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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나무, 동물 그리고 인간의 연결이 지구를 구한다

이라영
2020년 02월 06일
 



흙, 나무, 동물 그리고 인간의 연결이 지구를 구한다

 


우물쭈물하다가 세상을 망치겠지
 

강연장에 가면 때로 준비된 다과를 통해 강연 기획자들의 정치적 입장을 발견할 때가 있다. 한번은 큰 물통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종이컵이 안 보였다. 어떻게 물을 마셔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내게 “선생님에게는 특별히 머그컵을 준비했어요”라며 관계자가 컵을 들고 왔다. 강연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제 컵을 가져오라고 미리 공지가 나갔다는 사실도 그제야 들었다. 그렇게 나홀로 컵을 가져오지 않은 민망한 ‘특권’을 누렸다. 사용한 컵을 돌려줄 때 컵을 쥔 내 손가락이 어쩔 줄 몰라했던 기억이 난다. 준비된 다과도 오직 과일뿐이었다. 비건을 하는 사람이 참석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이때 음식은 언어로 작용한다.
 

반면 인권을 주제로 강연을 하러 간 자리에서 놀랍게도 양념치킨을 만난 적이 있다. 강연이 무려 5시간 되었기 때문에 간식이 있는 건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동물권’이 아닌 ‘인권’이 주제였으니 닭을 먹는 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고기의 등장은 약간 당혹스러웠다. 아예 닭이 주인공인 양념치킨!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고기를 먹는 편도 아니라 또 어쩔 줄을 몰랐다. 게다가 “여기 다리, 다리 드세요”라며 내게 특별히 닭다리를 권하였기에 어정쩡하게 받아 닭다리를 뜯는 ‘특권’을 누렸다. 아무리 휴지로 닦아도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서 양념치킨의 냄새가 강연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만약 맛있게 닭을 먹으며 즐겁게, “이런 자리에서 육식은 좀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동물권’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명색이 ‘인권’을 고민하는 자리에 양념치킨은 너무 하지 않나요? 동물권과 인권이 결국은 다 연결되어 있는데요, 육식과 환경이 연결되어 있고, 환경이 곧 인권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분위기를 망쳤을까. 그래도 더 적극적으로 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저 웃으면서 “닭이라니, 닭이라니요, 정말 놀라워요 하하하!!!”라고 말하며 웃음으로 내 생각을 희석시켰을 뿐이었다. 나의 어정쩡한 대응은 찜찜함으로 남았다.
 

한 대학에서 특강을 한 후 한 학생이 따로 찾아왔다. “아까 말씀 중에 동의하지 않는 게 하나 있어요. 환경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단계적으로 바꿔나가자고 하셨는데, 지금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어요. 이미 전 세계 과학자들 1만명 이상이 기후위기에 즉시 대응해야 한다고 성명을 냈습니다. 지구는 빠르게 망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단계적으로 대응해야 합니까.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그는 정중하게 내게 말했다. 강의가 끝난 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빠른 속도로 정확하게 수치까지 언급하면서 지금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전달하려 애썼다. 마지막에는 이 말까지 덧붙였다. “예전에 여성들이 참정권 운동을 할 때도 다소 과격해 보이는 행동을 했잖아요. 그때도 단계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바뀌지 않으니 더 급진적 행동을 해야 한다고 나섰던 여성들이 있잖아요. 그런 급진적인 행동들이 있어서 이만큼이라도 바뀐 거라고 생각해요.”
 

맞는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반박할 내용도 없거니와 반박할 생각도 없다.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표했을 뿐이다. ‘기후변화’는 ‘기후위기’로 바꿔 불리게 되었고, 이제는 ‘기후재앙’으로 불린다. 재앙 수준으로 인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다급한 문제이다. 다만 내게도 완벽하지 못한 점이 있어 감히 타인에게 ‘지금 당장’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못할 뿐이다.
 

환경과 생태에 대한 주제는 다른 화두보다 나의 양심을 괴롭히고 위축되게 만든다. 내가 무엇을 먹는지는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유제품과 계란, 해산물을 좋아한다. 맛있는 버터와 치즈를 고르기 위해 마트의 유제품 코너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나마 동물복지 계란을 구입한다고 항변할 수는 있겠다. 그조차 변명인 건 식당에서 먹는 계란은 동물복지 계란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어도 먹기 때문이다. 실천윤리학의 기준으로 보자면 나는 형편없는 ‘사이비’가 맞는다.
 

늘 일상의 변화를 말하고 글로 쓰면서 정작 내 밥상은 서서히 바꾸는 게 옳을까. ‘혁명은 밥상에서부터’라고 외치면서 내 밥상에는 여전히 혁명의 기운이 부족하다. 취향이 아닌 철학적, 정치적 신념의 개입이 가장 느리게 개입하는 장이 어쩌면 밥상이다. 내 밥상의 느린 변화는 결국 내 몸도 느리게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나의 실천이 느리다는 이유로 계속 적극적으로 말하기를 주저하며 우물쭈물할 것이다. 나의 밥, 살, 말이 그렇게 돌고 돈다. 내가 밥을 바꿔야 몸이 바뀌고 더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이라고 덧붙이며 소극적으로 채식 지향을 해온 나의 태도에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 덧붙이며 소심하게 의견을 말하던 20년 전의 내가 겹쳐 보였다. 나는 정치적 실천과 평온한 사교 사이에서 갈등한다. 여전히 나의 말이, 나의 몸이 침묵에 길들여져 있다는 방증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느리게 변화했고, 자주 갈팡질팡했다. 예를 들어 주방세제를 안 쓴 지 십수년이 지났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말한다. “가정에서 세제 줄이고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공장폐수와 축산폐수가 해결이 안 되는데 고작 주방 세제 안 쓴다고 뭐가 달라져요. 구조를 바꿔야죠. 자본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나는 움찔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진정한’ 싸움에 몰입해야지 ‘겨우’ 집에서 개개인이 세제 줄이고 샴푸 줄여봐야 괜히 윤리적 우월감만 가질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어 갈팡질팡했으나 요즘 나는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한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의 변화를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을 존경하면서, 작은 실천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겨우 그 정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비난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단, 축산폐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며, 가부장제와 결합한 자본주의와의 ‘진정한’ 싸움을 말하며, 미디엄으로 구운 뉴욕스트립 스테이크의 분홍색 살을 집어 먹는 모순이 적어도 내 자신에게는 없어야 한다.



폭력적인 주체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스스로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식물들은 사물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올가 토카르추크 『태고의 시간들』1)

 

해마다 2월 첫번째 일요일이면 미국에서 미식축구 대회인 슈퍼볼 행사가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광란의 밤을 보내는 이날, 미국 전역에서 닭이 6억마리나 팔린다. 미국 인구가 3억 3천명 정도이니 그날 하루에만 1인당 닭 두마리를 먹어치우는 셈이다. ‘치맥’은 흥분하기 좋은 날 어디에서나 각광받는다. ‘술과 고기’는 푸짐한 만찬을 위해서도, 편하고 격식 없는 자리를 위해서도 인기 있는 메뉴다.
 

미국에 거주할 때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온 집에 그가 잡은 동물들의 몸뚱이 일부 혹은 전체가 진열되어 있었다. 물고기부터 곰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긴 식탁 주변에는 멋진 뿔이 자라난 엘크가 머리만 잘린 채 벽에 붙어 있고, 잘린 동물의 머리통 아래에서 식사를 하는 우리의 접시 위에는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식탁 아래에는 어여쁜 흰색 푸들이 꼬리를 흔들며 분주히 오갔다. 그 개는 수많은 동물의 잘려나간 몸뚱이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했다. 개의 눈을 가려주고 싶었다. 지독한 낯섦 때문인지 희한하게 나는 거북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집 안에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후로 몇차례의 초대를 계속 사양했다. 그날 나의 몸은 반려동물인 개와 식탁 위의 고기와 진열된 동물 사체 사이에 있었다. 인간이 먹는 것과 보는 것에는 세상의 질서와 권력이 담겨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도 내가 먹고 ‘사용하는’ 동물을 적절히 나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같은 모순을 안고 있다. 한때 좋아하던 마스카라를 십여년부터 하지 않게 된 건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화두인 ‘탈코르셋’ 때문이 아니었다. 동물실험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물성 식품 섭취는 즉시 멈추지 못했다. 굳이 이름을 붙여 말하자면, 나는 폴로 베지테리언(pollo-vegetarian, 닭・계란・유제품・해산물은 먹는 사람)과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대체로 채식이지만 가끔 고기를 먹는 사람) 사이를 오갔다. 요즘은 서서히 페스코 베지테리언(pesco-vegetarian, 유제품・계란・해산물은 먹는 사람)으로 이동 중이다. 이렇게 화려한 명명들로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나는 종 차별주의(speciesism)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내가 무엇을 먹느냐만큼 어떤 경로로 먹거리를 구입하는가도 중요하다. 내게로 오는 과정까지 신경 쓰려면 걸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나는 가급적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장을 본다. 한꺼번에 대량 구입하지 않고 냉장고에 먹거리를 쟁여두지 않는 편이다. 냉장고가 실제로 작다. 처음에 마트에서 과일을 사지 않게 된 건 과포장 때문이었다. 복숭아 네개를 사고 나니 플라스틱 박스 1개와 스티로폼 4개가 남는다. 유기농 과일이라지만 포장은 플라스틱이다. 일주일 동안 두 사람이 과일을 먹고 나면 비닐과 플라스틱 상자가 여러개 쌓인다. 과포장된 유기농 제품은 모순 그 자체다. “무농약 재배 농장에서 정성껏 키웠습니다”라고 쓰인 쌈채소 한꾸러미도 역시 단단한 플라스틱 상자에 들어 있다. 이러한 포장을 피하면서 다양하고 싱싱한 식재료를 2인 가구에서 필요한 소량으로 구입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또한 유기농 채소나 동물복지 계란 등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돈이 더 든다. 다시 말해 오늘날 환경에 더 신경 쓰려면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게 복잡한 문제다. 특히 1인 가구인 경우 때로 신선한 채소나 과일보다는 인스턴트가 더 적은 비용이 든다. 장바구니에 담긴 정크푸드와 유기농 식재료는 계층을 보여준다. 텃밭을 통해 어지간한 먹거리를 자급자족하는 게 답이라 생각하지만 아파트에서 텃밭은 언감생심이다. 나의 경우 그나마 지방의 주택에 사는 부모님과 친척의 텃밭에 약간 기생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처럼 환경문제는 곧 계층문제이며, 인종・지역・젠더 문제를 모두 포괄한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독극물 폐기장을 만들었기에 80년대에는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가 곧 민권운동의 의제였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환경정의는 때로 지역과 중앙의 위계를 드러내는 문제다. 경북 의성에 ‘쓰레기산’이 무려 23미터 높이로 쌓였다.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집단과 쓰레기가 쌓이는 장소는 권력에 따라 분리된다. 의성만이 아니다. 전국 여러 지역에 ‘쓰레기산’이 있다. 나아가 지구 안에서도 중앙과 주변의 권력 구도에 따라 쓰레기가 쌓인다. 한국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쓰레기를 필리핀을 비롯해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동남아에 보낸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쓰레기를 받는다. 필리핀에서도 극빈층이 이 ‘쓰레기산’의 악취와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건강에 위협을 받으며 산다.


먹고 입는 것만 생각하다가 학용품, 주방재료, 가구 등으로 범위를 넓혀 보면 끝도 없다. 화가 다나 일라인(Dana Ellyn)의 작품을 만나면서 비건 미술 재료를 알게 된 건 행운이었다. 모피에 반대하면서 나는 붓의 털에는 무관심했다. 내가 사용하던 수채화 붓이나 유화 붓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20세기 중반에 인조모가 나왔지만 그래도 ‘좋은’ 붓은 여전히 다람쥐나 족제비 털로 만든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어쩌면 나도 그동안 붓으로 많은 다람쥐와 족제비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비건 미술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품을 대하는 나의 눈에는 또다른 관점이 열렸다. 동물의 잘려진 몸통을 전시하는 태도를 경멸하면서도 동물의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때는 ‘좋은 재료’로 대했던 스스로의 모순을 마주한다.


맛과 멋에는 이와 같이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착취가 숨어 있다. 알면 알수록 불편해서 차라리 모르고 싶을 지경이다. 동물은 ‘고기로 태어나지’ 않지만 인간에 의해 고기가 된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던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말을 동물에 빗대어보자. 고기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닭은 십수년을 살 수 있고 길게는 30년도 살지만 한달 정도 ‘살고 나면’ ‘치킨’이 된다. 소는 30개월 정도 살면 ‘고기’가 된다. 10년도 전 영화 「워낭소리」(이충렬 연출, 2008)에서 본, 무려 40년이 된 소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고기가 되어버린 동물들의 수명을 우리는 모른다. 먹기에 좋은 때만 안다. 전통 공예인 화각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세살 된 수소의 뿔이 필요하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또 그래서 화각함의 아름다움을 전처럼 편히 감상할 수 없게 되었으면서, 정작 소가 자연상태에서 몇년을 살 수 있는지까지는 몰랐다. 동물이 철저하게 인간 중심으로 대상화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살아 있는 생명은 ‘폭력적인 주체’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인간은 반려동물이라 불리는 개나 고양이 외에 일상에서 동물을 ‘만나지’ 못한다. 내가 동물을 ‘만나는’ 경우는 시골에 있는 부모님 집 근처에서 한밤중에 간혹 마주치는 고라니뿐이다. 이때 고라니는 차에 치일지도 모르는 방해물, 운전자에게 로드킬의 경험을 안겨줄 위험물이다. 동물을 만나지 못하는 우리는 동물의 수명도 심지어는 그들의 모습도 잘 모른다. 낱낱이 부위별로 해체된 고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때로 이 날것의 시체를 식재료라는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전시한다. 


SNS에 음식 사진이 많이 올라온다.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 음식으로 변하지 않은, 익지 않은 붉은 고기를 SNS에 전시한다. 날고기는 조리된 음식과는 또 다른 위치에 있다. 시체와 음식 사이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 앞에 전시되는 날고기는 시체가 아니라 식재료일 뿐이다. SNS에 올라오는 익지 않은 붉은 고기의 사진에서 동물의 원래 모습을 떠올리긴 어렵다. 그렇게 동물은 사물화된다. (적어도 인간이 알아듣는) 언어가 없는 동물은 인간에게 의식도 영혼도 없이 타자화된 생명이다. 인간은 그들을 먹고, 그들을 사용하지만 그들의 고통과 죽음은 의도적 무관심 아래 방치되어 있다.



생태에 대한 죄
 

프란치스코 교황도 가톨릭 교리에 ‘생태에 대한 죄’를 신설할 방침이라 했다. 생태를 망치는 것이 바로 반평화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에 대한 처벌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이에 따른 법 제정도 촉구했다. 윤리적 차원을 넘어 사법적 변화까지 강조할 정도로 오늘날 생태와 환경에 대한 인식은 성장했다.
 

이미 19세기 후반 영국 여성들이 동물 생체실험 반대에 참여했다. 하나의 ‘발전’ 뒤에는 또다른 세계의 ‘착취’가 있듯 당시 생리학이 발전하면서 동물 생체실험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동물 생체실험 반대에 참정권 투쟁보다 더 광범위하게 여성들이 참여했으며 노동계층 남성도 참여했다는 점이다. 동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여성과 노동계층 남성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근대 이후 실제로 자본주의와 산업화에 대한 성찰에서 생태주의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 환경이 개척하고 개발하는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모두 연결된 세계이며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것이 생태주의의 기본이다. 생태주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지배 구도에서 착취당하고 배제되는 소수자들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이끈다. 그렇기에 환경운동은 역사적으로 민권운동, 여성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명과의 접촉이 적은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숲에서 동물을 잡아 식량을 해결한다. 열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 중 약 6천만명이 야생동물을 통해 단백질을 공급받는다. 특히 도시가 아닌 열대지방에 사는 빈곤층일 경우 숲에 사는 동물을 사냥해서 먹는 것은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육식에 저항하라고 말하자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사냥을 금지하는 시간을 가질 정도로 자연의 흐름을 존중한다. 문제는 숲에 사는 현지인이 식량 공급을 위해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상품가치가 높은 ‘고기’ 혹은 희귀한 야생동물 거래를 위해 숲을 뒤지는 ‘글로벌 사냥꾼’의 증가다. ‘텅 빈 숲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숲에 동물이 사라지고 있다. 숲에서 동물이 줄어들면 식물 구성에도 영향을 미치며 그렇게 생태계를 교란시킨다.2)


육식 식단이 어떻게 환경과 연결되는지 인식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의 식단을 바꿔야 한다는 호소는 경제 논리 앞에서 휘청거린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돼지 소비가 줄자 돼지 농가를 살리자며 정치인들이 돼지 인형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한돈 홍보대사’를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돼지 인형을 쓰고 “사랑해요 삼겹살”을 들고 있다. 돼지를 더 많이 먹어달라고 호소하는 목소리에는 좌우가 없었다. 농가를 살린다는 취지로 육식 권하는 정치는 바로 코앞의 문제만 보는 안일한 태도다. 공기청정기로 내 집의 공기는 청정해질지 모르겠지만 지구 차원에서는 에너지 낭비이듯이.



말이 살이 되고 살이 말이 될 때까지

 

좀비는 ‘죽지 않는’ 존재이며 이 좀비에게 물리면 물린 사람도 좀비가 된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좀비 서사에서 기본적으로 이 공식은 공유된다. 하지만 영화 「기묘한 가족」(이민재 연출, 2018)에는 조금 다른 좀비가 등장한다. 이 좀비는 채식을 한다. 양배추에 케찹 뿌린 것을 좋아한다. 또한 좀비에게 물린 사람들은 회춘한다. 이 회춘은 남성에게 남성성, 곧 정력의 획득을 의미한다. 이 사실을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아랫도리의 힘을 위해 자발적으로 좀비에게 물린다. 정작 주인공 좀비는 적극적으로 사람을 물지 않는다. 그는 폭력적이지 않지만 이 좀비에게 물려 정력을 회복하려는 이들은 폭력적 존재로 변한다.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는 그 폭력적 욕망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채식하는 좀비라는 발상이 신선해 보이지만 실은 이 주제도 나름의 계보가 있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그렸다. 뱀파이어는 동물의 피를 빨아먹어야 하는데 바로의 뱀파이어는 과일에 빨대를 꽂고 과즙을 먹는다. 또한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처럼 이미 19세기에도 채식주의 ‘괴물’이 있었다. 메리 셸리의 남편인 퍼시 셸리(Percy B. Shelley)도 『자연식의 옹호』라는 채식주의 관련 책을 썼다. 바로 메리 셸리의 어머니 매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여권의 옹호』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3 지배체제에 저항한 울스턴크래프트의 언어에 영향을 받은 셈이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퍼시 셸리의 글을 읽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와 글이 다른 이의 몸을 바꾼다. 말이 살이 되는 사례다.


‘말이 살이 된다’는 개념에 대해서는 『육식의 성정치』에서 캐럴 애덤스가 자세히 언급했다. 첫째는 채식주의에 귀 기울이거나 책을 읽고 채식주의자로 바뀌는 과정이다. 둘째는 식사 시간에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말하기이다. 식탁의 변화가 곧 관계의 변화를 만든다. 채식을 하는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문제는 ‘내가 소수자’라는 감정을 느끼는 점이었다.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는 음식이 따라오고, 그 자리에서 채식주의자의 식단은 항상 ‘말거리’가 된다. 조금만 아파도 “고기를 안 먹어서 그래”라는 말을 듣는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 앞에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제 불편함을 상대에 대한 공격으로 해소한다. 유난스럽기는! 바로 그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어떤 면에서 식탁은 일상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3)


캐럴 애덤스는 채식으로 가부장제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이 반란은 지구도 바꾼다. 식사를 바꾸는 공부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공부이다. 은유가 아니다. 내 몸 자체가 돌아다니는 메시지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실제로 우물쭈물하지 않고 말을 뱉음으로써 식사 메뉴를 바꾼 적이 있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음식을 주문한 초대 자리에서 나는 ‘말을 함으로써’ 돼지고기 메뉴를 뇨끼(감자로 만든 작고 동그란 반죽의 파스타)로 바꿀 수 있었다. 이 사소한 행동은 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었으며 내 몸이 일상의 메시지가 되는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그렇게 말이 살이 되고 살이 말이 되어갈 것이다.


스테이시 앨러이모의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그린비 2018)의 원어 제목은 ‘Bodily Natures’, 곧 ‘몸 된 자연들’이다. 그는 이 책에서 ‘살 된 존재’(fleshy being)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 몸을 관통하여 사유하다보면 자연이 “살 된 존재의 세계임을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이 책은 여러차례에 걸쳐 세계와 인간의 몸이 맺는 물질적 연결성을 강조한다. 실제로 미세 플라스틱의 문제는 우리 몸과 분리되지 않는다. 자연의 변화는 내 몸을 변화시킨다. 레이첼 카슨이 일찍이 『침묵의 봄』(에코리브르 2011)을 통해 알린 ‘생명의 복잡한 그물’이라는 개념처럼, 우리는 모두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흙이 곧 내 피부다.


 


 

남는 질문들

 

3 본문에도 잠시 언급되었듯이 먹거리 운동이 만만찮은 비용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계급적 상황을 환기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동시에 착취당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가 불거졌을 때 미국산 쇠고기를 구매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보도도 기억난다) 여기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덧붙여줄 수 있을까? 
 
이라영 환경과 생태 문제는 계층에 대한 인식이 동반되지 않으면 ‘가진 자들의 라이프 스타일’로 왜곡될 수 있다.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윤리적 잣대로 환경문제에 접근하는 걸 경계한다. 요즘은 일부 기업들이 ‘비건’을 마케팅으로 내세우면서 가치를 소비하려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도 한다. 의미 있는 변화이면서 한편 주의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자본은 소비를 통해 개인이 신념을 지킨다는 착각을 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무엇을 소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3 예술사회학자이기도 하니, 이번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오늘날 예술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많을 것 같다. 지금 이 글의 고민─페미니즘에서 파생된 문제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을 통과한 이후 생각하는 예술의 조건, 지향, 변화 등에 대해 문학 독자들과 함께 나눠주실 고민이 있다면 들려달라.
 
이라영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가 즐겨 읽는 문학 중에 여성 작가의 작품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품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내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도 좋다. 불쌍하거나 지독히 수동적으로 착취당하며 사물화되는 존재로 여성이 등장하는 문학과 영화는 지겹다. ‘나’를 연민하는 서사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나’를 찾아가는 작품이 좋다.
 
3 ‘○○문제는 △△문제 다음에’라는 식으로, 세계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중요도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모두 동시에 연결된 구조 속에서 동등하게 중요하고 추구되어야 할 것들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종에 대한 불가피한 착취 없이 인간이 어떻게 생존 가능하냐’는 방식으로 되묻는 이들에게 응답하고 설득해야 하는 고충도 있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있을까?
 
이라영 채식이나 환경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 밥을 먹는 식탁에서 “나는 더이상 고기를 먹지 않아”라는 말 한마디를 던졌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 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거나, 이상한 사상에 물들었다고 한다. 그나마 얌전한 반응은 “고기 안 먹으면 기운이 없어” 정도다. 인간이 동물을 먹는 행위는 자연일 수 있으나 지금과 같은 대규모 축산이 자연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먹이로 만들기 위해 동물을 반자연적 상태로 만든다. 또한 이들을 먹이기 위해 자연을 훼손하여 경작지로 만든다. 수평아리를 갈아서 죽이는 게 어떻게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있나. 자연이라는 주장은 늘 착취를 속이는 가장 편안한 진단이다.

평화로운 설득이 쉽지 않지만 지속적인 분란을 만들면 사회적으로 조금이라도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내게 아무도 채식을 권하거나 설득하진 않았다. 내가 조금씩 채식으로 움직여올 수 있었던 건 ‘채식을 한다’는 말을 식사 자리에서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의 ‘생존’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중요하다.
 
3 캐럴 애덤스의 말, ‘채식으로 가부장제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다. 생태주의가 착취당하고 배제되는 소수자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이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본문에 설명해주었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지, 관련해서 더 살펴볼 만한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어도 좋겠다.
 
이라영 동물을 소비하는 방식은 여성을 착취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남성이 돈을 벌고 여성이 그 남성의 ‘수발을 드는’ 상태도 자연이라 여긴다. 여성이 고기를 먹지 않을 때 가부장제가 드러내는 불편함은 ‘가족들에게도 고기를 안 먹이면 어떡하지’이다. 밥을 짓는 역할을 하는 여성이 ‘풀떼기 밥상’을 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북함을 드러낸다. 채식을 하는 여성들 중에 아이가 있는 경우 아이의 밥상을 어떻게 차릴 지를 두고 고민한다. 주로 밥을 하는 입장에 있는 여성들에게는 단지 자신의 먹거리뿐 아니라 가족들의 식단을 어떻게 구성할지도 고민인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오히려 여성들로 하여금 식단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육식의 성정치』에서 애덤스는 “채식주의 행위는 가부장제의 소비를 거부하고 죽음의 소비에 저항한다”(347면)고 주장한다. 죽은 동물을 ‘고기’가 아닌 ‘사체’로 보기 시작할 때 생명을 대하는 자세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최훈 『동물 윤리 대논쟁』(사월의책 2019),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창 2018), 하재영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창비 2018), 황윤

『사랑할까, 먹을까』(휴 2018) 등 최근 몇년 사이 국내에서 동물권 관련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자연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창비 2000)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마거릿 애트우드와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들은 착취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을 도와줄 것이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사람』(롤링다이스 2013)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동녘 2016)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동녘 2018) 『타락한 저항』(교유서가 2019) 『정치적인 식탁』(동녘 2019) 등이 있다. 
 

 


1) 은행나무 2019, 52면.

2) 자부리 가줄 『숲』, 김명주 옮김, 교유서가 2019, 164면.

3) 캐럴 제이 애덤스 『육식의 성정치』, 류현 옮김, 이매진 2018, 17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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