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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11회)

강화길
2019년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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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모든 기억이 흐릿하다. 그림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형편없는 그림. 셜리가 「폭풍의 언덕」을 발견한 뒤, 연주는 내게 쫓아왔다. 나는 “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라는 말을 반복했다. 연주는 듣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고 했더라.

끔찍한. 최악의. 믿을 수 없는. 더러운. 은혜도 모르는. 그래, 이렇게 말했다. 은혜를 모른다고.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

“너는 살인자야. 끔찍한 살인자. 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지.”

정말로 연주가 한 말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연주가 정말로 내게 그렇게 무서운 말을 했을까.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는 사람은 연주가 틀림없다. 보송보송한 뺨과 커다란 눈, 살짝 메마른 입술. 그러나 연주가 내게 화를 내는 장면은 아주 짧게 남아 있다. 기억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셜리와 연주의 끊이지 않는 대화.

셜리는 연주에게 소리를 지르고 침묵한다. 연주는 셜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영어로 들려오는 그 말을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만 모두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에요. 모두 오해예요. 제가 그 책을 읽은 건 맞지만, 에밀리 브론테가 저를 찾아오는 건 사실이에요. 이 집에는 그녀가 살고 있어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그녀 때문에 저는 두려워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정말 무서워요. 그녀가 저를 죽일 것 같아요. 언젠가는 정말로 그럴 거예요. 이 집이 저를 미치게 만들어요. 다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책을 읽었어요. 책 속의 문장들이 내가 느끼는 막연한 느낌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줬어요.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정말. 정말. 정말이에요. 제 이야기를 다 믿으셨잖아요. 제 이야기에서 뭔가를 느끼셨잖아요. 그래서 쓰셨잖아요. 그건 거짓인가요? 아니잖아요. 그건 진짜가 맞잖아요.

옆방에 있으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연주의 목소리는 애처로웠고, 셜리의 목소리에는 배신감이 가득했다. 나는 홀로 침대에 앉아 그 소리들을 들었다. 때때로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했다. 그러면 어디선가 낄낄낄낄,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아, 드디어 나도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걸까. 이제 정말로. 그래서 아마 그날도, 아마 연주가 셜리에게 용서를 구하며 빈 지 사흘쯤 되었을 것이다. 기억은 흐느끼는 소리로부터 시작됐다. 연주의 울음소리. 단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연주는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셜리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런지 한참 되었다.

사실 셜리는 전날 사람을 불러 우편을 보냈다. 나는 그것이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상상한다. 이제 돌아갈 것이라고, 이곳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고, 나는 어떤 영감도 받지 못했다고 분노의 글자들을 나열한 편지를. 그리고 조금 더 상상한다.


‘나는 이 빌어먹을 미친 집에서 미친 일들을 겪고 있어. 이건 영감도 무엇도 아니고 그저 끔찍한 경험에 불과해. 당신은 이게 예술이라고 생각해? 당신은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 이게 나를 한계로 밀어붙이고 그래서 나를 새로운 이야기로 끌어낼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래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거 알아? 내가 이걸 이야기로 쓴다면, 아마 당신의 그 비열하고 멍청한 강요가 가장 큰 공포로 묘사될 거야. 왜냐하면 나를 한계로 몰아붙이는 건 이 낡아빠진 건물이 아니라 당신의 그 저열한 판단 때문이니까. 그러면 당신은 또 말하겠지. 결국 내 덕에 소설을 쓸 수 있는 거라고. 그래? 그럴까? 당신은 내가 없으면 무엇도 판단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는 당신이 없어도 무엇이든 쓸 수 있어. 내 감정은 내가 느끼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내가 이야기를 결정하는 것이니까. 바로 그걸 여기서 깨달았어. 당신이 나를 여기 남겨둔 덕분에 깨달았지. 그리고 이제 나는 여기를 떠날 거야. 당신도 떠날 거야. 당신처럼 작은 인간이 상상하는 범위에 나를 가둬두고 싶지 않아. 당신은 대불호텔이야.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래된 폐가이지. 이곳에 나를 가둬둔다고 해서 내가 똑같이 너저분해지지는 않아. 바다는 넓고 나는 내 배를 운행할 줄 알아. 내 배를 움직이는 건 나야. 당신이 아니지. 나는 내 배의 선장이고 주인이야. 나는 웃으면서 이 배를 움직일 거야.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너, 나를 속이고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너. 너를 내가 용서할 거라고 생각해?’


그 순간 나는 상상을 멈춘다. 갑자기 궁금하다. 셜리와 연주는 무슨 약속을 했을까. 셜리의 분노는 무엇 때문일까. 자신이 겪는 기이하고 이상한 느낌을 다른 사람도 함께 겪었다는 생각 때문에 기뻤는데, 오래 전 죽은 위대한 소설가가 나타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는데, 그 모든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연주를 믿었는데,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혹시 두 사람은 약속을 했을까? 그러니까, 함께 떠날 약속. 셜리는 연주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을 했을까? 연주를 여기서 꺼내주겠다고 말했을까? 알 수 없다. 어쨌든 두 사람 사이가 틀어져버린 것은 사실이다.

낄낄낄낄.

나는 웃지 않았지만 웃음소리가 들렸다.

낄낄낄낄.

소리는 조금 더 커졌고, 나는 그 소리를 듣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옆방에서 연주의 흐느낌이 멈췄다. 이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나가.”

연주가 내게 말했다.

“뭐라고?”

내 말에 연주는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내게 양심이 있다면 알아서 나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그래, 파렴치하다고 했다. 파렴치하고 뻔뻔하다고. 그러더니 연주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안간힘을 써서 버텨보았지만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연주의 힘이 너무 강했다. 그녀에게 그런 힘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연주에게 끌려 문밖으로 나왔고, 넘어졌다. 연주는 그런 나를 일으켜 세웠고 그 순간 어떤 소리가 들렸다.

“웃어? 감히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옆에서 큰 소리로 웃어?”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구지? 누가 내게 말하고 있는 거지? 공간이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방이 나를 향해 좁혀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나는 연주의 팔을 잡았다. 매달렸다. 하지만 연주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질질 끌어냈다. 계단이 보이는 순간 위아래가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나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천장에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닥이 흐물흐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피가 머리로 쏠렸고 비명과 함께 목소리들이 내 귓가로 파고들었다. 내가 너랑 살 거라고 생각했니? 너는 불청객이야. 언제 어디서나 그렇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거야. 나는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바로 아래 보이는 계단 난간을 잡기 위해 애썼다. 손끝이 난간에 닿을락 말락 했다.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가버려. 가버려. 우리는 더이상 너를 원하지 않아. 이곳에 너는 필요 없으니 가버려. 너는 여기 머물 수 없어.

나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

너도 여기 신세를 지고 있을 뿐이잖아! 아마도 그렇게 연주에게 소리쳤던 것 같다. 아니, 이 집을 향해 그렇게 말했던가. 모두 여기에 빌붙어 있을 뿐이야. 누구도 나한테 명령할 수 없어. 나는 난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꽉 잡았다. 나는 항상 어떻게든 해냈어. 어디든 비집고 들어갔지. 나는 여기 있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있을 거야. 그러자 공간이 다시 뒤집혔고, 나는 바닥에 섰다. 양손으로 난간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 연주는 내 아래에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 위에 올라탄 채로 양손으로 그녀의 목을 꽉 누르고 있었다. 연주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연주야?

그녀는 내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디선가 스며드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의 또렷한 비명과 외침이었다. 
 

겁에 질린 셜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이, 셜리. 이제 정말 둘뿐이네요.”


 


강화길
소설가. 소설집 『괜찮은 사람』, 장편소설 『다른 사람』이 있다.




최종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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