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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2회)

곽재식
2020년 02월 11일



그해 따라 가을 날씨가 좋지 않아 농사는 흉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을 별로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거둘 수 있는 곡식이 조금은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추수해보니 단지 며칠 밥 먹을 것 밖에 없었다.
 
오직 한명, 내내 힘을 다하며 일한 한수생만이 그래도 나쁘지 않은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저 서라벌을 드나드는 데에 재물을 다 썼으므로 그전에 모아놓은 곡식이나 재물마저 다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한수생만이 겨울이 지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굶어 죽을 형편이었다.
 
한수생을 빼놓은 마을 사람들은 하루를 굶은 뒤에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굶어 죽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소? 온 마을에 먹을 것이 있는 곳이라고는 한수생의 집 창고뿐이며, 들판에는 시든 풀과 잡초만 가득하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수생의 집에 가서 한수생의 곡식을 가져오면 어떻겠소? 비록 그의 곡식이라고는 하나, 지금 우리는 굶어 죽을 지경이니 목숨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오. 당장 내 목숨이 위험할 때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본성 아니겠소?”
 
“그 말이 옳소. 우리는 숫자가 많고 한수생은 한명이니, 우리가 들이닥치면 한수생이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우리가 모두 굶어 죽을 수야 없으니, 다같이 한수생의 집에 몰려가서 곡식을 가져오도록 하세나.”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마을에서 가장 학식이 깊고 총명하다고 하던 수재(秀才)가 나서서 더욱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모두가 굶주리고 있는데, 한수생은 자기 혼자 배불리 곡식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이처럼 간악한 일이 있을 수 있소? 사람에게 덕이 있고, 나라에 의로움이 있다면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옳소!”
 
“게다가 이 마을은 우리가 다 같이 사는 마을인데, 한수생이 자기 농사만 잘 되었다고 하여 그 곡식을 어찌 자기만 차지한단 말이오? 만약 우리가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이것은 한수생이 간교한 마음으로 우리가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우리를 굶겨 죽이려 드는 것이나 다름 없소.”
 
“옳소! 옳소!”
 
“이대로 굶어 죽겠소? 아니면 같이 일어나 약아 빠진 한수생을 우리 손으로 무찌르고 다시 살 기회를 얻겠소? 굶주리고 괴로워하는 우리들이 뜻을 같이 하여 힘을 모은다면, 어찌 한심한 한수생 따위를 우리가 이기지 못하겠소?”
 
“옳소! 옳소! 옳소!”
 
이에 마을 사람들은 한수생의 집으로부터 곡식을 가져오기 위해 몰려갔다.
 
“한수생은 분명히 비열한 작자라서 절대 고분고분 곡식을 나눠줄 까닭이 없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낫이나 칼을 들고 나섰다.
 
낫과 칼을 든 마을 사람들은 한수생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큰 소리로 문 밖에서 한수생을 꾸짖었다. 그러니 한수생은 겁을 먹고 놀라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곡식을 내놓으라고 마을 사람들이 소리치자, 한수생이 대답했다.
 
“자네들은 내가 농사를 힘써 짓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것이라고 몇달 동안이나 그토록 말했건만, 그 말을 따르지 않더니 지금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
 
그러자 수재가 성을 벌컥내며 외쳤다.
 
“지금 우리들은 모두 굶주려 다들 목숨을 잃을 지경인데, 어찌 너는 비열하게 네가 예전에 더 똑똑했다, 더 뛰어났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느냐? 여기 우리가 모두 죽어 목숨을 잃게 될 판인데, 너는 거기서 오만한 목소리로 네가 더 뛰어나므로 우리는 죽고 너는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뽐내는 이야기를 하느냐? 어찌 너 따위를 사람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느냐? 지금 우리 모두의 목숨보다 고작 네 말이 맞았다고 뽐내는 것이 더 중요하냐?”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고 이야기하기로,
 
“우리가 굶어 죽는 것이 기뻐서 흥겹다고 하는 이 사악한 자를 어찌 해야겠소?”
 
하고 외쳤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성을 내며 한수생을 향해 낫과 칼을 던지려고 하였다.
 
이에, 한수생이 간곡한 목소리로 마을 사람들을 말렸다.
 
“제발 그만두시오. 내가 자네들과 같이 살아온 세월이 몇년인데, 그대들이 굶주려 괴롭다고 하면 그대로 둘 리가 있겠소? 우선 오늘 밥을 먹을 곡식을 나눠줄 터이니, 제발 이런 일은 그만두고 물러나도록 하시오.”
 
그렇게 말하는 한수생은 가련해 보였다.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한수생의 창고에서 쌀 한그릇씩을 퍼갔다. 그러다 보니 그중 몇몇은 잠깐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해가 질 때 즈음, 각자의 집으로 무리가 흩어지려고 하는데 수재가 다시 말했다.
 
“당장은 우리가 두려워 한수생이 쌀을 나누어주었지만, 이제 날이 밝으면 분명히 원한을 품어 우리를 해치려 할 것이오. 그자가 관청에 찾아가 우리가 도적질을 하기 위해 집에 찾아왔다고 일러바치면, 우리는 꼼짝 없이 도적으로 몰릴 것 아니겠소? 재물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한수생이 결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쌀을 나눠주었을 리가 없소. 그런 술수로 잠시 우리를 속이고, 기회만 생기면 우리를 죽이려 들 것이오. 그렇다면 한수생은 필시 간악한 탐관오리와 손을 잡고 우리를 모두 잡아 죽이려 들 것이오.”
 
“옳소!”
 
수재의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수재가 뒤이어 말했다.
 
“더군다나, 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오? 왜 우리가 한수생이 나눠주는 쌀을 걸인이 동냥 구하듯 받아야 한단 말이오? 시 한 구절을 모르고, 옛 성현의 지혜 한마디를 몰라서, 그저 재물만 탐하는 벌레 같은 자에게, 우리가 배고프다는 이유로 쌀을 달라고 빌며 구걸하듯 해야 한단 말이오?”
 
“옳소!”
 
“사람으로 태어나서 굶지 않고 밥을 먹자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이오? 사람이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소? 그런데 왜 우리가 그따위 놈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해야 한단 말이오? 옛날 설총과 강수와 같은 대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존귀한 것은 학식이 있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셨소.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물만 탐내는 그 벌레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소. 그러나 깊이 학식을 연마하여 옛 시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글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우리들은 그놈을 올려다보며 밥 좀 달라, 밥 좀 달라 노비처럼 빌어야 하오. 이것은 가축이 사람을 채찍질하는 짓거리나 다를 바 없지 않소? 우리가 가축처럼 그놈에게 채찍을 맞아가며 밥을 빌어먹어야겠소?”
 
“옳소! 옳소!”
 
“그따위 놈이 진골 흉내를 내고 우리를 노비 취급하는 꼴을 견디며 살 바에야 나는 차라리 죽겠소. 더군다나 이제 그놈은 우리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으니 우리를 해치려 들 것이 당연하지 않소?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먼저 움직여서 그놈을 없애는 수밖에 없소. 어찌 그자를 살려둘 수 있겠소? 사람으로 태어나 당연한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그놈은 우리를 굶주리게 하고 장차 관리들과 손을 잡고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는데, 그 뻔한 것을 모르고 당장 밥 한끼를 빌어 먹자고 그놈에게 굽실거리며 쌀이나 달라고 해야 하오? 그럴 수는 없소. 그럴 바에야 우리 힘을 모아 그 간교한 놈을 먼저 무찔러 없애는 것이 어떻소?”
 
“옳소! 옳소! 옳소!”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수생의 집으로 몰려갔다.
 
이번에는 애초부터 한수생을 해칠 생각을 하고 집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빛부터가 달랐다.
 
‘이번에 도망치지 못하면, 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한수생은 이번에는 일이 훨씬 더 위험해진 것을 알아챘다. 
 
먼발치에서 마을 사람들의 무리를 보자마자 한수생은 손에 집어들 수 있는 은팔찌, 은반지 두어개만 챙겨서 급히 집 뒷문으로 도망쳐 나왔다.
 
한수생으로부터 이야기를 다 들은 장희가 말했다.
 
“본시 사나운 기세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어서게 되면, 중간에 그게 아니다 싶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도 그냥 그 기세에 눌려 일을 저지르게 되는 수가 많은 법이오. 더군다나 자신은 현명하여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데 주위에는 멍청한 놈들뿐이라고 믿고 이 말 저 말 잘 떠드는 놈이 한둘만 섞여 있으면 일이 험악해지는 것은 더 쉬워지기 마련이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수생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낭자, 이제 나는 어찌하면 좋겠소?”
 
장희가 대답했다.
 
“지난날 청해진의 장보고 대사를 따라 천하의 영웅호걸들과 함께, 만리 바깥 바다를 돌아다니며 산과 같은 파도를 넘고, 지옥보다 깊은 소용돌이를 지나쳐오면서 별의별 일을 다 해결해온 이 마님이 여기에 있지 않소? 내가 만사를 다 해결해 주겠다고 그대 앞에 와 있는데 두려워할 것이 있겠소? 들고 있는 은팔찌 하나만 주면 몸을 피할 계책을 알려드리리다.”
 
그렇게 말하는 장희를 한수생이 쳐다보니, 장희의 입술 아래에 드러난 이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으며 눈을 깜빡이며 뜰 때마다 마치 별빛이 반짝하는 것 같았다. 한수생은 감격하여 우는 소리를 내더니 은팔찌 하나를 장희에게 공손히 두 손으로 바쳤다.
 
그리고 곧 엎드려 장희를 향해 큰절을 하였다. 그러더니 다시 남은 은팔찌를 모두 꺼내어 장희에게 다 주었다.
 
“낭자의 말이 참으로 고맙소. 긴 세월을 함께 마을에서 살아온 이웃도 한번 인심이 변하니 나를 죽이려 드는데, 낭자는 오늘 나를 처음 만났는데도 이토록 도와주려고 하니, 그저 감격할 뿐이오. 내가 이 귀한 물건을 갖고 있어보았자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히면 빼앗길 뿐이니, 일단 그대가 맡아주시고, 우리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면 그때 다시 돌려주시오. 물건을 보관해주는 값은 따로 치르겠소.”
 
장희는 한수생을 위로하며 눈물을 닦고 일으켜주었다.
 
장희는 한수생에게 다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둘은 같이 한참을 달렸다. 밤길인데 허겁지겁 뛰어가다보니 한수생은 두차례나 넘어졌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물가였다. 장희는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작은 배를 한척 찾아 그 안에 탔다.
 
“지금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람이 많이 불고 있으며 강물도 서쪽으로 흐르고 있소. 그러니 배를 타고 서쪽으로 피하면 빠르게 도망칠 수 있소. 다만 천하갑영웅 장보고 대사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로 먼바다에는 해적이 들끓고 있소. 그러므로 해적을 마주치지 않도록 서쪽으로 너무 멀리 가지 않게만 조심하면 되는 거요.”
 
“낭자, 참으로 좋은 계책이오!”
 
“내가 이 배를 타고 저쪽으로 가서 배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올 테니, 그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오. 어두운 밤에 그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하니, 그대는 나를 기다리면서 물가에 서서 하나부터 백까지 헤아리고, 백이 될 때마다 뻐꾸기 우는 소리를 흉내 내시오. 그러면 그대가 내는 뻐꾸기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오겠소.”
 
그렇게 말하고 장희는 그대로 삿대를 밀어 배를 물가로 띄웠다.
 
과연 바람이 잘 불어 배는 금세 달빛이 비치는 강물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장희는 배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배가 물결에 흔들릴 때마다 손에 들고 있는 은팔찌가 달빛에 반짝거렸다. 장희는 그것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낮에 “행해만사”라고 걸어두고 부르던 곡조에 따라 홀로 흥얼거렸다.
 
“내 배를 올려놓고 있으면 그것이 곧 내 배인데 주인의 허락을 구하기는 어디에서 구하나? 속임수라고 욕하지 말아라. 이 손 안에는 은팔찌가 여러개나 있고, 배는 멀리 도망쳐주고, 은팔찌 임자는 이제 곧 자신의 옛 이웃들이 저세상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는 놓치는 자가 멍청한 것이라. 어찌 이보다 쉽게 재물을 얻으리? 재물을 구하면서 이렇게 걱정이 없을 수가 없구나.”  
 
한수생을 속이고 도망치는 장희의 배는 갈수록 더 빨리 움직이는 듯했다. 장희는 가사를 바꾸어가며 몇번이고 더 노래를 불렀다.

 


곽재식
2006년 「토끼의 아리아」가 MBC 베스트극장에서 영상화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지상 최대의 내기』 등 다수의 소설과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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