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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

한여진
2020년 02월 05일



 
백지 앞에서


 
고양이 한마리를 구했다 
그건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잘한 일 
고명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
 
어린 나는 자주 반성문을 썼다 
잘못한 게 없다고 울면서도 억지로 
백지를 채워나가던 기억
 
고명씨,
집 나간 당신을 찾으러 골목길을 헤매며
우리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린다
 
작은 몸 위에 엎드려 속삭였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제 어리지 않은 나는 
반성문은 쓰지 않고 
 
죽어가던 당신이 
살아 있는 것들 가득한 거리에서
눈을 떴다
 
길고양이의 비밀이란 본디 그런 것처럼
여러번 죽고 여러번 살고 그러다 물렁한 인간을 
만나면 한번 따라가보기도 하는 것
 
밝고 따듯한 거리로
우아하게 한걸음
발자국을 지우며 두걸음
 
내일도 여전하겠지만
 
고명씨는 퇴근하는 인간들을 위해 
버스를 몰기로 한다 
 
오늘 밤도 베개에 얼굴을 묻고 
몽땅 잊어버리게 될 인간들을 
집에 데려다주며 통통한 앞발을 핥았다
 
아주 오랫동안 
 
내일도 여전히 
꿈이야? 현실이야?
 
모두 다 잊고 잠들어갈 때
밤을 드나들며 가지고 놀아보는 고명씨
 
거기는 괜찮아?
거기 골목? 거기 옥상?
 
고명씨와 닮은 형상을 가진
까만 비닐봉투와 한참을 놀아본다
 
고명씨와 닮은 목소리를 찾아
오랫동안 우물을 들여다볼 때
인간인 나는 허리가 아프고
 
혼자 살아 있는 나의 몸
매일 나의 백지를 마주하는
 
아무런 잘못을 모르는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당신을
 
고명씨, 
하고 부르면 당신 
돌아올 것만 같은데 

 


한여진
2019년 문학동네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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