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SHARE
0

구현우
2020년 03월 09일






영이 가늘게 내 팔목을 두드린다 실감 나지 않는다 영은 한장의 사진을 내민다
 
그림 같은 사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쥔 영의 손까지도 그림 같고
 
거리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사진 속의 장소를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언제 일을 끄집어내야 사진의 한때를 복원할 수 있을까 영은 지난날 떠난 집의 주소 같다 영이 내게
 
가깝지 않던 시절에도 영은 나와 있어주었다 이웃의 정 비슷한 것을 나눠주었다 이어진 가로수길을 발맞춰 걷는다 영은
 
나만큼 작다 영은 나보다 착한 척한다 영은 나와 철자가 같고 발음이 다른 이름이다 나의 극야(極夜)다 영은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은 아니고
 
백 미터 이후에도 버즘나무가 서 있다 영이 이제 저녁이라고 말한다 이제야
 
저녁이라고
지금까지의 저녁은 저녁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맨 얼굴을 든다 영이 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지나가는 대화가 있다 영이 잘 보이지 않는다
흑과 백이 마음과 맘으로 엇부딪치고
 
바라는 모든 장면에 영이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가로수길을 빠져나가기 위해 걷는다 이백 미터 이후에도 버즘나무가 서 있다 영과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애틋하겠지 그러나 길은 끝나지 못한다 발은 멈추지 않는다 먼 현재에 영은 나와 함께 있다

 


구현우
2014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