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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쥐들

박승열
2019년 07월 03일
                   
 

하얀 쥐들
 

내가 열한번째 박스를 접어 더미 위에 올려놓았을 때 애인이 내게 말했다 꼭 그렇게 그것들을 다 접어야겠냐고 나는 그것이 내 윤리적 습관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박스를 정리해놓기도 불편하고 수거해가시는 분들도 고생하시지 않겠느냐고, 그러자 애인은 신경질을 내며 나를 밀쳐내곤 내가 접어놓은 박스들을 다시금 펴서 조립하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주춤 물러선 채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다음 날 나는 네모반듯하게 조립된 박스들 사이에서 깨어났다 애인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박스들이 마치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것들에게는 아무 생각이 없으므로 그럴 리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박스들은 건조하게 자신들의 모양을 내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박스 하나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안도하며 다른 박스도 하나 열어봤다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이번엔 낙담하며, 세번째로 박스를 열어봤을 때 그 속엔 쥐가 들어 있었다

쥐는 죽어 있었고 나는 애인을 흔들어 깨웠다 애인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자꾸만 몸을 뒤척이며 알 수 없는 잠꼬대를 했다 동전…… 10원짜리 동전...... 동전이 열개면 이제는 건물도 세울 수 있겠어…… 너! 자꾸 그렇게 소리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제 와서 무슨, 이제 와서 무슨 땅따먹기를 한다구…… 쥐는 눈을 뜬 채로 죽어 있었다 쥐가 죽어 있는 박스 안으로 빛이 밀려들어왔고 박스 안은 마치 온실처럼 보였다 나는 비어 있던 두개의 박스 안에서 하얗게 쥐가 한마리씩 피어나는 것을 봤다 처음엔 그것이 쥐인지 알 수 없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빛 속에서 그것은 점점 쥐의 형태를 갖춰갔다

한마리씩의 쥐는 각자의 박스 속을 가열차게 뛰어다녔다 그런 와중에도 애인은 깨지 않았다 10원짜리 동전…… 동전이 열개면 이제는 건물도 세울 수 있겠어…… 너! 자꾸 그렇게 소리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제 와서 무슨, 이제 와서 무슨 땅따먹기를 한다구…… 이제는 정말 박스들을 내다버려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박스들을 가만히 두었다간 이 집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힘들어질 거야 박스 속에서 쥐가 피어오르는 것, 그건 분명 보기 힘든 풍경이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간 쥐들에게 기꺼이 집을 내어주게 되고 말 거야…… 그런 식으로 내가 알 수 없는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고, 잠에서 깬 내게 애인이 말해줬다 집 안에는 박스가 하나도 없었고 나는 애인에게 박스의 행방에 대해 물어봤으나 애인은 나를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애인의 잠꼬대 소리는 희미하게 들려왔다 10원짜리 동전…… 동전이 열개면 이제는 건물도 세울 수 있겠어…… 너! 자꾸 그렇게 소리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제 와서 무슨, 이제 와서 무슨 땅따먹기를 한다구……
 
 


 「명사」  
쥐는 희다. 쥐는 검다. 쥐는 그외에도 많은 색을 가지고 있다.



박승열
2018년 『현대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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