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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일'이란 무엇인가

문학3
2019년 06월 20일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1853) 1)는 ‘월가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19세기 중반 근대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부상한 뉴욕의 한 사무실 이야기이다. 오늘날 세계문학의 고전으로도 읽히지만 현대의 여러 철학자들이 공들여 해석한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뉴욕 월가의 변호사다. 그는 “젊을 때부터 줄곧 편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고 “부당한 일이나 황당한 일에 분개하는 위험천만한 행동”은 삼가는 사람이다. 바틀비는 그의 사무실에 필경사로 고용된다. 바틀비는 처음에 매우 열심히 일한다. 바틀비가 얼마나 훌륭한 직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런 구절이 말해준다. “처음에 바틀비는 엄청난 양의 필사를 했다. 마치 뭔가 필사할 것에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그는 내 문서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듯 했다. 소화를 위해 쉬지도 않았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촛불을 켜고 필사를 했다.”
하지만 화자가 바틀비에게 필사 말고 다른 서류 검토 작업을 해달라 요청하자 바틀비는 처음으로 “I would prefer not to”(이 말의 해석 자체가 여러 철학자들 사이에 오간 쟁점이기도 하므로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지는 않으려 한다)라고 말하며 자기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그는 비슷한 상황마다 온화하고 평온하게─그래서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하게─이 말을 반복한다. 그는 필사하는 일 이외에는 모든 일을 거부하다가 필사하는 일조차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그는 모든 요청과 권유와 제안을 거부한다. 그때마다 읊조리는 말이 바로 위의 말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격렬히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와 같은 오늘날의 우스갯말도 바틀비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 속 인간의 소외된 삶’과 그것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강조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시선을 달리하여 읽으면 더 많은 것이 보일 것이다. 즉, 소설은 고용인 변호사의 입장에서 자신이 고용한 직원 ‘바틀비’를 그리고 있지만, 고용된 ‘바틀비’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이란 무엇이고,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이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탄식/경탄으로 끝나는 것도 이와 관련해서 생각할 대목이다.

〔문학3〕 2019년 2호 주목 주제는 ‘일’이다. 각자의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이야기와, 최근 문학에서 일별할 수 있는 일의 문제를 점검하고자 했다. ‘노동’이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일’이라는 말을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 때문이다.

첫째, 오늘날 ‘일’이란, 정치경제학적 ‘노동’ 개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성 속에 놓여 있다. 지금 노동의 문제는 자본가/노동가, 정규/비정규, 남성/여성, 육체노동/정신노동 식의 이분법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정규직은 좋고 비정규직은 나쁘다 식의 인식도 다양하게 질문 받고 있다. 본래 정규/비정규 이분법 고착을 비판해온 이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최근 알바 광고 메시지의 변화도 그러하다. 

둘째, ‘노동(labor)’이라는 말은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work)의 의미를 지우고 협소화한 측면이 있다. 과거 ‘노동해방’은 노동자 인간의 권리투쟁이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러한 ‘노동’ 자체를 폐지하는 상상력까지 의미했다. 이것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틀비의 저항이 보여준 인간의 잠재력을 환기하는 의미까지 지닌다. 이것은 나아가, 고통스러운 노동을 어떻게 내 삶의 의미와 활력으로 전유할 것인가의 문제로도 연결된다.

셋째, 기존 노동(자)의 대표는 ‘정규직+남성’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표상은 일하는 사람들 전체를 이야기하지 못해왔고 노동 문제 안에서도 주변으로 배제되는 이들을 만들어냈다. 지금 그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일의 영역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이것은 일, 노동의 문제를 넘어서 살아 있음, 관계 맺음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이번 주목은 오늘날 ‘일’의 현장과 문제에 대한 한 사례에 불과할 것이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노동, ‘투쟁’으로밖에 존엄을 찾을 수밖에 없는 노동의 현장도 이 기획이라는 사례를 넘어서 여전히 많다. 그 현장을 만들어내는 기울어진 세상도 물론이다.

하지만 이번 주목이, 기울어진 세상의 문제를 포함하여 일, 노동과 무관한 삶은 없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일의 문제는 결국 인간과 삶의 조건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틀비의 저항이 단지 소극적,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각각이 제약받고 있는/그리고 발휘해야 할 잠재력과 존엄까지 고민케 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두고 싶다. 

모든 일하고 있는, 아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모든 존재들. 오늘도 무사하시기를, 행복하시기를.


 


1) 이하 인용은 한기욱 옮김 「허먼 멜빌─필경사 바틀비」(『필경사 바틀비』, 창비 2010)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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