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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추는 춤

박선우
2020년 01월 11일
 



느리게 추는 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고 싶었다. 그렇게 헤어지고서 부단히는 아니고 이따금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 해야 하는데. 똑 부러지게 마무리를 짓지 못한 느낌이었다. 장황한 서술 끝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기분.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옷깃에 인 보풀을 발견하고는 무심코 잡아당겼는데 그게 쭉 늘어나기만 하고 끊어지진 않아서 아이씨 뭔데, 하는 채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간단히 말해 좆같았는데…… 이 좆같음을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너에게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 떠오른 말은 개새끼,였다.

그것참 간결하고 임팩트 있어 생각만으로 흡족했다. 직접 소리 내어 말하고 듣기에도 흐뭇할 듯싶었다. 음, 그런데 본래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지금 개새끼라고 쏘아붙이려는 까닭은 오롯이 나만 홀가분해지기 위해서인데, 왠지 개새끼라는 말을 들은 너도 아 이것으로 충분하다, 클리어한 것 같아,라고 느끼며 해방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다. 무엇보다 아쉬워. 곱씹을수록 함량미달인 것 같아 나는 개새끼를 단념하기로 했다. 자, 그럼 뭐가 더 있나.

왜 그랬어?

이렇게 질문형으로 가볼까. 그럼 무언가 확장되는 듯 기대해볼 만한 여지가 발생하지. 다소 궁색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조목조목 캐묻고 싶은 것도 사실이잖아. 그런데 네가 응하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발화한 문장이 너에게 가닿자마자 산산이 부서지고, 네가 바닥에 흩뿌려진 언어의 잔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보기만 하다가 다른 할 일이 생각났다는 듯 휙 뒤돌아서 가버리면 어쩌지. 그리고 잊어. 까맣게 잊어버리면 어쩌나. 어쩌긴. 그럼 나는 허공에 대고 야 이 새끼 씹새끼 엉엉엉, 하고 말 텐데 정말이지 그건 상상만으로 좆같다. 끔찍해. 아마도 너는 내 울음소리조차 듣지 못할 것이다.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겪어본 일인 양 두려워 질문형은 피하기로 했다.

그럼 뭐라 할까.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막막했다. 이별하는 순간에도 그랬지. 그래서 얼결에 잘 가,라고 인사했던 걸까. 등신같이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준 것 같기도. 그날 너는 내 배웅을 받으며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순간 연푸른색 셔츠의 검게 젖은 등이 눈에 들어왔어. 유난히 볕이 뜨겁던 여름날이었다. 너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점점 작아지더니 새끼손가락만 해졌다. 어느 순간 상체를 왼쪽으로 틀었고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발돋움질하여 사라졌어. 

나는 거기까지만 보았다. 

너를 태운 진청색 간선버스가 조금 나아가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네가 교통카드 단말기에 지갑을 갖다 댄 다음 버스 안의 빈자리들을 훑어보며 어디에 앉을까, 저녁으로 뭘 먹지, 따위를 골몰했을 동안에도 나는 온 힘을 다해 네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네가 가려고 한다.

간다.

갔다.

나는 버스가 남기고 간 소음이 허공을 선회하며 부드럽게 잦아드는 궤적을 느꼈다. 대기에 인 파문이 살갗을 스치며 무력하게 흐트러지는 과정도 느꼈어. 그때 처음으로 이 세계가 나에게서 한걸음 물러서고 있으며 확고한 거리를 두려 하고 다시는 예전과 같은 몸짓으로 다가와주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돌아섰다.

내가 가야 할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어. 오래지 않아 합정역 4번 출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가파른 계단을 휘청휘청 내려가면서 와 내려간다 내려가 소스라치게 놀라다가 고꾸라질 뻔한 고비를 몇번인가 넘겼다. 실수로 발목을 접질렸을 때에는 시큰한 통증에 울음이 터지려 했으나 참았지. 나는 눈물샘이랄까 설움의 분수가 터져 나오려는 기점을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틀어막았다. 한밤중에 강변을 거닐다가 댐의 누수를 발견하고 그 균열을 엄지손가락으로 틀어막았다는 소년처럼 막을 수 있을 때 막았어. 덕분에 짐짓 태연한 얼굴로 몸을 가누며 다음 층계를 내딛을 수 있었다.

지금도 내려가는 중이다.

내려가.

어디까지 내려가게 될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더는 내려가지 않을 수도 있을 거야. 바닥이 어디쯤이고 얼마나 곤란한 지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쯤에서 멈출 순 있어. 하지만 그것으로 족한가. 나는 단지 그만 내려가기 위해서,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서, 상처 입지 않기 위해서 너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걸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는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하고 싶은 것뿐이다. 제때 뱉어내지 못한 말이 자꾸만 목구멍 안쪽에 차오르니까. 그것이 매일 아침 식탁에 앉아 마른 밥알을 씹어 삼킬 때나 새벽 어스름에 눈꺼풀이 절로 떠질 때마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삶의 질이랄까 행복지수가 몇단계는 낮아진 것 같으니까. 도무지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고 가늠해볼 여지도 없으나 해야만 해서 하고 싶은 것뿐이다.

어쩌면,

그건 네가 한때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다는 것을, 품에 안을 때면 이걸 어쩌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었다는 것을, 내가 화를 내면 움찔했고, 적어도 그런 시늉은 했으며, 내가 웃음을 터뜨리면 웃는구나 너는 웃을 때 참 예뻐,라고 뜨거운 호흡으로 귓가에 속삭여주었다는 것을, 네가 최선을 다해 그리하는 바람에 나도 점차 너에게 그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자 너는 서서히 그리하지 않았고 나는 벌충하듯 조금씩 더하게 됐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네가 화를 내면 말문이 막혔고 애써 태연한 척하느라 하루를 망쳐버렸지만 너는 내가 화를 내면 아 또 시작이다 뭔데, 하며 고개를 숙인 채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방금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거 봤냐 대박, 그런 소리나 하며 낄낄 웃었고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았어, 혼자서 휴대전화 게임에 몰두하더니 프렌즈팝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다, 나는 그런 너조차 견뎌보고 싶었어, 그런 식으로 꾸준히 형편없어지더라도 괜찮았다, 어느 날 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반신불수가 되어 나타난다고 해도 중환자실 침대 머리맡을 지키며 너의 끼니를 챙기거나 기저귀 정도는 갈아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은 생을 보낸다 해도 뭐 별수 없지,라며 어깨를 으쓱하고 마는 내 자신이 좀 기막히고 한심했지만 그것참 이상해, 그런 상상만으로 나는 가슴이 설레곤 했다, 그래,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 너를 위해서, 그런데 나는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의 마지막을 예감했는데, 잊지 않기 위해서 몰래 마음을 다잡곤 했는데, 어쩌다가 그걸 망각해버린 걸까, 왜 염두한 적도 없다는 듯 이별 앞에서 진심으로 당황한 걸까, 맞아, 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모두와 끝장났는데, 홀로 남겨졌는데, 어째서 갑자기 그런 운명이 분하고 서글퍼져……

이렇게 엉망으로 뒤엉킨 속내를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단 한마디로. 

두마디는 구차할 것 같았다. 세마디를 할 바에는 장문의 편지를 쓰고 말지. 그러나 문장이 길어지면 나도 모르게 떳떳하지 못한 뉘앙스를 흘릴 듯했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같은 표현을 반어로든 은유로든 농도만 다르게 써 보낸 뒤 밤마다 이불을 걷어찰 것 같았다. 그런 상상만으로 몸서리가 일었다. 네가 마지막으로 기억할 내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게 될까봐. 내가 기억할 우리의 마지막이 내가 원하는 마지막이 아니게 될까봐. 그래서 한마디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정확한 한마디로 너와 나 사이를 매듭짓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저 헤매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이것도 사는 건가.

나는 매일 아침 6시 50분에 알람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7시 30분까지 세면과 전신 스트레칭을 마쳤고, 간밤에 준비해둔 샐러드로 아침을 해결했다. 가방을 챙겨서는 8시 20분에 현관문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9시까지 합정역 인근의 회사로 출근했다.

이후로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

시간을 잊었다.

그러다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목덜미와 어깻죽지에 뭉근한 피로가 몰려오고, 파티션 너머의 동료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압력으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기 시작하면 아 가나, 가도 되나, 하면서 나도 일일 업무보고서를 작성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공기청정기의 전원을 끈 다음 복도의 블라인드를 모조리 내리고 퇴근했다. 귀가해서는 저녁식사로 콩밥 한공기와 동원양반김, 시금치나물, 멸치볶음 따위를 한움큼씩 덜어 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서는 7시 55분까지 「위대한 조강지처」라는 일일연속극을 시청했다.

드라마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삼십대 후반의 여자가 매일같이 목 놓아 울고 있었다. 그녀는 정육점 아저씨가 대패삼겹살을 18그램 속여 팔았다는 이유로 이단옆차기를 날리고, 옆집 새댁이 분리배출을 엉망으로 했다는 이유로 헤드록을 거는 여자였는데, 밤이 이슥해지면 초조한 얼굴로 거실을 오가다가 괘종시계가 뎅뎅 울리면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여자의 남편은 스포츠댄스 클럽에서 만난 미모의 대학원생과 당당하게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도박 빚에 쫓겨 사위 집에 얹혀 사는 여자의 어머니는 그녀가 울기 시작하면 방에서 나와 대를 잇지도 못하는 게 어디서 감히, 재수 없게,라고 꾸짖었다. 네가 뭘 잘했다고 우냐, 뭔데 우냐. 훗날 의붓딸로 밝혀지는 여자의 등을 찰싹찰싹 소리 나게 후려쳤다.

왜 때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때리고 난리야. 하지만 살과 살이 부딪는 마찰음과 이미지는 브라운관을 넘어 내게 생생한 감각으로 육박했고, 하마터면 나는 드라마 속 여자를 따라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참았지. 가까스로 억누를 만한 정도였기에 나는 누수랄까 범람의 조짐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어금니를 깨물고 발끝을 잔뜩 구부러뜨리는 자세로 버텨냈다. 그러다가 텔레비전 화면이 정지하면서 내일 이 시간에 계속,이라는 문구가 나타났을 때에는 긴장이 풀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와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 나를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지켜보던 엄마가 슬며시 다가앉으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라뇨.

너, 거울 좀 봐라.

나는 탁자에 놓인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보이니? 

네.

미친년 같지?

나는 거울 속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 약간 그런 것 같기도.

약간이 아니야. 엄마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덧붙였다. 넌 미쳤어.

그런 말씀 마세요.

하는 수 없이 나는 지금까지의 정황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낳은 여자에게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해 우는 여자를 보며 웃어댄 이유를 해명했다.

아, 그랬니.

엄마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허벅지를 긁적였다. 너네 그럴 줄 알았다. 벌게진 살갗을 내려다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뭐, 이제 어쩔 생각인데. 

아무 생각 없어요.

생각이 없어?

네.

그래? 엄마는 말끝을 늘어뜨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단 말이지. 내 얼굴을 물끄러미 건너보다가 한참 만에 덧붙였다. 뭐, 엎어진 김에 쉬었다 가랬으니까. 

다음 날 우리는 함께 백화점으로 향했다.

나는 엄마가 옷걸이째 들이미는 원피스들을 군말 없이 갈아입은 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드라마 속 재벌을 흉내 내며 아니야, 그게 아니라니까,라고 품평하다가 내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결제했다. 봐라, 얼마나 예쁘니. 종업원들 앞에서 자기 딸을 위아래로 훑으며 감탄했다. 정말 옷이 날개구나.

뭐 이런 사람한테서 태어났을까 싶었다. 그래서 이 모양인 것 같기도.

우리는 쇼핑을 마친 뒤 인근의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테이블에 여봐란듯이 쇼핑백들을 쌓아두고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로 웃고 떠들었다. 이모의 친구의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와 삼촌의 며느리의 반려동물이 암에 걸린 이야기까지. 커피를 반쯤 남기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는 서로 눈을 흘겨가며 다투었다. 내가 차에 오르자마자 기사 아저씨에게 삼성아파트 16차 단지로 가달라고 말했는데 한참 후에 우리가 도착한 곳이 27차 아파트 단지였기 때문이다. 

아 진짜. 엄마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맥없이 웃었다. 너는 뭐 제대로 하는 게 없냐. 

그건 그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말이었으나, 결코 그 상황만을 평가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격지심인지 뭔지 나는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오랜 시간 품어온 환멸 같은 것을 감지했다. 기분 전환은 핑계였을 뿐이고 엄마가 그 한마디—너는 뭐 제대로 하는 게 없냐—를 뱉기 위해 나를 백화점에 데려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빽 소리를 지르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차 문을 쾅 닫고 나니 쇼핑백을 움켜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엄마는 그런 나를 만류하거나 차창을 내려 윽박지르기는커녕 택시를 탄 채 그대로 27차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나는 깜빡이는 택시의 미등을 한참 노려보다가 그게 모퉁이를 꺾어 사라지기 직전에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대체 왜. 오래지 않아 단지 바깥의 대로변에 닿을 수 있었다. 나한테 왜들 이래.

마침 지나가는 빈 택시가 보여 손을 흔들었다.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았는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도무지 손을 써볼 수가 없을 정도였고 콧물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택시 기사는 룸미러로 나를 흘끗 올려다보더니 말없이 차를 몰았다.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내려갔고 이내 낯익은 번화가로 접어들었다. 

나는 훌쩍거리는 와중에도 16과 27이 얼마나 다른 숫자인지, 그것을 발음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다르게 혀를 구부려야 하고 입술을 오므려야 하는지, 그런데 이걸 어떻게 혼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인지, 택시 기사가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 제대로 발음했고 전달에도 문제가 없었는데 도착지가 엉뚱할 뿐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언어라는 것이 고작 이렇구나. 16이라 말해도 27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16인 줄만 알다가 27에 당도해서는 왜 27이고 난리야…… 하면서 서로를 원망하고 갈라설 수도 있는 것이구나.

그런데 무슨 한마디를 찾냐. 

나는 쇼핑백을 뒤져 사은품으로 받은 갑티슈를 꺼내 들었다. 휴지를 뽑아 눈가를 닦아낸 다음 코를 팽 풀었다. 한마디를 찾아낸들 그걸 소리 내어 말하면, 글로 쓰면, 의미가 곧이곧대로 전해지긴 할까.

차창을 내리자 늦은 오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즈음 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다시 내 안색을 살피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번 뱉더니 손을 뻗어 라디오를 작동시켰다. 다이얼을 돌리자 지직거리는 잡음의 끝에 가늘고 긴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멜로디였고, 그 운율은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열대야가 지속되던 어느 여름밤이었다. 그날 나는 바 테이블 구석 자리에 앉아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먼 중년 남자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탱고를 추는 장면이었다. 나는 열번도 넘게 본 그 장면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지켜보았다. 그때 낯선 기척이 내 오른편으로 다가와 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남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조심스레 한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 하얗고 너른 손바닥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마디의 주름과 깊은 굴곡들을, 마치 낯선 지도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얼마 후 나는 네 손을 맞잡았고, 우리는 영화 속 배우들을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들 제멋에 취해 몸을 흔들어대는 댄스플로어에서 너는 나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나는 네 어깨에 옆머리를 기댄 채 생경한 멜로디에 몸을 맡겼다. 그 밤, 텔레비전 속 배우들은 커플을 연기하고 있었고 우리는 커플을 연기하는 커플이 되어 있었다.

서로 박자를 맞춰가며 느리게 추는 춤. 

나는 발끝으로 조심스레 무대를 내디뎠고, 너를 축으로 삼아 한바퀴를 빙 돌기도 했다. 부딪고 엉키다가 하나둘씩 맞물리던 리듬. 그렇게 내가 나를 잊고, 나의 리듬을 잃어버리고 너로 살다가, 그것이 나인 줄만 알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를 에워싼 선율은 멎어 있었다. 세계는 저만치 물러나 있었고, 너의 체온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아.

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박선우
2018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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