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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8회)

곽재식
2020년 03월 24일



7.
 
큰 깃발을 높이 올린 커다란 배 한척의 가운데에 공주가 머무르고 있는 천막이 있고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공주가 타고 있는 커다란 배, 그 옆으로 훨씬 작은 조각배 두척이 따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졸개들이 타고 있었다. 배들은 좋은 바람을 받아 빠르게 동쪽으로 나아갔다.
 
공주가 타고 있는 배에는 상잠, 영군, 두 장군과 공주의 시녀들, 장군의 부하들과 다른 좋은 옷을 입은 부하들이 같이 타고 있었다. 한편 배 한켠에는 장희도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만약 오늘 한수생이 신라 배에서 강도질을 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장희를 처형한 뒤에 바다에 버릴 참이었다.
 
이때 한수생은 공주가 머무는 장막 안에 있었다.
 
“조금 더 새콤한 과일이 좋으니, 네가 먼저 맛을 보고 더 새콤한 것만 골라서 나에게 먹이거라.”
 
공주는 오색실로 수를 놓은 이불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과일을 직접 집어 먹으면 손에 끈적한 것이 묻게 되므로 한수생에게 먹여달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공주의 명령이니 맨손으로 과일에서 나오는 물이 흐르지 않도록 조심하여 공주의 입에 먹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시녀들이 하는 말이었다.
 
“오래 엎드려 있었으니, 허리가 아프구나. 너는 이제 내 허리를 힘을 다해 주무르거라.”
 
“국모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한수생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고 시킨 대로 공주의 허리를 주물렀다. 공주는 허리가 차차 편안해지는지 작은 소리를 내다가 웃다가 하였다.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나자, 공주는 돌아 누우며 한수생을 쳐다보았다. 공주가 말했다.
 
“허리를 주무르는 너의 힘은 평소와 다르지 않으나, 오늘은 주무르는 박자에 흥이 없으니 전과 같지 않구나. 무슨 일이 있느냐? 오늘 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니 혹시 너도 죽을까봐 두려우냐?”
 
그 말을 듣고 한수생은 공주의 몸에서 손을 떼고 가지런히 앉았다. 한수생이 대답했다.
 
“저는 본시 변변한 골품도 없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어려서는 집에서 글공부를 조금 했을 뿐이고, 나이가 들어서는 한산 아래 작은 밭에서 쟁기질과 낫질을 하며 농사를 짓고 살던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나마 갑작스러운 변을 당하여 집과 밭을 모두 버려두고 몸만 빼내어 도망쳤으니, 이제 또 무슨 일을 당한다고 한들 크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고작 이런 신세로 바다를 떠다니던 몸이 공주님께서 남편으로 거두어주시어, 며칠일지언정 구경도 못해보던 신묘한 음식을 먹고 귀한 대접을 받아보았으니, 이는 평생에 누릴 복을 이미 다 누려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곧 세상을 뜨게 된다고 하더라도 답답할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공주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냐?”
 
한수생이 다시 대답했다.
 
“다만, 저는 이제 곧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는 부하 셋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들과 서로 목숨을 빼앗겠다고 겨루어야 합니다. 비록 백제를 다시 되찾는다 하는 그 뜻이 높고 크기는 하나, 수십년간 삶의 굽이굽이마다 각기 걱정하고 애태우며 지금껏 살아온 사람들끼리 서로 목숨을 없애기 위해 소리 지르고 뛰는 일이란, 도무지 저와 같은 농사꾼에게는 사람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괴로운 것입니다.”
 
한수생은 한숨을 쉬었다. 시녀 하나가 “어찌 감히 국모 앞에서 한숨을 쉬느냐”고 꾸짖었으나, 공주는 손을 들어 시녀를 말렸다.
 
그리고 공주가 한수생에게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해졌다.
 
“무슨 일이냐?”
 
“지금 도위께서 부하로 거느릴 병졸 중 한명이 도망치려고 합니다. 신라 병사와 싸우러 나가는 것에 겁을 집어 먹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공주가 물으니 시녀는 이와 같이 대답했다.
 
이에 한수생은 급히 장막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과연 작은 조각배에 올라타 있던 졸개 하나가 물에 뛰어들어 파도 속을 헤엄쳐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상잠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상잠 옆에 있던 칼잡이 하나가 빠르게 조각배를 향해 달려 내려갔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고 가벼운지, 마치 물 위에 발을 딛는 듯하였다.
 
칼잡이는 곧 활을 들어 멀리 헤엄치고 있는 졸개를 맞추었다. 화살을 맞자 졸개는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아파서 바동거릴 뿐이었다. 칼잡이는 배 위에 놓여 있던, 올가미가 엮인 밧줄을 던져 헤엄치고 있는 졸개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대로 밧줄을 당기니 졸개의 목에 올가미가 걸려 조여들었다. 칼잡이는 줄을 당겨 졸개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자, 그대로 칼을 휘둘러 졸개의 목숨을 빼앗았다.
 
졸개의 핏물이 솟아올라 바다 파도 사이에 흩어지니 그 색이 검푸르게 변했다 말았다 하다가 점차 엷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수생의 표정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멀리 신라 관청의 배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관청의 배들은 한척 한척 제법 멀리 떨어진 채 움직이고 있었다.
 
영군은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도는 듯 했다. 영군은 묻지도 않았는데 한수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은 만약 한척이 해적에게 당한다고 해도 다른 배는 도망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옛날에 장보고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오히려 배들이 서로 뭉쳐 어울려 다녔고 만약 해적의 습격을 받으면 배들끼리 힘을 합쳐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겁을 먹고 저렇게 그저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위께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힘껏 싸우면, 백제를 다시 세우는 큰 뜻을 하늘이 모르지 않을 터이니, 저따위 썩어빠진 신라 관군은 이기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듣고, 한수생이 뭐라고 답할지 몰라 “예, 예”라고 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상잠의 눈치를 보았는데 상잠은 픽 하고 웃는 것 같았다.
 
영군이 한수생에게 다시 말했다.
 
“제가 먼저 제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 관청의 배들 중에 맨 앞쪽의 배를 공격할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먼저 보십시오. 그리고 제가 돌아오거든, 도위께서는 부하들을 이끌고 두번째 배를 공격하십시오.”
 
잠시 후, 영군은 말한 대로 조각배에 올라타서 활을 든 병사 셋과 함께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멀리서 지켜보니, 영군은 거의 부딪히듯이 신라 관청의 배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네 사람이 한꺼번에 화살을 쏘아 대니, 배 위의 신라 병사들은 주춤거렸으며 그중 몇몇은 갑옷이 가려주지 못하는 다리에 화살을 맞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파서 내지르는 소리가 멀리 공주와 한수생 등이 타고 있는 배에까지 들려왔다.
 
신라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영군은 앞장서서 배 위로 올라갔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영군은 창을 움직여 빠르게 앞뒤로 찌르면서 배 이쪽저쪽을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영군의 창에 찔린 사람들이 아파서 내지르는 비명이 다시 들렸는데, 이번에는 그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지 않았다.
 
공주가 웃으며 한수생에게 말했다.
 
“이번에 신라 군사들의 비명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 것은 영군 장군이 창으로 목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리를 지르다가도 목청이 잘려서 소리를 못 지르게 되는 것이다. 신라 군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어떤지만 들어보아도 장군의 무예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지 않으냐?”
 
얼마 후, 영군의 조각배가 다시 공주가 타고 있는 배 쪽으로 돌아왔다.
 
한수생이 쳐다보니, 영군과 그 부하들의 몸에는 피가 튀긴 자국이 소나기를 맞아 옷이 젖은 듯이 온통 퍼져 있었다. 영군이 손등으로 얼굴에 튄 피를 훔쳐 닦은 뒤 바다 쪽으로 손을 터니 얼굴에 시커멓게 피가 번져 눈의 흰자위만 하얗게 빛을 뿜는 것 같았다.
 
“과연 영군 장군의 무예는 백제 제일이다!”
 
“영군 장군이라면 김유신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한칼 거리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며 영군을 칭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군의 부하들은 저마다 신라 배에서 가져온 금은 덩어리, 귀고리, 팔찌 같은 것들과 비단 옷감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
 
상잠이 공주에게 말했다.
 
“빨리 싸우고 왔어야 하기에 이번에도 쌀과 보리 같은 곡식은 옮겨 싣지 못한 듯합니다. 다만 금은과 보석은 넉넉하니 이것을 나중에 긴밀히 다시 곡식으로 바꾸어온다면 우리가 쓰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상잠은 한수생에게 말했다.
 
“이제 도위께서 싸우러 가실 차례요.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이 있다면, 그 말을 백제 조정의 역사에 기록해두도록 하겠소.”
 
그러면서 부하에게 붉은색으로 정갈하게 장식된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보라고 했다. 그 두루마리에는 이전에 죽은 공주의 남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들이 줄줄이 길게 기록되어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겠소?”
 
한수생은 고민하였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보니, 어쩐 일인지 눈에서 눈물이 갑자기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하여 참기 위해 애썼다. 뭐라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는데, 목소리를 내려니 그 말은 아닌 듯하여 다시 입을 다물기를 몇차례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주위에 물었다.
 
“제 부하는 원래 세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한 사람을 잃어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셋 중 하나가 없다는 것은 적지 않은 것이니, 다시 부하 한 사람을 더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잠은 그 말을 듣고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금 도위의 부하가 되어 같이 싸우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오히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영군이 말했다.
 
“제가 도위와 같이 싸우겠습니다.”
 
그러자 상잠이 제지했다.
 
“영군 장군은 도위보다 높은 벼슬에 있으니 부하가 될 수 없소. 게다가 영군 장군은 방금 신라 군사 수십의 목숨을 가져오느라 온몸의 힘이 빠졌을 터이니 연달아 싸울 수가 없소.”
 
그리고 상잠은 다시 한번 누가 한수생과 같이 싸울 것인지 물었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잠은 한수생이 부하 둘만 거느리고 신라 배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배 한편에 묶여 있던 장희가 남은 기운을 다해 소리쳤다.
 
“그대는 ‘행해만사’, 무슨 일이든 말만 하면 들어준다는 나를 잊었는가?”
 
장희의 목소리는 갇혀서 모진 꼴을 당하느라 병들고 굶주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한수생은 다시 눈물이 나려는 것 같았다.
 
“비록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졌지만, 지금 저와 싸우겠다는 사람은 저 사람뿐이니 부디 같이 싸우게 해주십시오.”
 
한수생이 말하자, 공주는 이를 허락했다.
 
상잠은 장희의 몰골을 보고 혀를 차더니,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한편 영군은 장희 몸에 묶인 줄을 풀어주었다. 그러면서 장희에게 물었다.
 
“무슨 무기를 들고 싸우겠소? 구해주겠소.”
 
장희가 대답했다.
 
“지금 내가 싸움을 잘하려면 두가지가 필요하오. 그 첫번째는 바로 새 옷이오. 구덩이에 갇혀 있는 채로 굴러다니고 얻어맞다가 쓰러지기만 수만번을 했으니 옷이 걸레 꼴이 되었소. 하늘도 감복하도록 백제의 의로운 기세를 드높여야 한다는데 이 더러운 차림으로 뭘 하겠소? 좋은 옷 한벌만 구해주시오.”
 
그러자 상잠이 끼어들어 말했다.
 
“지금 배 위에는 남아 있는 여자 옷이 없다. 입고 있는 옷이 더럽다면 두터운 갑옷으로 적당히 가리고 싸우면 되는 일 아닌가?”
 
이때, 공주가 말했다.
 
“남편의 부하가 말하는 것이 틀리지 않느니라. 내 옷 중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빌려주도록 하라.”
 
영군이 장희에게 다시 물었다.
 
“두번째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오?”
 
장희가 대답했다.
 
“도대체 몇끼를 굶었는지 배가 너무나 고프고, 차가운 바닷바람을 계속 맞으며 한자리에 묶여 있었더니 몸이 너무나 차갑고, 게다가 억만가지 두렵고 괴로운 생각만 마음속에 가득하니, 따뜻하고 달콤한 술 한잔만 주실 수 있겠소? 그게 바로 두번째로 필요한 것이오.”
 
그 말을 듣더니, 공주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바라던 대로 가장 좋은 술을 한잔 따라 장희에게 갖다주라고 명령했다.
 
술 한잔을 천천히 다 마신 장희는 한수생과 함께 두 부하가 기다리고 있는 작은 조각배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수생의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영군이 한수생을 향해 말했다.
 
“오늘 신라 군사들을 보니 철갑을 두르고 장검과 쇠뇌를 갖고 있는 병졸들이 많았으므로 평소 보다 막강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도위께서 이끄는 군사의 형세는 신라 군사에 비해서는 미약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들키지 않도록 조용하지만 빠르게 다가가서는, 신라 군사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하여 우리가 있는지도 모를 때에 벼락 치듯이 덮치는 수가 최고입니다.”
 
한수생은 영군에게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반쯤 술에 취한 장희가 갑자기 공주를 향해 말했다.
 
“고작 얼뜨기 남자 셋과 무기도 안 든 병든 여자 하나를 배에 태워 신라의 관군을 무찌르라고 하는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려운 일에는 어려운 만큼 큰 상을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희가 영군 장군이 가져온 것만큼의 재물을 빼앗아온다면, 즉시 저를 풀어서 다른 병사와 같은 자리에 올려주십시오. 만약 저희가 영군 장군이 가져온 것의 두배만큼의 재물을 빼앗아온다면 도위의 벼슬자리를 높여 상잠 장군과 영군 장군의 벼슬자리와 같게 해주십시오. 만약 저희가 영군 장군이 가져온 것의 세배만큼의 재물을 빼앗아온다면 저에게도 벼슬을 내려주시어, 도위의 벼슬자리 바로 아래로 해주십시오.”
 
공주는 무슨 농담을 하는가 싶어 웃었다.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장희와 한수생이 탄 조각배는 빠르게 멀어져 신라 군사들을 향해 나아갔다.
 
공주가 탄 배와 조금 멀어지자 조각배에 탄 졸개들은 장희와 한수생을 보고 말했다.
 
“영군 장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다가가서 갑자기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법입니다. 그렇게 단숨에 신라 배에 올라가서 각자 세 사람씩만 처치하는 것으로 싸워보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적당한 자리에서 배 바깥으로 뛰어내려 헤엄쳐서 달아나거나, 신라 군사들에게 다가가 항복한다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입니다.”
 
한수생이 말했다.
 
“도망치거나 항복하려고 하면, 분명히 상잠 장군의 부하들이 우리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또한 조용히 다가가 신라 관군을 처치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한 사람마다 신라 관군 셋을 상대할 수 있겠소?”
 
한수생의 목소리는 거의 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장희는 그저 취하여 풀린 눈으로 멍하니 점점 가까워지는 신라 배를 물끄러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장희가 졸개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춤을 출 줄 아는 노래 중에 가사를 기억하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예? 노래의 가사를 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문을 몰라 졸개들은 되물었다. 장희가 다시 말했다.
 
“춤이 쉬운 노래 중에 ‘거리에 복숭아꽃 필 때’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아느냐?”
 
장희가 몇번 다그치니 졸개 둘은 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수생이 대답했다.
 
“낭자, 나는 그 노래를 모르오.”
 
“그러면 ‘여름 햇빛 뜨거울 때 내 마음은 더 뜨겁소’라는 노래는 아시오? 아니면 ‘별빛 속에 그대의 얼굴빛도 빛나고’는 아시오?”
 
한참 이야기를 나눈 끝에 장희는 다 같이 ‘여름 햇빛 뜨거울 때 내 마음은 더 뜨겁소’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들 이것이 무슨 짓인지 몰라 엉뚱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장희는 “노래를 더 크게 불러라”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한편 신라 병사들이 탄 배에도 곧 그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신라 병사들은 저마다 노랫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다보았다. 신라 병사들의 배는 세금 걷은 것을 싣고 가는 관청의 배였기 때문에 크기가 상당히 컸다. 그러므로 배 위의 신라 병사들은 한쪽 편에서 다른 쪽 편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저쪽을 보십시오.”
 
신라 병사들이 그쪽 방향을 보니, “여(餘)”라는 깃발을 높이 달고 있는 조각배 한척이 오고 있고, 거기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사람 넷이 있었다. 남자 셋이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에 여자 하나가 춤을 추고 있었는데, 여자가 입은 옷은 대단히 화려했다. 게다가 춤추는 몸짓도 나쁘지 않았으므로, 신라 병사들은 혹시 용왕의 딸이 바닷속에서 올라온 것 아닌가 잠시 착각할 정도였다.
 
배를 이끌고 있는 신라 관군의 장수 또한 한참 그 춤과 노래에 빠져 장희가 타고 있는 조각배가 점차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신라 장수가 말했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작은 배가 떠오고 있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9회에 계속됩니다. 

 


곽재식

2006년 「토끼의 아리아」가 MBC 베스트극장에서 영상화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지상 최대의 내기』 등 다수의 소설과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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