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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당할 수 없는 것

강보원
2019년 07월 26일
    

 

  

'키워드3' 여섯번째 키워드는 'yes'과 'no'입니다.
응답이기도, 태도나 허가이기도 한 두 단어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네번째로는 문학3에 원고를 투고한 강보원 평론가의 글을 싣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댓글과 투고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투고하실 분은 이메일 munhak3@munhak3.com으로 A4 3장 이내의 완성된 글을 보내주세요.
한분을 선정해 연재의 마지막 지면과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분 중 한분께는 문학지 8호와 신간을 선물로 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yes-(자유)-no

 


 
1. 세가지 슬픔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을 하고 나서 처음 받아본 청탁은 어느 중소 규모 문예지에서 온 리뷰 청탁이었다. 윤대녕 작가의 두꺼운 장편 소설에 대한 리뷰를 좀 써줄 수 있겠냐고 했다.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윤대녕 소설을 읽고 아주 좋았으니 꼭 읽어보시라고 쓰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청탁 전화를 준 편집자는 의외로 다른 방책을 제시했다. 리뷰라고 해서 꼭 좋은 말만 쓰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지면의 성격이 성격이니, 윤대녕 작가가 좀 꺼려지면 다른 시인의 시집도 리뷰 할 게 있는데 그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제목을 알려주면 읽어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시집을 읽어보니 토속적이고 통속적인 기독교적 신앙심이 스며 있는 서정시집이었다. 역시 내 취향은 아니라서 어렵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알겠다고,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같이 작업하면 좋겠다고 답장이 왔다. 그게 벌써 몇년 전 일이다. 그 뒤로 같이 작업할 기회가 오지는 않았다……
 
그후에 한 출판사에서 세미나를 같이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본격적인 세미나 시작 전 모임을 가졌는데 유명한 평론가도 꽤 있었고(누가 누구인지 다 알지도 못했다) 맛있는 것도 대접해주고 해서 뭔가 시작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평론 공부를 하면서 끔찍한 글을 썼는데도 어딘가 자리를 꿰차고 있는 저자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말하자면 데스노트 같은 걸 가지고 있었고 등단을 하면 그들을 축출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쯤에 옆자리에 앉은 비교적 젊은 평론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곧바로 전쟁을 시작했다. “제가 ○○○ 평론가를 너무 싫어해요. 글 진짜 너무 못 쓰지 않나요? 어떻게 그 시집 해설에다 그런 글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의 대답이 의외였다. “아…… 그런데 그분 지금은 절필하신 걸로 알아요.” 나는 이상하게도 슬픈 감정이 들었다. 절필이라니. 이 사람도 자기 스스로 글이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었겠지.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걸 이 사람도 알고 있었을 거야. 잠깐 침묵이 흐르고 나서 나는 데스노트에 적혀 있던 다른 한 평론가에 대해 말했다. “제가 싫어하는 평론가가 딱 한 사람 더 있는데요. □□□이에요. 이 둘은 공통적으로 너무 좋은 시집에 너무 이상한 해설을 실어놓아서 도저히 용서가 안 돼요.” “아…… □□ 누나요?” 그때는 기분이 진짜 이상했다. “□□ 누나도 지금은 절필하신 걸로 알아요……”
 
그때 나는 그냥 어렴풋이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어떤 슬픔 속에서.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글을 쓴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관련이 있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이런저런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말이나 문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나를 실제로 압박한 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실제로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청탁을 거절했던 문예지에서 다시 청탁이 오는 일은 없었지만, 명망 있는 평론가를 비난했어도 다음 모임에는 나갈 수 있었다. 그 세미나는 두세번 나가고 그만뒀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결정적으로는 두가지 정도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런 세미나를 계속하다보면 시를 쓸 시간이 부족해질 거란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다 사실 나는……) 다른 하나는 그 세미나에서 오한기의 「새해」를 읽었는데(당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세미나에 참여했던 어떤 평론가가 그 작품이 별로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세미나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금정연과 정지돈은 「We are the future」라는 제목의 장이 포함된 책을 출판했다……)
 
나중에 밝혀지기로, 미래가 없던 것은 내 쪽이었다. 남은 게 전혀 없지는 않았다. 뭐가 남았을까? 이런 트윗 하나가 남았다.
 
작년에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한 평론가가 2019년 1월에 쓴 트윗이다: “강보원,에 대한 트윗은 2017년 이후로 없다. 그런 것이 슬프다.
 
이런 슬픔들. 하지만 왜 슬플까? 그러니까 이 슬픔은 정확히 어떤 원인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언제나 글을 쓴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관련이 있지만. 정확히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일까?

 
2. 두가지 권력
 
문장 웹진의 익명 대담1)을 읽으면 수사적으로 변별되는 두 종류의 권력이 있는 것 같다.
 
권력1: 대담에서 문단권력의 핵심으로 지적된, 평론가들이 가진 권력에 대해 얘기할 때 그것은 매우 명확하다. 그것은 “불가침의 절대 권력인 게 너무 당연(인공눈물)”하고 “엄청난 권력(인공눈물)”이며 이를 지녔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에게 “그는 권력자다(손톱깎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도 있다.

권력2: 한편으로 등단 그 자체가 권력이냐는 논의에서 이 권력은 조금 더 “미묘하게 존재하(손톱깎이)”는 무언가가 된다. 이 권력은 “작가가 가져가는 게 아니라…… 작가 개인이 성취한 것처럼 보이지만(손톱깎이)” “이것이 작가가 획득한 권력은 아니며, 그 권력 사회를 엿볼 수 있게 하는……(손톱깎이)” “그런 티켓(햇반)”에 불과한 것이 된다.
 
한번은 시를 쓰는 친구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이 진짜 시인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물론 이는 지금 쓰이고 있는 소설이 다 시라거나 혹은 단순히 시적인 소설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아무튼 친구는 그냥 동의하는 것을 넘어 한술 더 떠서 경기도가 진짜 서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제가 밤에 경기도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들이 없으면 서울은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서울은 경기도다……” 알렌카 주판치치도 비슷한 말을 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하찮은 관료가 아니라 하찮은 관료인 척하는 신이다.” 2)
 
이를 이렇게 바꿔 쓸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이 문단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하찮은 문인이 아니라 하찮은 문인인 척하는 문단 권력이다.”

이 글의 맥락에서 이 인용은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이 인용 덕분에 방금 내 이마에 지젝 스티커가 붙여졌다는 것이다(물론 늘 이 스티커가 갖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이 인용이 앞의 대담에서 논해지는 권력과 부자유의 관계를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알렌카 주판치치의 요지는 단순하다. “주체에게 가장 힘든 일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신’임을, 즉 자신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3)
 
중요한 건 그래서 결국 등단이 권력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미묘하게 존재하”는 권력이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효과적으로 주체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왜 그리고 어떻게 어떤 행동 혹은 어떤 저항은 객관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전제되는가? 대담자들은 무엇보다 극심한 자유의 부재 속에서 진심으로 괴로워한다. [“우리가 작가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권력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템인 거잖아요.”(인공눈물) “우리한테 자유가 없는 거요. 글을 쓸 수 있는 자유가.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햇반)]
 
카프카에 따르면 권력은 문 그 자체다. 내 친구의 말에 따르면 서울은 경기도다. 우리의 맥락에서 권력은 티켓이다. 그리고 나는 권력이 두개인 것처럼 티켓도 두장이라고 생각한다. 티켓 1: 들어가는 용도. 티켓 2: 나오는 용도.

 
3. 글쓰기의 자유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문제는 언제나 글을 쓴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관련이 있다. 물론 시스템은 중요하다. 이 글에서, 대담에서 논의된 폭넓은 소재들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대담자 ‘아아’의 관점에 공감한다. 출판 권력은 분산되어야 하며 이 주제는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우선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보다는,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글쓰기의 자유란 무엇보다 써야 하는 것을 쓰는 것이다. 이 자유의 행사는 엄연히 현존하는 권력에 눈감거나 그로부터 등 돌리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무관하게 써야 할 것을 써나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자유의 행사는 때로 전복적인 성격을 띨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자발적인 행동이나 저항은 아닐 텐데, 우리는 원치 않게, 비자발적으로, 피치 못하게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의 행사는 그것이 초래할 결과에 무관심하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볼라뇨의 한 소설에서 어느 칠레 작가는 베를린에서 신나치 젊은이 세명이 칠레인 여성 노숙자를 구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는데, 이 장면을 서술하는 몇개의 문장은 자유와 관련된 묘한 비자발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의 두 눈은 눈물로, 자기 연민이 어린 눈물로 그렁거렸으리라. 그는 자신의 운명을 찾았음을 직감했기에. 삶은 텔켈과 울리포 사이에서 다양한 사건들의 페이지를 결정하고 선택한다.”4)
 
그리고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 걸까? 가령 나는 어떨까? 아주 사적인 예를 드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항상 대중을 향해 쓴다고 생각한다(그렇지 않은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작가들도 분명히 있다). 대중들이 쉽게 읽고 재밌어 할 만한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나에겐 있다(아마 이 욕망도 어떤 시점에서, 또한 어떤 수준에서는 포기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애초에 그 대중이 지금 이곳에는 없는 대중이라면 어떨까? 말하자면 100년 후의 대중이라면 어떨까? 혹은 100년 후에도 그 이후에도 결코 존재할 리 없는 내 상상 속의 대중일 뿐이라면? 그런 게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계속 글을 쓴다면 나는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글을 쓸 자유를 결코 박탈당할 수 없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렇다면
슬픔은 어디서 올까? 실은 그게 별로 끔찍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글을 쓴다: 티켓 한장을 써서 문을 나오고 나면 뭐가 남을까?
 
 

 
강보원
문학평론가.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  김남숙 기획, 문장 웹진. ‘익명 대담 6회’(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4143)

2) 알렌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4, 155면.

3) 같은 책, 155면.

4) 로베르토 볼라뇨 『먼 별』, 권미선 옮김, 열린책들 2010, 1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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