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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소의 이방인과 자아를 찾지 않는 여행

류연미
2020년 01월 12일
 


 

주목: 여행, 다른 가치를 실천하는 이동


 

비장소의 이방인과 자아를 찾지 않는 여행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자아, 
혹은 적어도 의문을 제기받지 않는 자아를 생득권처럼 타고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려고 하고 그래서 멀리 여행한다.”
—리베카 솔닛 

“자아를 찾아야겠지만 여행으로 찾아질 리가 없다. 
분명 집 안에 있을 것이다. 
집 안에서 잃어버렸을 것이다. 머리끈이나 리모컨처럼.”
—익명의 트위터리안



이동: 쉽게 움직이는 사람들

세어보니 작년에는 다섯번 집을 떠났다 돌아왔다. 올해는 지금까지 세번이었으니 대략 두달에 한번인 셈이다. 그중에는 평범하게 다녀온 휴가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했던 파리 한달 살기라거나 좋아하는 아이돌의 해외 팬미팅 일정에 애매하게 끼워넣은 타이베이 2박 3일 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단지 어딘가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동일한 카테고리에 넣어도 될까 싶은 의구심이 들지만, 어쨌든 우리는 보통 이런 것들을 여행이라고 부른다.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시간과 돈이다. 나는 연차를 쓰지 않아도 일과 일 사이에 어느정도의 여백을 만들 수 있는 대학원생-노동자이고, 각종 연구보조와 보고서와 원고와 발표와 번역을 차근차근 모아 그 여백을 최저가 비행기 티켓과 가성비 좋은 숙소로 바꾼다. 프리랜서의 재정 상태란 시간이 많다면 돈이 없고 돈이 많다면 시간이 없는 것이므로 자원의 축적 주기는 들쑥날쑥하지만, 일단 게이지가 차면 나는 다른 고민 없이 여행 준비를 시작한다. 20대에는 딱히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건 내 몫의 자원을 가지게 되고 그 얼마 안 되는 걸 내가 얼마나 기꺼이 여기에 투여하는지에 경악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지금도 내게는 8월 중순에 출발하는 방콕행 티켓이 있고 숙소 예약 앱엔 하루 전까지 무료 취소 가능한 호텔이 예약되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많이, 더 쉽게 이동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과 그 효과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사회과학에서 이동성 패러다임(mobilities paradigm)이나 이동성 전환(mobility turn)이라는 이름하에 한동안 주목받고 있는 참이다. 이는 다양한 형태의 이동 실천을 포괄하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여행은 이동의 특수한 형태로서 오래전부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왔다. 굳이 패러다임이나 전환까지 논하지 않아도 여행에 대한 명제는 경험적으로, 또 통계적으로 간단하게 검증된다. 당장 휴가철을 맞은 요즘 인스타그램 피드의 반은 친구들의 여행사진이 채우고 있다거나, 우리나라의 해외 출국자 수가 2015년의 1931만명에서 작년에는 2869만 6000명으로 급증1)했다거나. 담론적으로도 그렇다. 여행이라는 행위는 이미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주요 소재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지 오래고, 시대적 흐름에 맞춰 배낭여행, 패키지여행, 음식을 먹는 여행, 버스킹하는 여행, 역사를 공부하는 여행, 가성비 좋은 여행 등 끊임없이 분화되며 집합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서점에 쏟아지는 수많은 여행에세이와  SNS상의 콘텐츠까지 생각하면 우리는 일상에서도 여행서사의 범람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청년들은 더 많이 여행한다. ‘청년’이라는 집단에 수반되는 상징들이 얼마나 ‘여행’이라는 행위의 상징들과 겹치는지 생각해보면 그리 놀랍지 않다. 한국관광통계에 따르면 2018년 21~30세 출국자 수는 493만명, 31~ 40세 출국자 수는 542만명이다. 출국자 수 통계는 같은 사람이 여러번 출국한 경우와 여행의 성격이 아닌 출국 사례를 고려하지 못해 직접 비교가 불가능하긴 하지만, 해당 세대의 인구수는 각각 682만명과 727만명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국민여행조사에 따르면 2018년 한해 동안의 해외여행 경험률이 가장 높은 세대는 20대(30.7%)이고 그다음이 30대(28.9%)이다. 그걸 한국사회의 고단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라고 분석하든, 디지털 노마드나 코스모폴리탄 주체의 탄생이라 부르든, 혹은 ‘소확행’을 위한 ‘탕진잼’의 일환이라고 우려하든, 젊은 세대들의 여행이 꾸준히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또 다른 나라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이제 별로 흥미롭지 않다. ‘관광자(tourist)’와 ‘여행자(traveller)’를 구분하고 여행을 단순한 소비 행위 이상의 무언가로 의미화하고자 했던 여행 연구자들이, 그리고 이러한 메타적 실천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부터 그 의미를 직접 체화했던 여행자들이 이미 충분히 답해놓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청년들이 여행에 부여하는 의미에 대한 한 연구는 이들에게 여행이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생활양식의 한 부분이면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성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자기정체성을 재구성하게 하는 기회의 장”2)이라고 해석한다. 한 작가는 여행의 의미를 좀더 아름답게 표현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3) 요컨대 여행은 주체가 새로운 장소를 경험하고 자아를 재구성하여 기존의 삶을 바꾸어내는 것이다. 모든 여행기는 결국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장소: 밀어내는 힘도 당기는 힘도 없는

석사과정 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인도 여행을 연구했다. ‘그걸 왜 연구하지?’라고 생각했지만 항상 똑같은 질문을 받는 청년 활동 연구자로서 입을 다물었고, 그러길 잘했던 것이 그는 이후 인도 여행의 상징과 여행자들의 실천을 둘러싼 아주 재미있는 논문을 썼다. 학위를 따고 이 친구와 기념적으로 네팔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그 장소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여행자 정체성을 열심히 수행해보려다 너무 맞지 않아 중간에 한번 울었다. 한쪽 팔에 헤나를 하고 트래킹을 하거나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있는 내 사진을 보고 오랜 친구들은 합성이냐고 물었다. 네팔은, 특히 포카라는 아직도 나에게 약간은 의미 과잉의 장소로 남아 있다. 

여행이라는 실천에서 장소성은 밀어내는 힘이자 당기는 힘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 거주지에서 밀려나듯 떠난다. 추방이나 이민을 떠올리기 쉽지만, 장기여행자들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인도 여행을 연구한 한 연구자는 인도의 리시케시에 체류하는 한국인 장기여행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여행이 ‘헬조선’ 탈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했다.4) 여기서 “한국 젊은이들의 장기여행은 한국의 사회구조와 문화에 대한 불만을 가진 청년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5)으로 진단된다. 이들은 동시대 한국의 사회구조, 특히 청년의 노동시장 진입이 어려우며 진입 후에도 부조리한 노동문화에 시달려야 하는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명확한 귀환이 전제되지 않은 여행을 떠난다. 이러한 유형의 장기여행자들은 주로 인도, 태국 등의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여행을 하다 돈이 떨어지면 한국이나 호주, 뉴질랜드 등의 서구 선진국에서 노동하여 돈을 버는 패턴을 반복한다. 한국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어느 국가에 머무르는가는 물가와 여행 환경의 문제에 가깝다.6)

한국이 이들을 밀어낸다면, 다른 한쪽에는 당기는 힘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가 아닌 곳에 이끌리듯 떠난다. 인도 여행은 그 타지의 장소성이 극대화된 경우이다. 지금은 어느정도 유행이 지난 듯하지만, 한창 인도에 대한 상상계가 비대했을 때 “여행지 인도는 이국적 자연과 역사적 시간이 정지한 유적, 그리고 생활세계의 활동성이 제거된 사람들의 이미지로 상상”되었으며 ‘인도적인 것’에는 “신비적, 영적, 정신적인 색채”7)가 덧씌워져 있었다.

이러한 고도의 의미화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여행 대상으로서의 장소는 당연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정한 장소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다른 곳이 아니라 그곳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곳의 장소성이 여행자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이다. 특히 관광이 아닌 여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획일화되고 상품화된 ‘관광자 게토(tourist ghetto)’를 벗어나 가장 ‘현지스러운’ 장소를 찾고 ‘현지인 같은’ 체험을 하기를 원한다. 관광상품을 구입하는 대신 자유여행을 계획하는 대부분의 청년들은 암묵적으로 이런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가이드북을 보더라도 가장 유명한 식당은 피하기. 구글맵에 평이 얼마나 있는지 (한국인 평이 너무 많거나 적은지) 보기. 블로그 포스팅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문체인지) 확인하기.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검증 과정을 다년간 반복한 결과 나는 현지인 위주이면서도 관광자가 배척되지는 않는 적당하고 안전한 장소들을 미리 판별하는 능력을 획득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를 끌어당겼던 그 장소성을 우리는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가?

장소는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다. 장소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이를 관찰하는 사람들에게는 명료성의 원리로 작동한다.8) 여행의 장소는 원거리에서 표상으로 소비할 때는 너무나 선명해서 도착하기 전부터 그 장소와 이미 친숙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에 첫발을 딛을 때 우리는 그 장소와 가지고 있는 관계가 사실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곧 시간적인 것의 축적)으로서 규정된다면, 여행자가 방문하는 모든 곳은 그에게 있어 ‘ 비장소(non-place)’다.9) 그렇게 여행자의 공간은 비장소의 원형이 된다.

숙박을 위한 호텔이 아니라 생활이 가능한 에어비앤비를 선호하는 문화와 최근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에 들어 있는 ‘한달 살기’와 같은 새로운 장기여행의 형식은 비장소와 장소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여행자의 소망을 담고 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유명한 슬로건은 지금도 유효하다. 여행사를 통해 코타키나발루 3박 5일 초특가 실속팩을 구입한 관광자에 비해 코타키나발루 한달 살기를 하는 여행자가 그 장소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맺는 데 유리한 건 사실이다. 한 장소에서 한달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침에는 여유롭게 공원이나 해변에서 산책을 하고, 마트나 현지 시장에서 장을 본 후 음식을 해 먹고, 원할 때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그러니까 한국에서 ‘이게 사는 건가’라고 습관적으로 중얼거릴 때 대척점에 있는 상상계의 좋은 삶을 체험해볼 수 있다. 물론 집에서처럼 생활감이 뚝뚝 묻어나는 삶의 요소들은 여기서 제외된다. 내가 만약 파리 한달 살기에 대한 여행기를 쓴다면 숙소 앞 작은 빵집의 바게트를 한달 내내 먹어도 질리지 않았던 것이나 연간권 혜택으로 개장 시간보다 30분 일찍 텅 빈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쓰지, 한국에서 보낸 중요한 택배가 죽어도 배송되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다가 운송업체 물류창고까지 갔던 일이나 설명하기도 복잡한 가족 사정으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식탁에 머리 박고 기절했던 일 같은 건 쓰지 않을 거란 뜻이다. 이미 썼지만.

한편 삶을 정말 여행으로 만들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장기여행을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서 정립하고 이를 반복하는 개인들을 ‘라이프스타일 여행자(lifestyle traveller)’10)라고 부른다. 라이프스타일 여행자에게 이동성이란 하나의 장소에 정박되는 대신 새로운 장소로 떠날 수 있는 자유이며, 라이프스타일 여행은 익숙해진 장소로부터 낯선 미지의 장소로 끊임없이 삶을 이동시키는 일이다.11) 이들에게 장소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기 위한 일종의 퀘스트 지역에 가깝다. 한 장소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게 될 때쯤 이들은 다른 장소로 떠난다. 이들에게는 수많은 유사-집들이 있지만 실제로 귀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장소가 의미화의 후보가 되는 이러한 방식의 여행은 모든 장소를 비장소의 상태로 남겨둔다. 장소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미끄러지는 비장소는 우리를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않는다. “쉽게 떠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쉽게 잊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12)


자아: 나를 찾지 않는 여행

혼자 다녀오는 곳은 주로 도쿄다. 도쿄에서 하는 일은 매번 똑같다. 외곽의 비즈니스 호텔에 묵으며 아무 동네의 조용한 카페를 찾아다니거나 미술관의 새 전시를 본다거나 하는, 전부 서울에서도 할 수 있는 일들. 그런 여행에 바라는 건 내용이 있는 구체적 경험들이 아니라 복잡한 대도시에 숨어들어 유사한 군중 속에 휘말리기, 내 삶과 세계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 철저히 나를 잃어버리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절대 찾지 않기다. 몸과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정체성의 강박을 벗어두고 나 자신에게조차 이방인이 되는 것. 공항에서, 식당에서, 호텔에서, 일시적으로 이곳을 스쳐가는 인간의 기능적인 역할만을 수행하면서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 것. 이럴 때 비장소의 여행자는 “잠시 동안 정체성 탈피라는 수동적인 기쁨과 역할 수행의 더욱 능동적인 즐거움”13)을 경험한다. 여가가 노동자로서의 휴식이라면, 여행은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의 휴식이다. 

때로는 그런 시공간적 단절을 통해서만 조금 더 나은 자신을 실험해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여행은 일종의 결의다. 에고그램 테스트를 하면 “의지나 욕망이 퇴화한 타입: 마치 세상을 저버린 사람과 같은 느낌입니다” 따위의 결과가 나오는 나 같은 인간도 여행이라는 결의를 통해 제한된 시간 동안에는 일찍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의 계획을 짜고 그 일정을 수행할 수 있다는 안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행에서의 나는 결코 일상에서의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에 불만도 없다. 한국에 돌아가면 캐리어는 또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일주일 동안 널브러져 있을 것이고, 그 안에 고이 담아온 한정판 초콜릿은 나중에 유통기한이 지난 채로 냉장고 안쪽에서 발견될 것이다. 열심히 찍은 사진과 영상들은 아무 곳에도 쓰이지 않고 구글포토의 무덤에 묻힐 것이다. 일주일을 머물렀어도, 한달을 머물렀어도 똑같이 흐릿한 여행지의 기억은 이미 학생으로서, 노동자로서, 딸로서의 정체성을 겹겹이 둘러매고 있는 서울에서의 나를 전혀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청년들의 배낭여행, 혼자 하는 여행, 장기여행, 살아보는 여행에 항상 따라붙고는 했던 자아 찾기의 메타포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로 30대가 되었다. 자아를 일관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나’를 둘러싼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기적 서사(biographical narrative)가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제시될 때 그들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사람이 된다.14) 그런데 진정한 자아를 찾거나 확인하거나 재구성한다는 건 애초에 무엇이었을까? 진정한 자아란 어차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진 개념이다.15) 자아는 인도의 갠지스강이나 나의 내면 깊숙한 미지의 공간에 있지 않고, 내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행위의 연속성 속에 있다. 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들이 나다. 매번 집에서 잃어버리고 새로 사고 잃어버리고 새로 사는데 엉뚱한 곳에서 발견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머리끈처럼. 

내가 읽어온 거의 모든 여행담에서 “여행에서 돌아온 자아는 여행 전의 자아와 동일하지 않은, 충족되고 (재)발견된, 변화하고 성장한 자아”였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여행은 삶과 독립된 생활양식이나 경험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고, 삶 안으로 침투하는 계기다.”16) 최소한 많은 여행자들은 그러기를 바라며 떠났고, 설령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할지라도 이를 자신의 삶의 서사 속으로 편입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그러나 내가 했던 여행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타자가 되는 경험뿐이었다. 내가 낯선 타자를 조우하여 경험의 일부로 소화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심미화될 수도, 신비화될 수도 없는 그냥 타자가 되는 체험.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없고 그러므로 의미화될 수도 없는, 1인칭 자기서사가 아닌 그런 여행 역시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탈근대적 여행서사에서 나타나는 여행자가 장소에 대한 시각의 우위나 배타적 소유를 주장하지 않으며, 그렇게 쓰인 이야기들은 타자와의 동등한 공존과 유대 가능성을 다시 사유하게 한다는 통찰이 비단 소설의 영역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17)

나는 여전히 인간이 떠났다가 변화해서 돌아오는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동과 변화의 서사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기는 자기서사의 가장 오래된 형식 중 하나였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리되지 않는 삶을 이야기에 견주어 기대하고 또 실망한다. 그러나 일상으로서의 삶이 아름답지 않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다른 시공간에서의 경험들이 어딘가 실패했다면 그 망한 시간을 똑 떼어서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두면 된다. 그곳이 더할 나위 없이 눈부셨다면, 그 역시 지금의 나와는 무관하다. 비장소의 이방인이 되어 지나치는 시공간은 자아를 채우는 대신 비워버린다. 그 비움은 아무런 성장도 담지하지 않으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게 사실은 어떤 의미였는지 떠올리고 잔잔하게 놀랄 필요도 없다. 떠났다가 돌아온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잘은 모르지만 나빠지지는 않으려고”18)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이렇게 자아를 가뿐히 집에 두고 떠났다 돌아온 여행자는 약간의 기념품과 남은 동전들, 쓰다 만 트위터 타래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오지 않는다. 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행이 가끔 삶을 밀어나가게 한다. 

 


 

남는 질문들

 

3
‘청년’과 ‘여행’의 상징이 어떻게 겹치는지 좀더 설명해줄 수 있을까? 또한 ‘청년들이 더 많이 여행한다’는데, 청년들의 해외여행 경험 비율이 다른 세대보다 높다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지에 대해서도 좀더 의견을 듣고 싶다.
 
류연미 ‘청년’이라는 말은 주로 통계적으로 집계되는 20~30대의 생물학적 연령 코호트(cohort)를 넘어 이 특정한 생애 단계에 대한 한 사회의 신념과 기대, 소망과 우려가 뒤섞인 기표이자 상징이다. 그만큼 발화자의 의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담론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염두에 두었던 ‘청년’과 ‘여행’이 교차하는 상징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는 가변성이다. 역사적으로 청년은 한 사회의 변혁의 주체로서 끊임없이 의미화되어왔고, 그 변혁이 사회-변혁이든 자기-변혁이든 간에 기성세대에 비해 새로운 상태로의 이동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열려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둘째는 일시성이다. 어떠한 연령을, 속성을, 또는 사건을 기준으로 하든 청년이라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다. 경험적으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최대한 빨리 끝나야만 하는 불안정한 시기에 가깝다. ‘마음만은 영원히 청년’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요컨대 끝남이 예정된 변화의 시간으로서의 청년과 여행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것이 청년들이 더 많이 여행하는 이유의 전부는 물론 아니며, 엄밀하게는 ‘어떠한’ 청년과 ‘어떠한’ 여행에 대해 논하고 있는지가 먼저 규정되어야 할 것이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나 청년 당사자들에게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워킹홀리데이나 갭이어(gap year), 퇴사 후 떠나는 세계여행과 같은 구체적 형식들에 내포된, 여행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해서 돌아오는 청년들의 이미지는 아직까지도 생각보다 공고하다.
 
3 장소와 자아, 새로운 시공간성의 경험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거나 자아 확인을 정지시킴으로 얻는 위의에 대체로 공감할 수 있었다. ‘생활감’(일종의 상징계)으로부터 벗어나 ‘상상계’에 머물면서 얻을 수 있는 형식이 우리가 사유하는 ‘여행’일 텐데, 한편 돌아보면 그 생활감은 여행 또는 여행지에서 지우거나 거부하는 형식일 뿐 그것이 정말 새로운 ‘시공간의 경험’이기 때문인지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오히려 그렇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대개의 경우 우리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글로벌 체제가 용인하는 세계로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분쟁이나 기아나 질병 때문에 이 체제가 순간적으로 깨진 세계 또는 글로벌 체제가 제외시킨 곳으로는 우리는 좀체 갈 수 없고 가더라도 ‘봉사’나 ‘지원’의 형식 등을 통해서만 그 ‘외부’에 닿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경험은 사실상 기획이거나 착시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고, 지금 우리가 사유하는 여행은 익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체제를 다만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지속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생각이 어느 순간 일종의 ‘원칙을 말하기 위한 원칙’에 머물 수밖에 없는 감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음을 통해 영위되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우리가 ‘여행’을 조금은 과잉되게 인정하거나 사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류연미 이 글에서 새로운 시공간의 경험이란 일상과 다른 시공간으로서의 여행지 자체가 담보하는 특수한 속성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기존의 시공간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을 끊어내고자 하는 여행자의 의도적인 단절에의 결의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행을 통해 얻는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이 사실상 기획이거나 착시에 가까우며, 그럼에도 그 “익숙하지 않음을 통해 영위되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우리가 여행이라는 행위를 조금은 과잉되게 사유하게 된다는 인식에 완전히 동의한다. 아무리 끊임없이 미지의 장소를 찾아 나선다 해도 여행자에게는 본질적으로 허락된 한계가 있고, 일상의 체계와 여행지의 체계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이국적인 여행지에 대한 환상과 그 파괴를 둘러싼 관광 담론들에서 진정성 개념이 끊임없이 의미화되고 탈의미화되고 재의미화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어떤 여행자들은 ‘진정으로 새로운 곳/것’에 대한 탐색을 포기하지 않고, 나는 “익숙하지 않음을 통해 영위되는 무언가”를 얻어내는 그들의 성공이 설령 기획이거나 착시라고 하더라도 결코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집합적인 착각은 하나의 효과가 되고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쓴 적이 있는데, 새로운 시공간의 경험으로서의 여행에 대한 환상에도 이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꿈과 환상은 그 자체로 사회적 실체를 가지며, 여기에는 당연히 약간의 과잉과 착시와 비합리적인 판단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또는 사회가 더 나은 자신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획들이 필요하다.
 
3 한편 자아를 찾지 않는 여행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자아를 찾는 데 목적을 둔 수많은 여행기들(특히 인도 여행!)에 대한 강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익명 혹은 비장소의 이방인이 되는 것으로서의 여행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자아/의미를 찾아야 하나?라는 태도가 현실도피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한데, 결국은 이러한 비장소성을 경험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사회적으로 재맥락화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류연미 이 글은 “꼭 (여행에서) 자아를 찾아야 하나?”라고 반문하며 그렇지 않은 여행을 방어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상/삶/현실, 무엇이라고 부르든 비-여행 상태에서의 수행성을 통해 이미 구축하고 있는 자아정체성을, 시공간적 단절을 통해 잠깐이나마 정지시키는, 일종의 전도된 형태의 여행들이 지니는 또다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여행의 의미를 둘러싼 스펙트럼을 거칠게 그려볼 수 있다면, 그래서 양쪽 극단에 인도 여행으로 상징되는 의미 과잉의 여행과 아무런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탕진잼’의 소비주의적 여행이 위치한다면, 그 사이의 방대한 회색지대 역시 존재한다. 이곳에 위치하면서 일상에서의 삶-노동을 영위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여행이 단순히 기존의 여가 연구에서 이야기해온 노동력의 재생산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자아의 확장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소망 없이 낯선 곳에 떨어진 여행자는 정체성의 축소와 자아로부터의 거리두기를 통해 타자성의 감각을 얻고, 이는 내가 중심이 아닌 관계도 속에서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것이 일시적인 한, 비장소에서 이방인이 되는 경험은 나와 타자와 세계 사이의 연결고리를 흐릿하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결합의 가능성을 희미하게 드러내준다. 물론 이것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며 몇번의 여행이 한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바꾸는 일은 아주 희소하게 일어난다. 이러한 목적은 미리 의도한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역할을 사전에 의미화할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떠남’ 자체에 목적을 두고 떠난다. 내일 출근 안 하고 전화 안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비행기에 일단 올랐다가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와 다시 욕하면서 출근하는 것이다. 실패가 예정된 이러한 단절의 시도를 현실도피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도피는 죽음뿐이고, 그 외의 많은 움직임들은 어떻게든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조금 더 잘 살아보기 위한 분투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류연미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청년, 문화, 도시, 시민성, 주거의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다.
 

 

 
1) 「여행도 휴식도 공부도 ‘脫한국’...1월 출국자 291만명 ‘사상 최대’」(『한국경제』 2019.3.8.)

2)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51면.

3) 이수현 「한국 청년들의 여행 경험에 관한 연구」, 『여가학연구』 17(1), 한국여가문화학회 2019, 68면.

4) 다만 ‘헬조선’ 담론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청년세대로만 상정하고 ‘헬조선 탈출’ 내지 ‘탈조선’이 라는 (가상의) 움직임의 무책임성을 논하는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김선기 『청년팔이 사회』, 오 월의봄 2019, 32~35면 참조.

5) 이민영 「헬(hell)조선 탈출로서의 장기여행: 인도의 한국인 장기여행자들을 중심으로」, 『비교문화 연구』 22(2),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2016, 321면.

6) 기온, 공기 질, 물가, 인구밀도, 교통, 치안, 인터넷 속도, 여성 친화성, LGBT 친화성 등 다양한 요소 들을 객관화・수치화하여 노마드들이 머물기 좋은 도시들의 순
위를 매기는 웹사이트인 노마드리 스트(http://nomadlist.com)를 참고할 수 있다. 2019년 8월 1일 기준으로 서울은 8위에 올라 있다.

7) 김유하 「진정성 기획으로서의 인도여행」, 『문화와사회』 22, 한국문화사회학회 2016, 109~11면.

8) 마르크 오제 『비장소』, 이상길・이윤영 옮김, 아카넷 2017, 69면.

9) 비장소는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가 인류학적 장소의 반대 개념으로 제안한 것으로,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앞의 책 97면) 이다.

10) Cohen S. A., “Personal identity (de)formation among lifestyle travellers: a double-edged sword,” Leisure Studies 29 (3), 2010, 289면.

11) Erskine, K. & Anderson, J., “Traveller trails: locating the lifestyle traveller,” Lifestyle mobilities: intersections of travel, leisure and migration, 2014, 136면.

12)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86면.

13) 마르크 오제 『비장소』, 124면.

14) 류연미 「표백된 천국에서 살아남는 법: 2010년대 청년소설과 몰락의 세계감」, 『실천문학』 116, 실천문학사 2014, 303면.

15) Cohen, S. A., “Chasing a myth? Searching for ‘self’ through lifestyle travel,” Tourist studies 10 (2), 2010, 129면.

16) 김유하 「진정성 기획으로서의 인도여행」,133면.

17) 임정연 「지도 바깥의 여행, 유동하는 장소성: 2000년대 여행서사의 장소전유방식」, 『국어국문학』 184, 국어국문학회 2018, 234면.

18) 김금희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2018, 1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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