원」이라는 소설을 쓸 때의 일이다. 그 소설은 ‘안진’이라는 지방의 어떤 유치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그 유치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고군분투한 인물은 후보 2번으로 접수된 민우라는 아이의 엄마였다. 나는 그녀가 애를 쓰면 쓸수록 유치원의 음험한 비밀을 알게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진실을 알면서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싶어할까. 아니면 아이와 함께 그 높은 담벼락 밖으로 빠져나오게 될까. 이후 나는 안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몇편 더 썼다. 그리고 동일한 질문을 꽤 여러번 받게 된다.

“혹시 안진은 당신의 고향인 전주를 배경으로 한 곳인가요?”

나는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사실이었다. 나는 스물다섯살에 전주를 떠났는데, 그때까지 평생 그곳에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전주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십여년은 익산-정확히는 개명 이전의 지명인 이리-에서 살았고, 이후 웅포에서 2년을 지낸 뒤 다시 전주로 갔다. 이사도 제법 많이 다녔다. 아마 내가 기억하는 횟수보다 많을 것이다. 한 동네에 오래 머무르게 된 건 열두살 이후부터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한 사람 인생에서 이 정도 이동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때문에 특별히 대단한 경험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어쨌든 그 경험이 내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진은 실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 어떤 곳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라는 것.

왜냐하면 안진은 내가 아는 모든 곳의 이런저런 면모를 합쳐 만든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안진은 내가 살아온 모든 곳이자 완벽하게 상상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니꼴라 유치원’의 경우는 달랐다.

그곳은 실재했다.
 
전라북도 익산시 창현동 성당 옆에는 천주교 부설 유치원이 하나 있다. 부모님은 나와 남동생을 모두 그 유치원에 보냈다. 천주교인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소설에서 묘사했듯 그 유치원이 익산에서 꽤 유명한 유아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네살 터울의 남동생이 다닐 무렵에는 덜했던 모양이지만, 내가 입학할 때는 정말로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님도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그 실상을 잘 몰랐다. 경쟁이 세다고 해봤자 뭐 얼마나 대단하겠나, 그래봤자 유치원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분은 유치원 입학 접수를 하러 간 날 아침, 건물 밖까지 사람들이 줄을 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이름은 당연히 후보 접수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해 나는 다른 유치원을 다니다가 다음 해 입학했다.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접수일 새벽부터 부지런히 줄을 선 덕분이었다. 그 유치원이 얼마나 좋았느냐,라고 내게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릴 적 일이라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 유치원에서 매를 맞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단체로 엎드려뻗쳐를 하고 엉덩이를 두들겨 맞거나, 꿀밤을 세게 쥐어박히거나, 뭔가를 모른다고 해서 망신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건 확실하다.

그러나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확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소설에서 써먹은 것, 그러니까 강렬하게 흥미를 느낀 부분은 그런 교육적 성과나 목표가 아니었다.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유치원 입학 경쟁이 치열했고, 내 부모님 역시 그 일에 뛰어 들었다는 일화였다. 뭔가 좀 웃기면서도 섬뜩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고쳤다. 작위적으로 포장하고 기괴하게 과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내가 소설을 어느정도 진행한 이후의 일이다.

처음에 나는 한줄도 쓸 수 없었다. 드문 일인가? 아니다. 사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언제나 겪는 일이다. 마치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엉킨 실뭉치 한덩어리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실타래를 푸는 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엉켜 있는 실뭉치 전체가 소설과 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모두 중요해 보이고, 결정적인 단서처럼 느껴진다. 어떤 것도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겁에 질려 있다. 잘못해서 진짜 중요한 실을 잘라내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정말 중요한 부분을 쓸 수 없게 된다면……

그래서 나는 첫 30매 정도는 항상 썼다 지웠다를 무수히 반복한다. 막막하고 짜증스럽기 짝이 없는 과정이다. 이 지루한 반복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해결된다. 소설의 윤곽이 보이는 순간이 오긴 오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은 문장을 쓰면서 서서히 날아가고, 나는 이전보다 조금 용감해진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쓸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쓴다.

그런데, 그때는 평소와 달랐다. 정말로 쓸 수 없었다. 뭘 쓸지도 정했고, 어떻게 쓸지도 충분히 구상했는데,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뭐에 씐 것 같다고 말해야 할까. 정말이었다. 내가 상(像)에 다가갈 때마다 무엇인가 나타났다. 앞을 가로막았고 내가 눈을 뜰 수 없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치원의 외관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소설 속 공간을 떠올릴 수 없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건 핑계였다. 내게는 기억이 존재했다. 물론, 여섯살 무렵에 다닌 유치원이다. 그곳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방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 나는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소설을 쓰기에 충분한, 그런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기억들이. 실제로 「니꼴라 유치원」이라는 허구는 그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은 매우 강렬한 기억 두가지.

하나는 음악실이다. 유치원 건물 지하에 그 음악실이 있었다. 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질 만큼 온도가 낮았다. 둥근 돔 형태의 천장 때문이었던지, 노랫소리가 둥둥 커다랗게 울렸다. 그럴 때면 건물은 꼭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짐승의 뱃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꿈틀거리며 음산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붉은 벽돌. 종종 나는 그 소름끼치는 한기와 불안하고 은밀한 소리들이 두려웠다. 무서웠다. 왜 그런 기분에 휩싸이곤 했던 건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살짝 엇나간 이야기 하나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니꼴라 유치원」을 다 쓴 직후, 그러니까 뒤에서 이야기하게 될 ‘그 사건’이 마무리된 후, 알게 된 진실이 있다. 음악실은 유치원이 아니라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건물 지하에 있었다. 나는 식민지 시대에 기독교 선교사가 설립한 백년이 넘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 오래된 건물 지하에 바로 음악실이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음악실은 선교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콜튼관’ 옆의 대강당 건물 지하에 있었다. 콜튼관과 대강당 사이에는 학교 뒤뜰로 연결되는 긴 복도가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기독교인 친구들은 지하 음악실에 모여 기도를 했고, 그러면 수많은 목소리들이 그 긴 복도 위로 울려퍼지곤 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면, 그때가 언제였든 나는 항상 혼자였다. 그 모든 감정과 기억은 여섯살이 아니라 열일곱살의 것이었다. 어째서 나는 두 기억을 혼동했던 것일까. 하필이면 왜 그 시절의 소리들이 유년의 잔상과 뒤섞인 것일까. 오래 고민했으나 나는 어떤 답도 얻지 못했다.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때문에 유치원에 얽힌 두번째 기억에 대해서도 분명히 내가 겪은 일이라고, 확신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유치원 현관은 대부분의 관공서 건물들처럼 탁 트인 넓은 형태로 되어 있었다. 그날 나는 현관 한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바깥 풍경이 다 보였다. 부모님은 열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원장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입학일 혹은 방학식 날이었던 것 같다. 두분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수시로 나를 돌아보며 뭘 하는지 지켜봤다. 엄마는 말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나는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고.

“친구를 발견했던 것 같아.”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잔디 운동장, 아이들, 성모 마리아상, 성당으로 연결되는 좁은 길, 담벼락 위에 올라앉은 참새 한마리. 그리고 커다란 유리창 양끝을 잡고 함께 걸어들어오던 아저씨 두명.

그들은 내가 서 있는 곳의 반대편 벽에 유리창을 기울여놓은 뒤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2층 창문에 새로 끼울 유리였다고 한다. 다른 물건을 가지러 가면서 잠시 그곳에 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 키보다 훨씬 큰 유리창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그 유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냐하면, 유리 너머에 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정말로 뭔가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손이 유리창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그것을 움켜쥘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나는 정말로 손을 뻗었다.

언젠가 아빠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상했어. 유리는 분명 벽으로 기울어져 있었거든. 애가 좀 건드렸다고 해서 갑자기 반대쪽으로 넘어질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나 넘어졌다. 내가 손을 댄 순간 갑자기 유리가 흔들리더니 나를 향해 기울어졌다. 나는 유리창과 함께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등과 엉덩이를 바닥에 세게 부딪혔고 이어 뒤통수가 아파왔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때 풍경을 부모님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꼭 감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깨진 유리창이 내 얼굴 위로 쏟아지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다치지 않았다. 팔, 다리와 배, 가슴에도 유리조각들이 흩어져 있었으나 옷이 두꺼웠던 덕인지 손등을 조금 긁힌 것 빼고는 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정말로 마음을 졸인 순간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아빠가 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안아 올리자 내 머리카락들이 유리조각에 잘려나가며 아래로 우수수, 떨어져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생생한데, 나는 소설을 전혀 쓸 수 없었다. 

기억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그때의 기이한 느낌, 속삭임, 노랫소리 같은 것들은 내가 어떤 본질에 접근하려는 것을 막았다. 그런 느낌이었다. 집중력을 떨어뜨렸고 초점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기억에서 이야기를 찾으려 할 때마다 나는 매번 글에서 튕겨져나왔다. 내가 쓰려는 것의 형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무엇도 쓸 수 없었다. 답답해진 나는 인터넷으로 그 유치원을 검색해 사진을 찾아냈다. 실제 모습을 보면 묘사하기가 쉬워지니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진들은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내 기억과 거리가 있었다. 음험하고 기괴한 느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가득한 평범한 유치원이었다. 혹시 그 유치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모두 내 착각은 아닐까. 내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그저 잘못된 기억의 일부가 아닐까. 물론 그 예감은 어느정도 적중했고, 때문에 나는 이 모든 이야기의 진위를 검토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긴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혼란스러워하기만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 익산에 가서 유치원을 직접 보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당시 나는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서, 반나절이면 모를까 하루 이상의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다. 나는 매일 압박에 시달렸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보이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느낌 때문에 괴로웠다. 무언가 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오래전 음악실에서 울려퍼지던 그 소리들처럼.

바로 그즈음, ‘대불호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강화길
소설가. 소설집 『괜찮은 사람』, 장편소설 『다른 사람』이 있다.




2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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