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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맺는 관계, 세상으로 들어가는 무대

이진희
2019년 10월 31일
   



 

네번째 여성, 이진희 활동가

몸으로 맺는 관계, 세상으로 들어가는 무대 


 

#몸을 함께 쓴다는 것

나는 내 몸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래서 몸을 최대한 무리해서, 쓸 수 있는 만큼 거칠게 썼다. 여자로서 여자답지 않게 (얼마나 모순적인 말인가) 잘한다는 칭찬을 통해 역량이 커질 거라고 믿었다. 이 모순적인 압박을 이겨내는 것이 역량을 인정받는 몇 안 되는 길이었다. 때로는 사랑받기 위한 몸이 되기 위해 애썼다. 문제제기를 할 때도 공손한 태도를 갖췄다. 일을 하기 위한 몸과 사랑받기 위한 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없었다. 이 간극이 짜증났다. 힘과 체력이 좋은 편이라 믿으며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버텼다. 드디어 남성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생각했지만 ‘너는 조직에서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이라는 이야기가 술자리 농담으로 던져졌을 때, 알아차렸다. 무엇의 팔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내 몸으로 내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내 몸은 얼굴, 팔, 다리, 가슴, 미소, 헌신…… 필요한 순간에만 쓰이고 배치될 뿐, 그 공간에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기 어려웠다. 샌드라 리 바트키는 “어디까지나 여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 여자들은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한 다시 보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설정한 목표가 가부장적 권력의 울타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고, 장애여성 운동의 동료들이 그것 또한 나를 만들어가는 분투의 시간이었음을 의미화해주기 전까지 괴로움은 온전히 나만의 몫이었다. 장애여성 동료의 활동 지원을 할 때였다. “진희, 힘만 쓰려고 하면 다칠 수 있어. 같이 움직이자. 내가 신호를 보내면 오른쪽으로 동시에 움직이는 거야.” 안도했다. 힘 있는 누군가 일방적으로 대신 하지 않고 서로의 몸을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찾아갔다. 활동 지원을 주고받는 둘 사이엔 무수한 갈등이 존재했고, 그래서 더 서로 의존하며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일의 한 팔이 아니라, 내 몸이 다른 몸과 만나서 관계를 맺고 움직이고 있었다. 몸은 유한했지만, 동시에 무한했다. 울타리 밖의 감각은 너무나 드넓어서 몸을 던지고 섞이는 만큼 나와 우리의 것이 되었다. 몸을 쓰는 것이 즐거워졌다.
 

#몸의 말을 알아챌 수 있는 관계

어떤 사람이 존엄할 권리가 있는가, 쓸모와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서 존엄도 증명해야할 것이 돼버렸다. 때론 몸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사람은 몸으로 살아간다. 장애여성을 쓸모와 능력이 없는 몸이라 규정하며 동정하는 것에, 나와 장애여성 동료들은 동의할 수 없다. 증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내 몸의 쓰임을 이야기했다. 미역국을 끓이고, 이불을 개고, 동생의 옷을 정리하고, 싸우고, 화내고, 노래를 하고, 연극도 한다. 기어가고, 글을 쓰고, 뒤뚱거리고, 사랑하고, 상처를 받고, 꿈을 꾸고…… 우리의 몸은 늘 움직이고 매일 다른 하루를 살아가며 나를 지키는 가치를 쌓고 있었다. 아, 이 사회에서 온전히 나를 지키는 것에도 이렇게 많은 노동이 필요하구나! 자긍심이 생겼다. 의존하고 돌봄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고 서로 돌보는 존재임이 명확해졌다. 몸의 쓰임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몸으로 살아온 시간을 충분히 말하고, 듣고, 의미를 한자 한자 글로 적었다. 더이상 말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몸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그 말을 알아챌 수 있는 관계가 생겼다. 이야기할 곳이 없어서, 혹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나의 경험을 일상적으로 나누고 지지하는 동료를 만들고, 내가 어떤 역할을 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몸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삶으로 들어가는 관계, 세상으로 들어가는 무대

몸에서 새어나온 이야기로 세상과 만나기 위해 2003년엔 극단 ‘춤추는허리’를 결성했다. 다른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정상성이 만든 규범적 서사를 강요받는다. 사회가 강요한 ‘장애인’ 이야기를 우리는 무대 위에서 춤추듯 유쾌하게 거부하기로 했다. 관계를 만드는 일은 내가 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공연을 하는 것은 세상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아, 몸만 가지면 되는 줄 알았는데, 몸만으론 안 되잖아’ 공동 작업을 할 때면 예측할 수 없는 몸, 물질적 유한함이 종종 강하게 다가왔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많은 날이 찾아왔다. 그럴 땐 중단을 선택했지만 포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 끝없는 실패가 주는 감각이야 말로 온전히 내 몸이 겪는 주체적인 체험임을 알게 되었다. 수전 웬델은 “몸으로 사는 삶의 온전한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 주요한 걸림돌은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널리 퍼진 환상”이라고 말했다. 의학과 기술로 몸을 치료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는 장애를 병리화한다. 그래서 장애/여성/청소년/성소수자/난민 등 규범을 벗어난 소수자의 몸은 불안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자기 몸을 흐트러지지 않게 건강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사회에서 비틀어지고 다르게 말하는 장애여성의 몸은 긴장을 준다. 이제 우리에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통제되지 않는 몸이란 예술적 미학과 전략이 생겼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할 때면 어떤 사람들은 연기보다 장애에 집중하며 안쓰럽게 움직임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무대란 공간에서 동선과 움직임을 정확히 기억하고 또박 또박 크게 소리내는 배우의 몸을 기대한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장애여성 배우의 몸은 사람들이 기대한 틀을 깼다. 넘어지지는 않을까, 대사를 틀리지는 않을까. 비틀거리는 움직임, 불규칙한 발음 같은 것은 관객을 긴장시켰다. 관객의 긴장과 달리 배우들은 매 순간순간 자신들의 움직임을 계산하며 연기한다. “내가 목을 뒤로 젖힐 때 소리가 커져. 내 성대는 목이 아니라 발뒷꿈치야. 거기에 힘을 줘야 소리가 커지지. 발을 이쪽으로 디뎌야 넘어지지 않아. 기우뚱거림 자체가 내 몸의 구조라는 걸 분명히 알고 움직이고 있으니까” 자기 몸에 대한 이해와 계산이 연기로 이어지게 한다. 이것은 배우로서 계산되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몸으로서 계산되기도 한다. 나는 오랫동안 배우로, 연출로, 기획으로 이 계산법을 배우고 익숙해져갔다. 어느 날 장애여성 동료가 나에게 말했다. “지금쯤 진희가 짜증 낼 때가 됐는데.” “이렇게 연기하면 그렇게 연기할 줄 알았어.” 장애여성 배우들도 내 몸의 계산법에 익숙해져갔다. 무대와 삶이 뒤섞이고 있었다. 
 

#매일 달라지는 몸과 살아가며 연기하기

비장애인처럼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한 대사 연습은 하지 않았다. 뇌병변장애가 있는 장애여성은 호흡과 경련, 몸의 뻗침의 주기와 박자를 파악했다. 나만의 호흡과 박자를 파악했을 때 편안해졌고 여기에 감정이 보태지면 연기가 설득력을 얻었다. 자기 장애를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대사와 몸짓을 싣는 것이 중요해졌다. 점점 몸에 대해서 잘 알아야 했다. 어떻게 움직이지? 어디가 아프지? 어디는 안 움직이지? 움직이기 어려운 곳을 억지로 쓰려 하진 않지만 그대로 두지도 않았다. 아프거나 움직이지 않는 몸의 어떤 부위는 무대에선 배우들에게 특히 긴장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극적 순간,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이 긴장을 관객이 알아채리라는 것을 우리들 스스로도 느낀다. 그러나 불안하진 않았다. 서로의 몸을 아는 배우들은 이 긴장이 낯설지 않다. 수년에 걸친 연습은 내 몸의 긴장에 익숙해지면서 가장 나다운 동작을 발견하게 했다. 연기연습이자 매일 달라지는 내 장애와 살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장애에 어떻게 적응하며 사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몸과 갈등하고 적응하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장애여성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 변하는 내 몸과 매일 새롭게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가! 
 

#내 몸이 움직일 공간, 내 몸으로 움직이는 공간

거부당했던 공간, 허락된 자리에만 머물러야 했던 기억이 자극받을 땐 무대 위 공간은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굽혀지지 않는 근육들이 놀랄 정도로 최대한 구부려 몸을 움츠려도 작아졌던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 충분치 않다. 눈물이 나온다. 이상하게 한 사람이 울면 따라 울게 된다. 그러다 점점 커진다. 두 다리로 펄쩍 뛰어오르지 않지만, 휘어진 팔다리를 허공에 휘젓고 공간을 가르며 나만의 공간을 계속 만들어 낸다. 욕심껏 온전히 충분히 나로서 움직이면서 동료들과 부딪히고 뒤엉킨다. 자유롭다고 느낀다. 무대를 내려올 때면 근육의 긴장이 풀리며 주저앉게 되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최악의 공연조차도 흥분을 준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설 마음이 생긴다. 내일 스러질지 모르는 용기를 오늘도 매일 내본다. 그렇게 몸/들이 나를 또 움직이고 있다. 

 
 



샌드라 리 바트키 「푸코, 여성성, 가부장적 권력의 근대화」,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한울 2001)과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그린비 2013) 그리고 장애여성 배우 A와의 대화가 영감을 주었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장애여성공감에서 펴낸 책으로는 『어쩌면 이상한 몸』(오월의 봄 2018)이 있다.  

 


 

다음주에는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공동 기획한 오마이뉴스 유지영 기자의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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