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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마지막회)

곽재식
2020년 04월 21일



장희는 눈치를 채고 한수생에게 손짓을 하여 뒤쪽으로 빠지자고 하였다. 그런데 한수생은 공주가 상잠을 보는 표정이 편안하지 않은 것을 보고, 오직 그쪽만을 걱정스레 볼 뿐이었다. 장희는 답답하여 가슴을 쳤으나, 한수생은 공주만을 바라보았다.
 
상잠이 웃음을 멈추고 말하기 시작했다.
 
“공주는 이제 꿈에서 깨어나기 바라오. 그대가 무슨 백제의 공주란 말이오. 내가 하는 일 없이 굶어 죽을 것 같은 비렁뱅이들을 모아 해적질을 하고자 하였을 때, 그 비렁뱅이들을 끌어모을 그럴듯한 구실이 필요해 시골에서 적당히 데려온 사람이 그대일 뿐이오. 도대체 누가 옥좌의 주인이란 말이오? 옥좌의 주인은커녕, 그대가 백제 부여씨의 후예인지, 도망친 궁녀가 홀아비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인지, 누가 안단 말이오.”
 
공주가 상잠을 꾸짖었다.
 
“장군은 무슨 소리인가? 하늘이 두렵다면, 그와 같은 마귀의 말을 멈추도록 하라.”
 
상잠이 대답했다.
 
“하늘은 그대가 두려워해야 하오. 시골 가난뱅이의 딸인 주제에 해적떼의 두령이 되었으면 언제가 되었든 죄를 받을 날을 겁내며 조용히 살 것이지, 언제부터 그대가 궁중의 법도를 알았다고 말투부터 그 같이 오만한 것이오?”
 
이번에는 영군이 놀라 상잠을 돌아보았다.
 
“장군, 지금 역적의 말을 하고 있지 않소?”
 
그러자 상잠은 큰 소리로 모두가 똑똑히 듣도록 말했다.
 
“그대들은 들으라! 신라의 세상에서 신라를 뒤엎고 다시 백제를 일으켜 세운다고 하고 있으니, 여기 있는 너희들이야 말로 모두 역적이다. 어찌 역적에게 또 역적이 있겠느냐? 다만 내가 지금까지 백제를 다시 되찾는다고 말한 것은, 오갈 데 없고 할 일이 없어 뜻 없이 굶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우리들이 한가지 일을 두고 서로 힘을 합칠 길을 찾기 위한 것이었느니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서해의 섬 하나를 차지하고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살았으니, 이 모두 내가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려 일군 것이다.”
 
영군이 말했다.
 
“장군은 그와 같은 말을 그만두시오.”
 
그러나 상잠은 그에 답하지 않고 하던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큰 보물을 얻게 되자, 여기 스스로를 공주라고 일컫는 자는 제 욕심만 알아 이제 구주를 차지하고 신라를 무너뜨리겠다는 허망한 소리를 하고 있다. 어느 세월에 구주에 가득한 신라의 병사들을 모두 무찌른단 말인가? 그것은 저 자가 자신의 공주 놀이를 오래 하고 싶어서, 우리 모두가 싸우다가 죽기를 바란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누군가 참다 못해 상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잠 옆을 지키고 있던 칼잡이가 단숨에 그 사람을 찔러 쓰러뜨렸다.
 
상잠이 이어서 말했다. 
 
“지금 나와 함께 공주를 물리치는 자에게는 여기에 있는 보물을 나누어줄 것이고, 서경에 쌓아놓은 다른 재물도 모두 나누어주겠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 비단 옷을 입고 향기로운 술을 마시며 평생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 내 말을 따라 목숨을 구하고 부유하게 살겠는가? 아니면, 백제를 되찾자는 망령된 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저 공주 귀신을 따라 죽겠는가? 지금 누가 여기 병졸들을 위하는 사람이고 백성들을 위하는 사람인가? 재물을 나누어 갖고 편히 살자는 사람인가, 한 사람의 공주 놀이를 위해 다 죽자고 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말을 하고, 상잠은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었다.
 
그러자 동굴 안은 극히 소란스러워졌다. 어떤 자들은 공주를 등지고 상잠에게 붙었으며, 어떤 자들은 “역적이다” “신라 군사보다 더 악랄한 놈이다” 외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공주의 곁이라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칼을 갖고 있던 상잠과 상잠 주위의 칼잡이들이 매우 유리하였다.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어지럽게 싸움을 계속했다. 죽고 죽이는 소리, 함성과 비명이 어두운 동굴을 계속해서 울렸다. 상잠과 칼잡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렸는데, 영군만은 맨손으로 싸우는데도 무예가 뛰어나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상잠은 공주를 공격하려 하였고, 영군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 맨주먹으로 상잠의 칼날 옆을 쳐내며 공주를 지키려 하였다.
 
그 혼란한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상잠이 차지한 보물상자를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자 상잠과 칼잡이들은 보물 상자를 들고 뗏목에서 내렸다. 그것을 보고 또다른 졸개가 보물 상자에 달려들다가 칼잡이들이 휘두르는 칼에 당했다.
 
뗏목은 물길에 따라 이리저리 떠다녔다. 혼란한 틈을 타 장희는 슬쩍 그 뗏목 위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한수생의 머리카락을 잡아끌며 뗏목을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밀었다. 그러면서 뗏목 위의 썩은 지붕 부분을 뜯어서 물 위에 띄우고는 횃불로 불을 붙였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지금뿐이오.”
 
장희가 한수생에게 말하고는 다시 힘을 다해 뗏목을 밀며 그를 끌어당겼다.
 
곧 맹렬히 불탄 연기가 동굴 안에 가득 찼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되고,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칼을 휘두르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또 들렸다. 누가 누구를 찌르는지, 또 몇명이 쓰러지는 지 알 수 없었다.
 
뗏목은 동굴과 이어진 통로를 따라 떠내려가더니 얼마 후 바다로 나왔다.
 
바다에 나와보니, 동굴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정도로 그저 햇빛이 밝고 한가롭게 파도 찰싹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겁에 질린 한수생은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뗏목 위에 기대어 있었다. 그런데 바다로 뗏목이 나오고 썩은 뗏목이 다 무너져 산산이 흩어지자 하는 수 없이 장희는 한수생을 끌어내어 물 밖으로 나왔다.
 
한수생은 놀라고 겁을 먹고 지치고 다쳐 있었으므로, 한참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장희가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걸었다. 장희는 한수생에게 더 빨리 걸으라고 다그쳤다.
 
“이제 보물 상자를 찾았으니 상잠은 다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오.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배를 댄 곳의 반대편 쪽으로 들어가서 하루나 이틀 밤 정도만 숨어 있으면, 상잠의 무리를 피할 수 있을 것이오. 재빨리 도망쳐야 하오.”
 
한수생은 한동안 따라가는가 싶더니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용히 장희를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낭자, 내가 그대에게 치른 물건은 고작 팔찌 몇개뿐이었는데 그대는 내 목숨을 몇번이나 구해주었으니, 이미 그 값을 충분히 다했소. 지금 그대가 홀로 가겠다면 그렇게 하시오. 나는 공주께서 계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소.”
 
장희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한수생을 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한수생이 장희에게 말했다.
 
“지금 내 신세가 이렇다고는 하나, 공주는 나를 진실로 남편으로 대해주었으며 그동안 나를 아껴주었소. 비록 바다 한쪽 구석진 소굴에서 맺은 인연이나, 부부로 지내면서 서로 정을 드러내고 가까이 지낸 것이 하루 이틀의 일만은 아니오. 내 어찌 그 의리를 잊고 홀로 도망칠 수 있겠소?”
 
한수생이 길을 되돌아 가겠다고 하니, 장희는 몇차례 탄식하며 한수생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굳힌 마음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다시 우물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보니, 우물 입구부터 어지러웠으며 꺼진 횃불 하나가 던져져 있었다.
 
장희는 낙엽을 모아 불씨를 살리더니, 불길과 연기를 가득 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우물 아래로 드리워진 밧줄을 당겨 꺼내어보니, 밧줄에는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는 줄을 붙잡은 누군가의 잘린 손목이 그대로 딸려 올라왔다.
 
한수생과 장희는 손목을 떼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후 차례로 줄을 붙잡고 우물을 따라 내려갔다.
 
우물 아래 동굴에 도착하자, 물 흐르는 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 흔적은 없는 것 같았다. 어두운 동굴 사방에 이리저리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몇몇 시신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걷고 있던 장희와 한수생에게 문득 부딪히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지 않소?”
 
장희가 말했다. 그러나 한수생은 그에 답하지 않고, 소리 높여 공주를 불렀다.
 
“공주─ 공주─”
 
한참을 그렇게 부르며 동굴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는데, 문득 가느다란 소리로 “이쪽을 보라”라고 말하는 공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한수생은 다급히 다가가보았다. 그곳에는 동굴 한쪽 웅덩이에 기댄 채로 꿇어앉아 있는 영군이 있었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한수생은 영군의 앞에 횃불을 비추어보았다. 영군은 온몸 곳곳 칼자국이 가득한 채 피로 가득한 웅덩이에 반쯤 빠져 있었다. 손가락은 잘려 나가 둘만 남아 있었으며,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렀다. 이미 기력을 완전히 잃었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마지막 숨을 가늘게 쉬고 있을 뿐이었다. 힘이 없어 무슨 말을 하는 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 그가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덕이 높으신 공주께서 백제의 마지막 보물을 찾아 저희에게 이렇게 보여주셨으나, 저희가 어리석어 역적에게 속았으니 저희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물며 재주가 부족하여 역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귀하신 옥체를 상하게 하였으니 그 죄는 더욱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여기서 죽는 것은 안타깝지 않으나, 공주께서 다시 백제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부디 뜻을 잃지 마시고, 다시 일어나시어 역적을 멸하고 천하사방의 뜻있는 영웅호걸들을 모아 신라를 깨뜨리시고 구주를 차지하시어 이 세상을 손에 넣으십시오.”
 
영군은 그렇게 말하고 쓰러졌다. 그 뒤로 영군이 막아서서 가리고 있던 공주가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백제의 도위이자, 공주께서 남편으로 삼고 계신 제가 공주를 구하고자 돌아왔습니다. 이제 아무 걱정 마십시오.”
 
한수생은 그렇게 말하고 공주를 일으켜 업었다. 공주는 팔다리에 칼날이 스쳐 피를 흘리고 있기는 하였으나, 다행히 크게 다친 듯 보이지는 않았다.
 
장희는 한수생을 도와 공주를 데리고 뗏목이 흘러갔던 물길을 따라 다시 동굴에서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뗏목과 같이 붙들고 있을 것이 없었던 데다가 공주까지 같이 가야 했기에 나가는 길이 한결 더 힘들었다.
 
간신히 동굴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여, 이제 급히 다시 도망치고자 했을 때였다.
 
“멈추시오!”
 
공주가 그 소리에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니, 졸개 셋이 칼을 들고 앞길을 막고 있었다. 졸개 하나가 말했다.
 
“상잠 장군께서 이곳 물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살아남은 공주의 무리가 혹시 나타날지 모른다 하시더니 과연 장군의 지혜는 대단하구나. 이곳을 지키다가 내가 공주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이제 공주의 목을 상잠 장군에게 갖고 가면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졸개는 공주에게 칼을 겨누었다.
 
“세상의 운수가 이렇게 된 것이니, 공주는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지금은 운수가 상잠 장군에게 넘어갔으니, 상잠 장군을 따르지 않으면 그에게 죽는 수 밖에 없소. 나는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칼을 휘두르는 것인데, 어찌 이것이 내 탓이라고 할 수 있겠소? 오히려 욕심을 내어 옥좌를 차지하고 나라를 차지하려 한 공주 스스로의 죄라고 하겠소.”
 
그 말을 듣고 장희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졸개가 장희의 목에 칼을 갖다 들이밀었다.
 
“상잠 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간교한 말을 잘하여 그 말을 듣다보면 속는 수가 많으니 네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듣지 말고 바로 목을 베라고 하셨다.”
 
그리고 졸개 셋은 나란히 칼로 공주를 찌르려 했다.
 
그때 공주가 눈을 부릅뜨고 호령하였다.
 
“너희들은 지금 어느 앞에 서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군사를 일으켜 서해 한가운데에 서경을 세우고, 다시 백제를 일으켜 온 바다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 누구더냐? 너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할 때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었느냐? 매일 은혜가 깊고 덕이 높다고 칭송하며 허리를 숙이고 엎드려 떠받들던 사람은 또한 누구더냐? 이런 짓을 하면 하늘이 천벌을 내릴 것인데 그것이 두렵지는 않으냐?”
 
그 말을 듣자 졸개들은 덜컥 겁이 나서 칼을 거두고 주저앉았다. 그들은 한참을 망설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더니, 결국 세 사람은 공주와 장희와 한수생을 데려가서 상잠에게 처결을 맡기기로 하였다.
 
졸개들에게 이끌려 다시 해변으로 나아가보니, 배 위에서 공주가 앉던 자리를 상잠이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상잠의 무리들은 다시 바다로 떠나기 위해 분주히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상잠의 주위에는 그를 가까이 따르던 칼잡이들이 언뜻 보였는데, 영군과 싸울 때에 많이 다쳤는지 그들 또한 몸이 많이 상해 있었으며 제대로 걷지 못하고 절뚝거리는 자들도 많았다.
 
장희와 한수생과 공주가 붙잡힌 채 배 위로 올라오자, 상잠은 매우 기뻐하였다.
 
“드디어 귀찮은 자들을 깨끗이 떨어버리니, 가뿐한 마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겠구나. 당장 이 셋의 목을 베어라.”
 
그런데, 멀리서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천둥번개가 칠 구름이 없는 맑은 날씨였으므로, 배 위의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웅성거렸다. 부하들이 명령을 바로 따르지 않자 상잠은 다그치려 하였다. 그런데 팔이 부러진 칼잡이 하나가 끙끙거리며 상잠 옆으로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병사들이 공주 대하기를 아직도 두려워하니, 장군께서 직접 칼을 뽑아 공주의 목을 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여 위엄을 보이시고 하늘의 뜻이 장군께 넘어왔음을 보이신다면 앞으로 모든 병사들이 장군께 충성할 것입니다.”
 
상잠은 그 말을 옳다고 여기고 칼을 빼 들고 공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때 다시 또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칼날 앞에서 공주가 상잠에게 말했다.
 
“내가 그동안 백제를 다시 일으킨다는 네 말만 믿으며 온 바다에서 풍 태자의 보물만 찾아 다녔는데”
 
아직까지도 풍 태자라는 말이 나오자 무심코 바닥에 엎드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주가 이어서 말했다.
 
“지금 그 보물 상자를 찾고도 보물을 보지 못했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한이 깊어, 귀신이 되어 너의 꿈에 매일 나타난다면 너에게도 기분 나쁜 일일 것이니, 내가 목이 잘리기 전에 그 보물을 한번만 구경하게 해주면 어떠한가?”
 
그러자 상잠은 미소를 짓고는 보물 상자를 가져왔다.
 
보물 상자는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는데 상잠에게는 열쇠가 없었다. 그러므로 상잠은 몽둥이를 가져와 자물쇠를 부수게 했다. 몇차례 자물쇠를 두들기니 녹슨 자물쇠는 곧 부서졌다. 마침내 커다란 상자가 열렸다.
 
그런데 보물 상자 안에는 금붙이와 은붙이가 들어 있지 않았다. 금은은커녕 비단 조각 하나 들어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안에는 커다란 나무 토막들만 들어 있었다. 상잠이 그 나무 토막 중 하나를 꺼내어 보았더니, 거기 새겨진 글씨는 이러했다.
 
“백제국인(百濟國印)”
 
그것을 보고 한수생이 의아해했다.
 
“저것은 나무로 만든 도장이 아닌가.”
 
곧 장희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과연 백제 제일의 보물이다. 신라에게 망한 뒤 도망치던 풍 태자가 자신이 아직도 백제의 임금이라고 하면서 나무로 막도장을 만들어서 백제의 옥새라고 새긴 것을 보물이라고 여기에 숨겨두었구나. 나라의 옥새만큼 귀한 보물이 또 어디에 있겠느냐?”
 
다른 나무 토막을 살펴보았더니, 어떤 것은 대장군의 도장이라고 새겨져 있었고, 어떤 것은 상좌평의 도장이라고 새겨져 있었고, 또 어떤 것에는 정승의 도장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종이가 가득했는데, 그 종이에는 백제가 신라를 물리쳤을 때 누구에게 어느 땅을 다스리게 해줄 것인지를 빽빽히 써놓은 지도가 있었다.
 
“남은 백성이라고는 수십명뿐인 망한 나라에 우두머리를 세워두고 자기들끼리 임금이니, 대장군이니 부르면서 이렇게 도장과 지도를 잔뜩 만들어놓고 있었구나. 그것을 거창한 뜻이라고 자랑하면서 귀하다고 꼭꼭 숨겨놓지 않았는가? 이따위를 찾겠다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칼부림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다닌 놈은 이것을 보물이라고 숨겨놓은 놈보다 도대체 몇갑절이나 더 멍청한 놈인가?”
 
장희는 그렇게 말하고 우렁차게 웃었으니, 깔깔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귀신이 우는 소리 같았다.
 
상잠은 보물 상자에 든 것을 보고도 도무지 믿지를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장희가 홀로 웃는 소리를 듣고 문득 정신이 이상해진 듯한 얼굴이 되더니, 장희와 한수생과 공주를 모조리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칼을 빼어 들더니 이리저리 휘둘렀다.
 
이때 다시 아까의 그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배가 휘청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졸개들 중에 몇몇은, “천벌인가” 하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웃고 있던 장희는 잠시 웃음을 참으며 다시 상잠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놈아. 내가 어떻게 보물 지도를 구해온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내가 어떻게 대포고래와 홀로 대결하여 이기고 지도를 빼앗아올 수 있겠느냐?”
 
한수생이 홀로 말했다.
 
“만사를 모두 다 풀어주는 낭자가 오늘도 우리를 구하는구나.”
 
장희가 다시 말했다.
 
“지도야 베껴 그리면 한장이 더 생기는 것이니, 한장을 나에게 준다고 한들 아까울 것이 없지 않느냐? 내가 그렇게 대포고래를 설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아는 얼간이 중에 입만 열면 자기가 백제의 충신이고 계백과 성충과 흥수의 원한을 갚겠다고 떠들어대는 한심한 작자가 하나 있으니, 그자에게 옛 백제의 지도를 보여주면 반드시 무슨 뜻인지 알아낼 거라고 했다. 그후로 연기를 피우거나 불빛이 보이는 흔적을 따라오기만 하면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단 말이다. 그러니 대포고래 그놈이 그렇게도 좋아하더란 말이다.”
 
장희가 다시 웃었다. 상잠의 칼잡이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부터 들리던 그 천둥소리는 대포고래가 바위를 날려 보내는 투석 대포 기계로 우리 배를 공격하던 것인가?”
 
그리고 곧 거대한 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상잠이 타고 있던 배는 단숨에 박살이 났으며, 배 위의 모든 사람들은 물속에 빠져 이리저리 흩어졌다. 상잠의 일행은 섬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보물다운 보물을 얻지 못해 화가 난 비단잉어와 부하들이 섬에 도착하여 화풀이로 그들을 모조리 네토막으로 잘라버리고 말았다. 나중에는 칼잡이 부하들과 상잠의 몸 조각이 이리저리 뒤섞여 어디까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모두 물고기들에게 뜯어 먹히고 말았다.
 
이리하여 공주 해적의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났다.
 
그뒤의 이야기를 알아보자면, 장희와 한수생과 공주는 널빤지 몇개를 붙들고 바다를 떠돌다가 간신히 육지에 닿아 목숨을 건졌다.
 
공주는 그후로 한수생과 함께 남쪽 끝의 어느 깊은 시골 마을에 들어가 늙도록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장희는 소서궁이라고 하던, 공주의 요새가 있던 섬에 다시 찾아갔는데, 그 섬에 저장되어 있던 재물을 모두 갖고 나왔으므로 평생 부유하게 지냈다. 이때 갖고 나온 재물을 공주와 한수생에게도 나누어주었으므로, 두 사람 역시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공주와 한수생은 얼마 후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리고 그 둘이 장성한 후 나이가 들었을 때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웠다. 이때 두 사람이 견훤을 도와 여러 공을 세웠으므로,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과연 공주가 백제를 다시 일으키는 일을 도왔다”라고 떠들었다.
 
한편, 장희는 무슨 일이든 다 풀어준다고 떠들고 다닐 때 부르던 노래의 곡조에 새로 가사를 붙여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다녔다. 그 노래의 가사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대포고래에게 공격당하여 배가 부서지고 널빤지 위에서 한수생과 공주와 장희가 함께 떠돌 때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그때, 날씨가 추워지자 장희와 공주는 서로 껴안고 추위를 견디려 했다. 그리고 한수생은 보물 상자 속에 들어 있던 나무 도장을 서로 비벼서 불을 붙여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장희가 말했다.
 
“나무를 비벼 불을 붙이는 것은 쉽지 않소. 그 일만 수십년을 하던 늙은이들이 한나절을 붙들고 있어도 해내지 못하는 일인데, 한번도 불을 피워보지 못한 그대가 어찌 할 수 있겠소. 그만 애를 쓰고 포기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 추워서 몸이 굳게 되면 그것이 마지막인가보다 하고 쉬도록 하오.”
 
그러자 한수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장희의 노래를 부를 때에도 이 대목을 가장 좋아했다.
 
“나는 고향에서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죽을 뻔하였으나 낭자를 만나 목숨을 구했소. 그리고 바다에 나와서는 서해에서 가장 무섭다는 해적을 만났으나, 낭자 덕분에 공주를 만났고 벼슬을 살게 되었고 귀한 사람이 되었소. 그후에는 몇배나 되는 숫자의 신라의 군사와 맞서게 되었으나 낭자의 도움으로 항상 이기고 돌아오는 장수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도 했소. 지금은 비록 역적을 만나 온몸에 칼자국이 생겼으며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이 넓고 넓은 바다에 나무 판때기 하나에 붙어 깊은 밤 속을 떠다니면서 추위에 얼어 죽을 걱정을 하고 있기는 하오. 하지만, 한 나라의 옥새가 내 손에 들어와 있고 구주가 모두 내 것이라는 지도가 내 손에 있으니, 이번에도 어찌 살아날 길을 이 두 손으로 찾아보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 한수생은 나무 도장을 비비고 또 비비다가 두 손에 물집이 터져 진물로 범벅이 되고 손톱이 빠져나가도록 계속 그것을 비볐는데, 그러다 마침내 불이 붙었으니 그때부터 세 사람을 따뜻하게 비추어주었다고 하더라.
 
 
─ 2020년, 청권사에서.
 
 

지금까지 「신라 공주 해적전」을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곽재식

2006년 「토끼의 아리아」가 MBC 베스트극장에서 영상화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지상 최대의 내기』 등 다수의 소설과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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