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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몸이 있다니

조시현
2019년 10월 24일
  



 

세번째 여성, 조시현 소설가

내게도 몸이 있다니 


 

사실 지금까지 문학과 내 몸을 의식적으로 연결 지어 생각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글을 읽고 쓰는 순간, 물리적인 몸은 여기에 있지만 나는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으니까. 그런데 너무나 당연하게도 몸 없이 글은 쓰이지 못한다. 내 작업방식부터가 그렇다. 먼저 손 글씨로 대략적인 구성을 잡는다. 머리에 있던 것은 손을 통해 종이에 옮겨진 뒤 다시 머리로 들어와 손을 거쳐 모니터에 옮겨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단순한 의미에서라도 문장은 몸을 거치지 않고 나올 수 없다. 그런데 문학 이전에 먼저 삶이 있고, 내게는 그 삶을 잘 영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금 여기’를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몸이니까, 결국 둘을 연결 지으려면 내가 지금 여기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런데 내 몸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내 몸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이 글은 그런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아마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몸을 의식할 혹은 긍정적으로 인식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나는 양쪽 무릎 뼈가 튀어나와 있는데 이 증상은 오스굿씨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명칭은 병이지만 심각한 것은 아니고 활동성이 높은 성장기 남자애들에게 특히 많이 생기는, 뼈가 점점 튀어나오는 증상이다. 초등학교 내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하루 온종일 밖에서 뛰어다니던 내가 저런 증상을 가지게 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여자애 다리가 이게 뭐냐며 걱정했다. 의사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남자애’들이 앓는 증상을 내가 앓고 있다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최근 축구를 하다 허벅지 파열로 병원에 갔을 때 의사선생님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런데 어쩌다 축구를……?” 같은 질문도 들었다. 마치 내가 터무니없는 음모에 빠져들어 의지와 상관없이 운동장에 내던져지기라도 한 것처럼)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는 예전만큼 뛰어다니지 않게 됐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에 대한 검열과 부정은 점점 심해졌다. 생리하는 몸, 성적 호기심이 있고 흥분하는 몸, 운동하고 싶은 몸, 먹고 싶은 몸, 욕망을 가진 몸, 그것은 모두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정적인 것이었다. 학교에서의 단속도 거의 여자애들을 향해 있었다. 머리 길이, 화장 여부, 교복 사이즈, 양말, 렌즈, 스타킹, 몸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검열과 평가의 대상이 됐다. 이것은 적당한가, 저것은 괜찮은가. 너무 길어도, 너무 짧아도 모두 문제가 됐고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골칫거리였다. 나의 모든 것이 시선에 노출되어 있었다. 일탈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거기서 오는 것 역시 ‘정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감각이었다. 

어느 순간 내가 존재하는 방식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있어도 되나. 이건 맞나, 틀린가. 이런 감각은 옳은가, 그른가. 내가 이걸 원하나, 아닌가. 신체를 경유해 들어오는 모든 감각이 의심의 대상이 됐다. 그것은 곧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여기 있는 게 잘못된 건 아닌지, 내 부피가 얼마나 되는지, 어디까지가 나에게 허락된 공간인지 생각하게 됐다. 눈에 자꾸 띄어서 지적받느니 사라지는 편이 쉬웠다. 그리고 망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상상 속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읽는 일을 좋아했지만 이즈음부터 책에 빠져든 것 같다. 몸은 여기 있으나, 진짜 나는 여기에 없었다. 나는 이야기 속을 헤맸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무언가를 빼앗겨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디에나 있어도 되고, 내가 있고 싶은 방식으로 있어도 괜찮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좋다는 것을. 

작년에는 ‘춤으로 말 걸기’라는 교양수업을 들었다. 월요일 오전 수업을 들으면 이틀 공강을 만들 수 있었다. 강의명을 쭉 훑어봤는데 가장 재미있을 것 같았다. 워낙 움직이는 걸 좋아하니까 그게 춤이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오래 앉아서 글을 쓰다보면 의식적이지 않고는 몸을 움직이기 힘드니 건강에도 좋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교수님은 우리가 몸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야 하며, 몸을 바라보고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준다는 말과 함께 수업을 열었다. 수업은 몸의 긴장감을 푸는 것으로 시작했다. 스튜디오를 마음껏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 대신 하이파이브를 했다. 대부분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손바닥이 먼저 닿았다. 다음으로는 양말을 벗었다. 한번도 발 전체를  전부 땅에 붙이며 걸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그때까지 몰랐다. 온몸으로 걷고 있지 않다는 것, 사용하는 부분들만 사용하게 된다는 것. 몸을 사용하는 방식은 말하는 방식과 닮아있구나. 익숙한 단어들만 골라 말하듯 익숙한 부분만 사용해서 움직이게 되는구나. 그때 깨달았다. 발바닥과 발가락 전부를 바닥에 대고 단단하게 붙어 있는 그 느낌. 처음으로 온전히 서 있는 듯한 느낌. 어쩐지 위로가 됐다. 몸에 힘을 빼고 늘어뜨린 뒤 무게중심을 이리저리 옮겨보았다. 땅이 나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수업 후반부에는 전체가 함께 움직였다. 상대의 기척을 읽고 흐름에 따라 움직이거나 멈추기, 정말로 춤으로 말하고 대답하기, 어둠 속에서 걸어가며 떠오르는 문장을 한 사람씩 뱉기, 한명만 눈을 감고 나머지는 눈 감은 사람의 신체를 조종하기, 모두가 손을 잡고 움직여 풍선을 절대 떨어뜨리지 않기, 바짝 모여 서서 서로의 무게중심에 몸을 맡기기. 하나가 무너지면 전부 무너질 것이기에 모르는 사람을 믿으며 넘어지고, 그것을 지탱하고 받쳐 세워 올렸다. 처음에는 분명 놀이처럼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괜히 눈물이 났다. 풍선을 절대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모두가 손을 잡고 움직이는 일이 특히 그랬다. 무언가를 끝까지 가지고 가기 위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끈끈하게 필사적으로 연결되어 움직였다. 나 역시 모르는 사람의 손을 꽉 잡고 풍선을 띄워 올렸다. 함께 있다는 감각, 느슨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 느낌. 그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나. 아마 각자가 띄워 올리던 것의 의미는 달랐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말없이 움직이는데도 더 많은 게 느껴졌다.

멈추고 움직이는 건 자기 마음대로지만 반드시 주변을 인식할 것. 내가 여기서 어떻게 움직이고 싶은지와 왜 움직이고 싶은지를 생각할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모두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볼 것. 그 순간 나는 내 몸을 처음으로 온전히 의식했다. 몸이 움직이는 방식이, 문장이 작동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고 느꼈던 그 순간. 그러니까 글을 쓰는 나와 글을 쓰는 내 몸이 일치된 순간. 오래 서 있자면 발바닥을 타고 냉기가 올라와 저절로 허리가 펴지던 그 스튜디오가 종종 생각난다.

그래서 다시. 내 몸에 대해 얘기하려면, FC파랑새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다. FC파랑새는 트위터를 통해 알게된 사람들과 지인들로 꾸려진 여성운동모임이다. 매번 종목을 정해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마라톤이나 볼링, 클라이밍 등을 즐긴다. 자전거도 타고 배드민턴도 친다. 단체 티도 있다. 운동을 하고 싶은 주변 여성들을 모았더니 금방 모였다. 원래는 22명을 모아 축구를 할 생각이었는데 아쉽게도 모인 것은 19명뿐이어서 하고 싶은 운동을 번갈아가며 하게 됐다.(나는 결국 다른 축구단에 들어갔다.) FC라고 이름 붙인 게 민망해질 지경인데 구성원이 전부 여자다보니 그러면 Feminist Club으로 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연기나 연극, 시나 소설에도 저마다 관심이 있어서 활동은 점차 다양해졌다. 연습실을 빌려 표정연습이나 발성연습 같은 걸 하고, 우리끼리 낭독회도 열었다. 내가 아, 소리를 한번에 15초 동안 낼 수 있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마스크를 쓰고 시위도 나갔다. “하고 싶으면 해야지!” 그게 모토였다. 단순히 운동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함께했다.

그러다 궁중족발 낭독회에서 특별공연을 하게 되었다.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파랑새U(유닛)라는 이름으로 모여 대본을 썼다. 먼저 대사를 외웠고 연습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동작을 가미했다. 몸을 쓰고 싶은 대로 실컷 쓰면서 연습을 빙자한 막춤도 췄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다. 연극이니 몸을 사용해서 연기를 해야 하는데 대체 어떤 동작을 넣는담? 나는 무슨 동작을 하고 싶담? 이 대사에서 뭘 느끼고 있으며 어떻게 보여줘야 한담? 대사를 읽다보니 내 기분과 감각에 집중하게 됐고, 몸을 들여다보게 됐다. 여러 방향으로 사용해보게 됐다. 친구들의 동작을 보면, 친구들의 해석도 알 수 있었다. 내 몸을 보고, 친구들이 자신의 몸을 보는 방식을 봤다. 연기는 그 모든 것에 확신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낯선 외국어 대사는 혀에 잘 익지 않았다. 대사 뒤에 음악이 깔렸다.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 탬버린, 나중엔 심벌즈. 처음에는 음악이었다가 점점 소음이 되는 방식이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분위기는 고조되고 연극은 엉망진창이 됐다. 부조리극 같다는 평가를 들은 연극의 내용을 말로 풀어내긴 참 어렵지만, 어긋난 대화를 이어가던 세 사람이 마침내 각자 단어 하나를 반복적으로 외친다. 발음도 길이도 국적도 다른, 그러나 같은 의미를 가진 하나의 단어를. 차마 문장이 되지 못했지만 더 많은 게 담겨 있을지도 모를 단어를 외치면서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최소한의 말이 최대한의 것이 되는 순간. 허락된 말이 많지 않아도 어떻게든 터져 나오는 소리들. 억누름과 분노와 폭발. 나의 움직임이 타인의 움직임과 만나 단순히 행위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큰 의미를 만들어냈던 그 순간. 우리는 그 연극에 ‘분노한 여자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공연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내 몸을 일깨워주었다. 여기 내가 있음, 말하는 내가 여기에 있음. 말해야 하는 내가 여기에 있음. 함께 여기에 있음. 그 깨달음은 쓰기와도 이어진다.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걸 우선 통과하는 것은 몸이니까, 문장은 결국 몸에서 살에서 비롯된다. 나에게 그 문장은 내 삶이나 생에 대한 끝없는 부정을 거쳐 나온 것이다. 몸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검열과 의심은 삶을 받아들이고 사유하고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검열과 의심과 겹쳐 있다. ‘글 쓰는 여성의 몸’이라고 묻는다면, 이런 얘기를 먼저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글쓰기란, 일차적으로 내 몸이 구체적으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 이 세계 안에서 내 자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혹은 그래도 됨)을 나에게 확인시키는 과정이다. 내 시선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서서, 이것을 보고, 이것을 하고 있어. 내가 지금 여기 있어. 왜 쓰냐는 질문을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는 질문과 같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 때문인 것 같다.

글 속에 있으면 내 몸은 한없이 불어난다. 쓰는 동안 나는 잠시 현실의 몸을 잊는다. 그 모든 순간이 의심스럽다. 쓰면서 도망치고 있는 걸까? 방에 앉은 채로도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만을 느끼고 싶은 건 아닐까? 순간에는 나름대로 치열했던 것 같은데 막상 현실을 마주하면 모든 문장들이 너무 한가해 보인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나는 다시 의심과 검열 앞으로 돌아온다. 내가 이것을 사랑해도 되나? 해도 되나? 이게 정말 내 일인가? ……그러면 하고 싶나? 그런데, 하고 싶다. 쓰는 건 내가 사랑하는 일이고 끝까지 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니까 쓰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쓰는 나를 쓰고 싶은 나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하게 됐다. 나는 내가 나인 방식으로, 나이고 싶은 방식으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단은 쓰는 나를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볼 예정이다. 내가 나여도 된다는 것을 좀더 오래전부터 알았더라면 좀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내 몸이 여기에 있어도 되는 것처럼, 내 글도 여기에 있어도 된다. 나는 써도 된다. 말해도 된다. 이게 합리화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 것이다. 여기 존재하는 몸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다. 그것을 살아낸 몸으로 다시 무언가를 쓸 것이다. 몸이 포개져 움직였던, 서로를 따라 이리저리 기울어지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그날의 감각을,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같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우리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내 몸을 알아가는 중이다.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스스로를 긍정하며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보며,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아가 친구들과 함께 뛰고 살을 맞대고 같이 무너지고 있는 힘껏 지지하고 내키는 대로 소리 지르고 춤췄던 그 감각이 나를 여기에 붙들어주었다. 우리가 같이 여기에 있다고. 내가 내키는 방식으로 있어도 된다고. 내가 느끼는 게 진짜라고, 내 판단을 믿어도 좋다고, 똑같이 무섭고 괴롭지만 함께 움직이면서 여기에 있자고, 자신의 감각을 믿고 바라보자고. 그러다보면 단순히 목소리가 아니라 목소리가 넘어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고. 때로는 몸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그것을, 함께 알아갈 수 있는 멋진 친구들이 곁에 있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밖으로 불러낸 것은 언제나 주변 여성들의 단단한 목소리였고, 현실에 붙들어준 것은 친구들의 단단한 손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손이 지금 여기 나에게도 있다.


마지막으로 FC 파랑새는 모든 여성들에게 열려 있다. 운동하고 싶은 여성들, 모여서 뭔가를 하고 싶은 여성들, 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여성들 모두 환영이다.

 
 



조시현
소설가, 시인. 2018년 『실천문학』에 소설을, 2019년 『현대시』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다음주에는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이진희 님의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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